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주> 우리나라는 음주공화국이라 할 만큼 음주에 관대한 사회입니다. 반면, 술로 인한 폐해는 매우 심각합니다. 주취자의 강력범죄가 증가하고 알코올중독자가 양산됩니다. 평화로운 가정과 사회가 풍비박산나기도 합니다. 술 때문에 고통 받는 개인과 가정, 나아가 사회의 치유를 위해 국가의 음주·금주정책이 절실하게 요청됩니다. 술은 야누스의 얼굴을 가졌습니다. 항상 경계해야 하는 마음으로 이 소설을 들려드립니다.
제36화 맹세
“이 넓고 좋은 주막을 이래 놔둬서야 쓰겠소? 좀 활용해 봅시다.”
염 부장과 조막손이 지루해할 즈음 한종탁은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화제를 바꿨다. 그것도 조막손이 좋아할만한 소리를 한답시고 조만간 회사 사무실 회식을 여기서 갖겠노라 큰소리를 쳤다. 그러자 염 부장이 직속상관을 무시하고 말 대포부터 쏘고 보는 한종탁을 어이없어 했으며 그런 사정을 모르는 조막손은 반색을 했다. 한종탁은 어렴풋이 이 약속이 술 깨고 나면 립 서비스로 끝날 것이라는 걸 예감하고 있었다.
술 먹으면 낯짝이 두꺼워지고 세치 혀는 자기 마음대로 놀았다. 그래서 술 깨고 나면 전날의 일들을 감당할 수 없어서 자못 당혹스럽기 마련이었다. 술주정이 기억나면 쪽팔려서 당황하고 반대로 기억이 없으면 무슨 짓을 했을지 몰라 당혹스러웠다. 게다가 술기운과 함께 충천하던 기까지 밤새 빠져나가버리고 나면 한종탁은 극도의 불안감에 위축되어 끙끙 앓다가 식은땀을 흘리곤 했다.
한종탁은 주말과 주일 내내 방바닥에서 물걸레처럼 뒹굴었다. 식은땀을 팥죽처럼 흘리다 보니 물걸레가 따로 없었다. 토요일은 술이 깨지 않아 괴로워서 송장처럼 누워있었지만 일요일은 술 깨고 난 허함과 불안함으로 식은땀이 배인 채 뒹굴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은 게 아내 노지연의 성화가 불같았기 때문이었다. 노지연은 트렁크 가방을 싸서 한종탁의 앞에 던져 놓고는 집을 나가달라고 소리쳤다.
“당장!”
한종탁은 못 들은 척, 계속 자는 척하며 미동도 하지 않았다.
“서류는 내일하고 당장 내 눈앞에서 사라져!”
노지연이 발길질로 한종탁의 엉덩이 고관절 부위를 걷어찼다. 하지만 힘이 실리지 않아 아프지는 않았다. 한종탁은 계속해서 죽은 듯 잠을 자는 척했다.
“으아아아아!”
노지연이 고성을 지르며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한종탁은 얼른 일어나 아내를 말렸다.
“나 진짜 술 안 마실게. 이번엔 확실하게 끊어버릴게. 평생!”
“지랄하네. 나보고 그 말을 믿으라고?”
노지연이 도끼눈을 하고 한종탁을 흘겨보았다. 한종탁은 어쨌든 노지연의 관심을 끌어오는데 성공했다 싶어 조금 더 진득하게 달라붙었다.
“진짜야. 진짜 이게 마지막이야. 술 끊을게. 마지막으로 한번만, 딱 한번만 더 믿어주라.”
한종탁이 오른손 검지를 세워 보이며 애절한 눈빛을 지어보였다. 잠시 노지연의 눈빛이 흔들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한종탁은 더욱 애처로운 표정으로 정확하게 노지연의 심금을 건드렸다.
“속는 셈치고 진짜 딱 한번만 믿어주라. 마지막으로 은혜를 베풀어주면 나 개과천선하마.”
“인간아. 김석규가 그렇게 술 처먹다 정신병원에 가는 것 보고도 술이 넘어가든?”
“알았어. 난 석규 전철 안 밟을 거야. 믿어줘. 정말이야!”
그렇게 해서 술을 끊게 된 것이었다.
