먼 ‘사무실’ 대신 집에서 가까운 ‘거점’으로 출근
노트북만 들고 가볍게, 노트북조차 없어도 ‘OK’
‘연봉’도 ‘복지’도 아니고 남이 일하는 ‘사무실’을 부러워하게 될 줄은 몰랐다. SK텔레콤 거점오피스 ‘스피어’ 얘기다. 복장부터 가벼워지는 이곳은 출근카드를 찍자마자 한숨이 푹푹 나오는 답답한 사무실과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거점오피스는 이름처럼 본사가 아닌 여러 지역에 사무실을 두고 가까운 곳으로 출퇴근할 수 있도록 만든 공간이다. SK텔레콤은 지난 7일 신도림과 경기도 일산·분당 3곳에서 거점오피스 운영을 시작했다. 2020년 4월 서울 종로 등에서 시범 운영을 한 지 약 2년 만이다.
운영 2주차를 맞은 지난 12일 서울 신도림 디큐브시티 오피스동 21~22층에 위치한 거점오피스로 출근해봤다. SK텔레콤 직원에 빙의한 채 신도림역에서 내려 교통카드를 찍고 오피스동 입구까지 걸어가는 데 걸린 시간은 단 2분, 안 그래도 피곤한 출근길 에너지를 아끼게 해준 것이 반갑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오피스에 들어서는 순간 목디스크를 유발하는 출입카드도, 툭하면 안 찍히는 지문인식도 필요 없었다. 얼굴이 등록되지 않아 무단출입(?)에 실패했지만, SK텔레콤 직원이 앞으로 다가서니 인공지능(AI) 인식 기술이 0.2초 만에 판별해 출입문을 열어줬다. 따로 시간을 입력할 필요 없이 출입과 동시에 출근 도장도 찍힌다. 번거롭게 마스크를 벗지 않아도 인식에 전혀 문제가 없었다.
사무실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21층 높이에서 내려다보이는 탁 트인 서울 시내다. 매일 무료로 제공되는 샐러드와 간식을 지나쳐 커피를 한잔 내리고 가볍게 창가에 앉았다. 창밖이 탁 트이긴 했지만 빼곡한 아파트와 고층 건물들로 가득해 다소 삭막했다.
그래서 회사가 고안한 것이 ‘식물 파티션’이다. SK텔레콤 관계자는 “아파트와 공장이 많은 신도림 지역 특성을 고려해 내부 곳곳에 식물을 많이 비치했다”고 소개했다.
커피도 마셨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일할 시간. 이곳은 ‘거점’인 만큼 직원 개인 좌석은 애초에 없다. 도서관처럼 입구에 놓인 큰 키오스크에 빈 좌석이 표시되는데, 이곳에서 터치로 사용할 좌석을 선택하거나 전용 애플리케이션(앱)으로 미리 ‘찜’할 수도 있다. 오픈 후 이곳을 찾는 직원은 일평균 약 200명. 예약할 수 있는 좌석은 2개 층을 합쳐 123석이 마련됐다. 창가 자리일수록 예약 경쟁이 치열하다고 한다.
예약한 자리로 가보니 PC 본체 없이 모니터와 USB-C 케이블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직원이 개인 노트북을 가져와 케이블에 연결하는 순간 모니터와 연동되면서 개인화된 공간으로 변신한다. 노트북 충전도 별도 충전기 필요 없이 케이블 하나로 모두 해결했다.
좌석에는 정보기술(IT) 업계 복지로 입소문을 탔던 ‘허먼밀러’ 의자가 눈길을 끈다. 가격이 200만원 안팎이어서 이 의자 교체를 복지로 내세우는 회사까지 등장하고 있는데 이곳 의자는 모두 허먼밀러 제품으로 마련됐다고 한다. SK텔레콤 관계자는 “허먼밀러 의자 중 하얀색은 ‘레어템’(희귀아이템)이고 본사 의자는 모두 검은색”이라며 “하얀색 의자에 대한 구성원 만족도가 높다”고 자랑했다.
여러 사람과 같이 일하려면 개인 좌석이 아닌 ‘빅테이블’을, 혼자 조용히 일하고 싶을 때는 외딴 섬처럼 좌석 간 거리가 먼 ‘아일랜드’ 좌석을 선택하면 된다.
SK텔레콤 관계자는 “좌석 간 거리가 가까우면 간단한 통화를 하거나 화상회의를 할 때 신경 쓰여서 맘 편히 일하지 못하고 사무실 빈 곳을 찾아 떠돌게 된다”며 “아일랜드 좌석은 옆자리와 거리가 멀어 자유롭게 통화가 가능하고 옷걸이와 가방 두는 곳도 마련돼 창가 다음으로 인기가 좋다”고 언급했다.
