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야 정치인 100여명 참석해 '통합' 강조했지만
한덕수 총리, 추도연단 오르자 지지자 비난 봇물
재단 관계자 만류에도 "윤석열 타도한다" 고성
노무현 전 대통령은 국내 정치에서 '통합'과 '소통'을 가장 강조해온 인물로 꼽힌다. 혹자는 이를 '노무현 정신'이라고 표현하면서까지 통합과 소통에 애썼던 그의 업적을 기리기도 한다. 바로 그 노무현 정신이 있기에 매해 5월 23일이 되면 경남 김해시에 위치한 봉하마을은 노란색 옷을 입고, 하얀색 국화를 든 추도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 됐다.
이날 2023년 5월 23일도 마찬가지였다. 7000명이 넘는 추도객이 봉하마을을 방문해 노 전 대통령이 생전에 그토록 강조했던 통합과 소통의 정신을 기렸다. 정치인들도 약 100명 가까이 이날 모습을 드러내며 추도에 나섰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박광온 원내대표 등 지도부·원내지도부와 문재인 전 대통령, 김진표 국회의장, 이해찬·한명숙·정세균 전 총리와 권양숙 여사 등 야권 인사들은 물론이고, 한덕수 현 국무총리, 이진복 대통령실 정무수석과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 박성민 전략기획부총장, 구자근 대표비서실장 등 여권 인사들도 '국민통합'의 메시지를 들고 이날 봉하마을을 찾았다.
서거 14주년을 맞는 노 전 대통령의 추도식은 추모와 축제의 중간쯤의 성격을 띠었다. "그립다" "보고 싶다" 등을 외치며 추도식 행사가 열린 생태문화공원에 모인 방문객들은 더운 날씨에도 시종일관 밝은 표정을 유지했다. 이날 추도식을 찾은 정치인들도 밝은 표정으로 방문객들의 환호에 화답하기도 했다. 망자를 그리워하는 것이 눈물뿐이 아니라 웃음과 미소로도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했다.
그런 만큼 이날 추도식은 '통합'의 장이 되는 듯했다. 추도식 시작 직후 방영된 '시민이 답이다'는 제목의 시민추모영상에선 국민통합을 염원하는 목소리를 뚜렷이 들을 수 있었다. 이어 추도사를 맡은 김진표 국회의장도 "지역주의와 승자독식, 진영정치와 팬덤 정치를 넘어 우리 정치를 능력 있는 민주주의로 바로 세우겠다"고 말하면서 노무현 정신을 계승해 국민통합을 이루겠다는 열망을 드러냈다.
하지만 문제는 곧바로 터졌다. 노무현 정권에서 마지막 총리를 역임하기도 했던 한덕수 현 총리가 추도사를 낭독하기 위해 무대 위로 올라오자, 관중석에서는 야유가 쏟아졌다.
이들은 한 총리를 향해 "물러나라" "내려가라" "꺼져라" 등 소리를 질렀고, 일각에서는 욕설이 나오기도 했다. "헛소리하지 말고 내려와" "무책임한 말이다" "윤석열 타도한다" 등 현 정부를 겨냥한 말들도 쏟아지자 노무현재단 관계자들이 "노무현 대통령 얼굴 걸고 하는 행사다. 자제해달라"고 말리기도 했지만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한 총리는 "2008년, 대통령님께서 고별 만찬에서 해주셨던 말씀을 기억한다. '강은 반드시 똑바로 흐르지 않는다. 그러나 그 어떤 강도 바다로 가는 것을 포기하지는 않는다'고 하셨다"면서 "그 말씀대로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우리에게 주어진 시대적 소명을 완수하겠다. 우리 사회의 소외된 약자를 보듬고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으며 민생에 온기를 더하겠다. 자유와 번영, 그리고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 소통과 통합의 정신을 이어가겠다"고 말하면서 통합의 가치를 강조하는 헌사를 노 전 대통령에게 꿋꿋이 바쳤다.
이날 통합을 위해 추도식에 나선 야권 인사들의 발언에서도 현 정부를 겨냥한 듯한 가시가 돋힌 언사들을 찾아볼 수 있었다.
이재명 대표는 추도식 직후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민주주의가 다시 퇴행하고, 노 전 대통령이 꿈꿨던 역사의 진보도 잠시 멈추었거나 과거로 일시 후퇴한 것 같다"며 "이 안타까운 현실 속에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그리움이 훨씬 큰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라고 말하며 정부를 겨냥하기도 했다.
아울러 추도식 전 있었던 이 대표와 권양숙 여사의 오찬에서도 정부·여당의 대일 외교를 겨냥한듯한 선물이 전해졌다.
권 여사는 이 대표에게 독도가 포함된 한반도와 무궁화가 그려진 접시, 책 '일본 군부의 독도 침탈사'를 선물했다. 현 정부의 대일(對日)외교에 대한 우회적인 비판의 의미가 담긴 것이라는 게 정치권의 해석이다. 또 이 오찬 자리에는 문재인 전 대통령, 이해찬·한명숙·정세균 전 총리, 김진표 국회의장이 식사에 함께 했지만 여권 관계자는 아무도 초대받지 못했다.
일부 지지자들 역시 현 정부와 여당을 배척하는 발언을 쏟아내기도 했다. 한 총리에게 비난을 퍼붓던 한 시민에게 기자가 비난의 이유를 묻자 "배신자다. 다시는 여기 와선 안 된다"고 날을 세웠다. 또다른 노 전 대통령 지지자들은 욱일기에 윤석열 대통령의 얼굴을 합성한 깃발을 들고 와, 이를 오해한 다른 시민들과 고성을 지르며 마찰을 빚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