그 옛날 환웅이 인간세상을 구하고자 태백산 신단수(神檀樹)에 내려왔을 때 곰과 범이 사람 되게 해달라고 빌었더랬다. 그러자 환웅은 쑥 한 줌과 마늘 스무 쪽을 각각 주면서 이걸 먹고 백일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소원 성취할 거라고 말했다는데, 어쨌든 한종탁의 백일기도가 단군신화에서 차용해 온 거라면 그야말로 탁월한 선택에 신뢰성까지 담보해 내겠지만 불행하게도 둘 사이엔 아무런 연관이 없다. 다만 한종탁은 거두절미하고 동료들에게 술 끊었다고 말하기가 부끄러워서 에둘러쳤을 뿐이었다.
이제껏 한종탁이 술을 끊겠다고 맹세한 게 얼마나 많으냐고 물어본다면 밤하늘의 별만큼은 족히 된다고 조금 부풀려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비장하고 꼿꼿하게 세워진 맹세는 대부분 작심삼일이나 길어야 일주일을 버텨내지 못하고 비바람 눈보라 없이도 제 스스로 흔적을 지우며 사라져 버렸다. 그랬는데 어떻게 또 술 끊었다 말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한종탁은 김석규의 입원기간을 대충 3개월로 때려잡아 백일기도 중이라고 둘러댄 것이었다.
“일단 석규가 퇴원할 때까지는 반드시 금주다. 그리고 탄력 받으면 계속 밀어붙일 거고.”
회식자리에서 술 마시지 않고 귀가한 한종탁이 상기된 표정으로 말했다. 불과 며칠 전 평생 금주할 거란 선언에서 엄청 후퇴한 발언이었지만 노지연이 모르는 척하며 맞장구를 쳐주었다.
“아마 석규 씨도 퇴원하면 더 이상 술 먹지 않을 걸.”
‘개가 똥을 참지, 석규가 술을 참아?’ 이렇게 말해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한종탁은 군말 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한종탁이 술을 끊으려고 한 역사는 술을 마신 역사와 대체로 일치한다. 한종탁은 어릴 적 초등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에 이미 막걸리에 취해본 경험이 있었다. 당시 한종탁의 아버지는 자전거포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워낙 주당이었던지라 가게를 삼분의 일쯤 질러 대폿집을 만들어 버렸다. 졸지에 주모가 된 한종탁의 어머니는 시래깃국에 대포를 팔았으며 큰 단골은 남편이었고 작은 단골은 아들 종탁이었다. 한종탁은 어머니 눈을 피해 술독에서 막걸리를 한 종지씩 떠다 마셨는데 그게 여느 군것질보다 더 감칠맛이 났다. 그러다 종종 취해서 뒷방에 쓰러져 자곤 했는데 돌이켜보면 그건 음주라기보다 재롱에 불과한 것이니까 한종탁의 음주 역사에서 제외하고 가야겠다.
한종탁이 본격적으로 술을 마시게 된 것은 학력고사를 치르고 난 이후였다. 술은 어른에게 배우라고 했지만 돼먹지 못하게도 한종탁은 친구들끼리 어울려 무람없이 마셨다. 중앙시장에서 순대나 닭 곱창으로 소주를 마시다가 자정이 되면 깡소주를 들고 겨울바람이 살을 에는 남강둔치로 나갔다. 당시 그곳은 한종탁 일행처럼 돈 없고 혈기 왕성한 군상들 차지였던지라 수틀리면 당장 치고 박고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 던지고 아주 난리도 아니었다.
한종탁은 대학교 일학년을 마친 후 입대하려고 휴학계부터 내고 보았는데 어이없게도 호적에 일년 늦게 실려 있어 군대엔 가보지도 못하고 허송세월을 보내야 했다. 그래서 술값이라도 벌 요량으로 집짓는 공사현장에 나가게 되었다. 아마 일을 시작한지 삼일가량 지났을 것이다. 십장이 퇴근 후에 일꾼들을 데리고 삼겹살집에 가서는 글라스에 콜라를 칠십 퍼센트쯤 붓더니 나머지는 소주를 마저 채웠다. 십장과 일꾼들은 일명 ‘쏘콜’ 한잔을 깨끗이 비우면서 회식을 시작했다.
박태갑 소설가greatop@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