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남다름을 특별하게 발견해 주는 시선, 그 비밀을 지켜주는 의리
슈퍼히어로가 지구를 구하는 영화 속에서조차 그들은 고뇌한다. 지구와 우주의 평화를 위해서만도 아니고 사랑에 빠져서만도 아니다. 인간의 능력을 넘어선 재능을 지닌, 남과 다른 자신의 존재 자체에 대해 고뇌하고 가능한 정체를 숨기려 한다.
이유는 잔인하게도 간단하다. 태고 때부터 우리는 우리와 다른 것을 경계했다. 우리의 존립을 해할 것으로 두려워했다. 두려움은 경외가 아니라 멸시와 배제, 제거로 이어지기 일쑤였다. 히어로 영화에서조차 악의 무리로부터 지구를 구하고 우리를 지켜내고 나면, 적을 물리친 그 초능력이 우리에게로 향할까 지레 걱정하고 골칫거리로 여긴다.
현실에서나 현실을 투영하고 풍자하는 콘텐츠에서나 마찬가지인 상황이다 보니, 여기 슈퍼맨과도 같은 아빠 김두식(조인성 분)의 비행 능력을 이어받은 소년 봉석(이정하 분), 남편 없이 홀로 아들 봉석을 숨어 살다시피 키워온 엄마 이미현(한효주 분)의 고충과 고통은 가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공개 2주밖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뜨거운 입소문을 타고 있는 디즈니+ 드라마 ‘무빙’의 재미 요소는 여러 가지다. 작가 강풀의 웹툰을 원작으로, 영화 ‘특별시민’의 감독과 조감독이었던 박인제-박윤서 감독이 함께 연출을 맡아 신선한 캐릭터와 흥미로운 이야기 전개를 영상으로 잘 살렸다.
출연진은 촘촘하고 배우들의 연기는 죄다 호연이다. 초능력 1세대 인물들로 등장하는 류승룡, 한효주, 조인성, 김성균, 최덕문, 김국희의 연기는 출연 분량과 상관없이 강렬하고. 2세대 초능력자로 정원고 3학년생으로 분한 고윤정, 이정하, 김도훈의 연기는 경력 대비 단단하고 시청자의 마음을 붙들어 놓는 힘이 있다. 국가안전기획부 제5차장 역의 문성근과 정보관리국장 역의 김신록, 2세대 초능력자 번개맨 역의 차태현은 이름값을 한다. 김희원, 유승목, 전석호 정원고 교사 3인방은 극에 유연함과 웃음을 드리운다. 그리고 미국에서 파견된 ‘청소부’ 프랭크가 되어 종횡무진 활약하는 류승범의 연기는 무서우리만큼 걸출하다.
웹툰 원작자가 직접 드라마 극본을 쓴 덕분일까. 곱씹어 보고 싶게 귀에 박히는 명대사가 많고, 주제 의식이 선명하다. 초능력자들을 슈퍼히어로 장르에 쫄쫄이 입혀서 투입하지 않고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 히어로와는 거리가 먼 모습으로 살아가게 한 덕분이다. 초능력 학예회처럼 각종 초능력이 펼쳐낼 수 있는 진기명기 장면을 자랑하듯 떠벌리는 대신 그들이 감내해야 하는 인생의 무게를 조명한다.
같은 것을 놓고 누구는 좋아하고 누구는 꺼리거나 실망하는 법이라 혹자는 지금까지 공개된 9회차 동안의 액션 장면을 다 합해도 너무 적다며 지루함을 호소하기도 하지만, 초능력을 인생에 대입해 한국적 정서를 길어 올린 히어로물의 탄생이라고 많은 이가 호평한다. 필자는 후자의 의견에 한 표를 던지는 시청자다.