그래도 신경이 쓰여 혼자만의 회의실이 필요하면 1인용 회의공간인 ‘스피어팟’을 이용하면 된다. 회의실 입구 태블릿에 얼굴을 인식하면 원하는 시간 동안 회의실을 사용할 수 있다.
외부에서 투명하게 들여다보이는 회의실은 안에서 버튼 하나만 누르면 불투명한 유리로 변해 ‘스텔스 모드’가 가능해진다. 직원에게 선택권을 준 세심한 배려가 돋보인다. 22층에는 4인 이상 사용할 수 있는 회의실도 따로 마련됐다.
노트북조차 무거워 맨몸으로 출근하고 싶다면 자리마다 태블릿이 놓인 ‘아이데스크(iDesk)’에서 일하는 방법도 있다. 자리에 비치된 태블릿에 얼굴을 인식하면 가상 데스크톱 환경(VDI)과 즉시 연동돼 본인이 평소에 사용하는 PC와 동일한 환경에서 일을 할 수 있다. 내 업무공간이라는 느낌이 영 없다면 원하는 배경화면을 저장해 설정해 둘 수도 있다.
사무실 전체에서 특히 눈에 띄는 공간은 헤드마운티드디스플레이(HMD)가 놓인 ‘버추얼 워크 스페이스’다. 가상현실로 멀리 떨어진 직원과 원격 회의를 할 수 있도록 마련한 공간인데, 직접 HMD를 써보니 줌 화상회의보다 훨씬 현실감 있는 회의 참여가 가능했다. 현재 메타의 ‘호라이즌 워크룸’을 사용 중이며 올 하반기 SK텔레콤의 ‘이프랜드 HMD 버전’이 나오면 자체 서비스를 활용할 예정이다.
이곳의 또 다른 특징은 일회용품이 일절 없다는 것이다. 커피나 차를 마실 수 있지만 환경·사회·지배구조(ESG) 경영 실천의 일환으로 종이컵이나 플라스틱컵은 비치해두지 않았다. 회의실 책상은 폐의류를 재활용한 섬유 패널로 친환경 오피스를 구현했다.
전체 디자인은 구(球)라는 의미를 지닌 ‘스피어’라는 이름처럼 하나의 큰 원형 띠 형태로 설계됐다. SK텔레콤은 울릉도 코스모스 리조트를 설계한 하버드대 건축과 출신인 김찬중 경희대 교수를 자문을 받아 이 공간을 꾸몄다고 한다.
SK텔레콤 관계자는 “아직 국내에서 본격적으로 거점오피스 운영을 시작한 곳이 없어 벤치마킹할만한 사례를 찾기보다는 자체적으로 구축했다”며 “기존 재택근무와 거점오피스 제도를 새로운 근무 형태로 함께 운영할 계획”이라고 했다.
IT업계에서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 새로운 근무형태가 화두가 되고 있다. 재택근무를 고집하는 직원과 사무실 출근을 요구하는 회사 간의 갈등도 본격화되고 있다. SK텔레콤의 거점오피스는 이를 혼합한 하이브리드 방식이라는 점에서 적절한 대안이 될 것으로 보인다.
가끔 외근 나갔다가 사무실에 복귀하기 애매한 거리일 때, 가까운 곳에 거점오피스가 있다면 시끄러운 카페를 찾아 헤매지 않고 조용한 사무실에서 업무를 마무리할 수 있다.
실제 직원들 만족도는 굉장히 높아 보였다. 이날 거점오피스에서 근무 중이던 백새미 SK텔레콤 자금팀 매니저는 “집이 인천이라 평소 서울 본사까지 1시간 30분가량 걸리는데 이곳으로 출근하면 30~40분이 절약된다”며 “재택근무를 하면 늘어지기 마련인데 가까운 곳에 사무실이 생겨 업무 집중도가 향상됐다”고 이용 소감을 밝혔다. 다만, 이곳에는 본사와 달리 구내식당이 없어 식사는 알아서 해결해야 한다.
이곳의 기획과 운영은 박정호 SK텔레콤 부회장이 직접 발탁한 30대의 젊은 팀장이 맡았다. 2년 전부터 거점오피스를 기획하고 준비해온 윤태하 SK텔레콤 거점오피스 기획·운영팀장은 “지난해 초 본격적으로 기획을 시작했고 1년간 준비한 끝에 오픈하게 됐다”며 “사내 전사 공지로 직원들 의견을 취합해 건의사항을 지속해서 검토하고 반영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거점오피스 확대에 따라 본사에 노는 공간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은 회사가 해결해야 할 숙제로 남았다. 윤 팀장은 “본사 유휴 공간을 어떻게 재활용할지 고민 중”이라며 “활용률을 높이는 방향으로 공간 변화를 수반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