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킬앤하이드' 루시 역으로 열연
5월 8일까지 샤롯데씨어터
배우들이 자신의 캐릭터에 얼마나 몰입하느냐에 따라 관객들의 반응도 크게 엇갈린다. 배우가 캐릭터에 공감하는 순간, 단순히 ‘연기’로만 느껴지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공감의 힘’이다. 뮤지컬 ‘지킬앤하이드’ 배우 정유지의 ‘루시’에 관객들이 깊이 공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정유지는 샤롯데씨어터에서 공연되고 있는 뮤지컬 ‘지킬앤하이드’에서 따뜻한 손길을 내민 ‘지킬’을 사랑하게 되지만, 그와 동시에 ‘하이드’에게 고통 받는 런던 클럽의 무용수 ‘루시’로 분했다. 지난 18년간 공연되면서 단 한 차례도 실패하지 않은 ‘지킬앤하이드’의 ‘루시’ 역에는 그간 김선영, 최정원, 정선아, 아이비, 윤공주 등 최고의 뮤지컬 배우들이 거쳐 간만큼, 여배우들에겐 아주 매력적인 배역이다.
“뮤지컬을 처음 시작했을 때부터 꼭 하고 싶었던 역할이었어요. 꿈을 이룬 것 같았죠. 처음엔 부담감에 많이 떨렸어요. 특히 첫 공연은 너무 떨려서 죽고 싶을 정도였어요. 하하. 넋이 나가 있었죠. 그 땐 ‘이 순간을 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니까요? 다행히 지금은 즐기면서 하고 있지만요(웃음).”
여러 배우들이 캐릭터를 거쳐 간 터라, 앞선 ‘루시’들과 어떻게 차별을 두느냐도 배우에겐 하나의 과제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러나 정유지는 굳이 ‘나만의 루시’를 만드는 것보다 자신의 루시를 관객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대해 먼저 고민했다.
“사실 루시에게 감정이입이 됐어요. 루시만 보면 슬픔이 밀려와요. 현실에 찌들 수 있는 상황에 놓여 있잖아요. ‘얼마나 힘든 인생을 살았을까’ ‘얼마나 상처가 많을까’ 생각하면서도, 그런 상황에 포기하지 않고 순수함을 가질 수 있었던 게 대견하면서도 마음이 아프더라고요. 때문에 루시가 관객들에게 마냥 슬프게만 보이지 않았으면 하는 고민을 많이 했어요. 연출님과 루시의 가사 이야기를 끊임없이 나눴고, 어떻게 하면 긍정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지 고민했죠. 루시의 곡이 어둡게 시작해서 밝게 끝나는 경우가 많은 것도 이 때문이고요.”
“관객들도 관극을 할 때 역할들에 공감을 하면 더 재미있게 볼 수 있잖아요. 그 중에 루시에게도 공감을 하길 바라요. 공감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제가 루시의 상황에 공감한 것처럼, 대중들도 그렇게 되길 바라죠.”
절망적인 상황에 놓인 루시에게 다시 꿈을 꿀 수 있는 ‘트리거’ 역할을 하는 것은 ‘지킬’이다. 누군가는 루시를 더는 희망이 없는, 억눌림 당하고 핍박 받는 캐릭터로 설정하지만 정유지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마음속에 작은 희망을 품고 있는 루시로 설정하고, ‘지킬’이 그 희망을 밖으로 끌어낼 수 있도록 계기를 부여한 캐릭터라고 말한다. 이런 그의 설정을 설득력 있게 그릴 수 있도록 한 건 함께 연기하는 배우들의 힘도 컸다.
“주로 (박)은태 오빠랑 공연에서 호흡을 많이 맞췄어요. 사실 겁이 나기도 했는데 리드를 잘 해주셔서 편하게 연기를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특히 스킨십 씬에서도 민망함 따윈 느낄 겨를이 없을 정도로요. 다른 씬에서도 제가 헤매는 부분에 있어서 조언도 많이 해주셨고, 먼저 연습실에 찾아와서 맞춰보자고 말씀해주셔서 감사했죠. 카이, (전)동석 오빠도 ‘역시 프로구나’라고 생각할 정도로 잘 맞았고요.”
무엇보다 ‘루시’는 정유지가 인간적으로 생각하는 ‘멋진 사람’의 기준에 일정 부분 유사한 부분이 있었다. 정유지는 ‘멋진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하면서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는 루시의 모습에 공감했다고 말한다.
“제가 존경하는 분이 배우 윤여정 선생님이에요. 말씀하시는 것에서 ‘이런 인생을 살았겠구나’라는 것이 느껴지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평탄하지 않은 삶 속에서 오히려 깨달음을 얻고 지금의 자리에 오르게 된…. 나중에 누군가 저를 그렇게 생각해주면 너무 행복할 것 같아요. 그런 면에서 루시에게도 배울 점이 있었죠. 루시 역시 자신이 처한 상황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잖아요. 외부적인 환경 때문에 ‘가치 없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누군가에겐 ‘빛’이 되어줄 수 있는 사람이죠. 루시에게 지킬이 있는 것처럼, 저도 제 주변의 사람들을 통해서 ‘나도 충분히 가치 있는 사람이구나’라는 걸 느끼고 있어요.”
정유지는 걸그룹으로 연예계에 먼저 발을 디뎠고, 뮤지컬 무대에 선지 벌써 8년이 됐다. 스스로 ‘나도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느끼게 된 것도, 최근의 일이다. 그만큼 그의 연예계 생활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19살에 JYP에서 연습생 생활을 시작했고, 한 차례 데뷔가 무산된 후 2012년 EXID로 데뷔곡을 발표한 후 바로 탈퇴했다. 이듬해엔 그룹 베스티로 데뷔해 활동하다가 2017년 9월을 끝으로 아이돌 생활을 접게 됐다.
이후 뮤지컬 배우로 완전히 전향하면서 ‘노트르담 드 파리’ ‘안나 카레니나’ ‘영웅본색’ ‘광주’ ‘마리 앙투아네트’ 등 차근히 필모그래피를 채워가고 있다.
“사실 처음엔 뮤지컬이 내 길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한 적도 있어요. 가수로서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노력했는데, 뮤지컬 배우는 또 새롭게 쌓아야 하는 것들이 많더라고요. ‘내가 뭐하고 있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죠. 지금까지 노력한 것들이 여기서는 아무 쓸모없는 것이라는 생각이었거든요. 그런데 이제 조금 알게 된 것 같아요. 사실 제가 과거에 집착하는 성격이었는데 공연을 거듭할수록 부정적인 감정들이 해소되더라고요. 미친 듯이 힘든데, 그게 또 그렇게 행복해요. 특히 많은 팬들이 응원의 DM(다이렉트 메시지)을 보내주시는데, 누군가에게 제가 추억을 만들어줬다는 것이 가장 행복하고요.”
“지금은 뮤지컬 배우를 선택한 것에 후회 없냐고요? 전혀요. 이 길에 너무 만족해요. 더 뮤지컬에 열중할 거예요.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