류승룡이 연기한 장주원, 코드명 구룡포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딸을 위해 자신의 비상한 능력을 활용해 손쉽게 돈 버는 인생의 선택지를 택하지 않았다. 묵묵히 몸으로 일해서 밥을 벌었고, 특별한 능력을 과시하기보다 숨겼고, 아비의 DNA를 그대로 받은 딸 역시 모르고 ‘평범하게’ 살기를 바랐다.
한효주가 연기한 이미현 역시 마찬가지다. 누구보다 멀리 보고 듣는 초능력을 감추고, 사랑하는 아버지 문산(김두식, 조인성 분)의 비행 능력과 엄마 미현의 특출난 시력을 받은 아들의 초능력을 철저히 누르고 숨겨가며 키웠다. 그 청력과 시력으로 쉬이 돈 만들 방법이 많았을 텐데 연인과의 추억이 담긴, 문산이 좋아했던 돈가스를 튀기며 살아왔다.
재능을 들키는 날엔 어떻게 이용되다 어떻게 외면당할지, 사람들이 얼마나 두려워하고 배척할지 누구보다 잘 아는지라 자신이 있던 자리를 포기하고 철저히 부모로서 살아온 주원과 미현이다.
인생은 깔때기 같아서 만날 사람은 만나고 얽힐 인연은 얽히고야 만다. 주원의 딸 희수(고윤정 분)와 미현의 아들 봉석이 고3, 그것도 2학기에 한 학교, 한 반이 되고 둘은 친구가 된다.
친구가 되는 방법엔, 인연의 행로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우선 서로를 알아본다. 동기상구, 같은 기운은 서로를 당기기 마련이어서 비슷한 존재적 특성을 갖고 비슷한 처지로 살아온 봉석과 희수는 금세 공통점을 느끼고 금세 친해진다. 친해진 것만으로 친구가 되기는 어렵다. 진정한 친구가 되는 지름길이자 비법이 있으니 비밀의 공유다.
상대에게 내 비밀을 얘기할 수 있다는 것은 상대를 믿는 것이고, 말하기 전에 들켰는데 불안하지 않다면 그것도 상대를 믿는 것이다. 믿음을 받은 사람 역시 상대를 믿는다면,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자신의 비밀을 공유한다면 상호신뢰하는 진정한 친구가 서로에게 생긴 것이다. 다음은 ‘무빙’ 4화, ‘비밀’ 편에서 희수와 봉석이 나누는 대화다. 봉석은 몸이 붕 뜬다는 것, 기분이 좋으면 더욱 뜬다는 비밀을 희수에게 들킨 뒤다.
봉석: 근데 조금 의외였어.
희수: 뭐가?
봉석: 너, 생각보다 안 놀라서.
희수: 내가 그랬나?
봉석: 응. 나 진짜 처음 들킨 거거든. 이런 날이 오면 어떡하지, 진짜 어떡하지? 걱정했는데. 근데 나는 네가 생각보다 놀라지 않는 게 더 놀라웠어.
희수: 놀랐지. 이걸 보고 어떻게 안 놀래. 놀랐어.
봉석: 음, 음, 근데 조금 덤덤하달까? 아니, 뭔가 되게 쉽게 받아들이는 것 같아서.
희수: 세상엔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고, 너 같은 사람도 있고 나 같은 사람도 있으니까. 비밀, 지켜줄게.
봉석: 어, 고마워. 왠지 너는 비밀 잘 지켜줄 것 같아. 이상한 나를 보고도 막 놀라지 않았으니까.
희수: 이상해? 다른 거 아니야?
봉석: 다르다고? 이상한 게 아니고?
희수: 뭐가 이상해? 특별한 거 아니야? 너 이상하지 않아, 조금 다르고 특별할 뿐이야.
봉석: 고마워!
“넌 이상하지 않아, 조금 다르고 특별할 뿐이야.”
그토록 숨겨 왔던 나의 다름을 좋은 시선으로 발견해 주는 희수의 말에 봉석은 고맙고, 아래층에서 듣던 엄마는 눈물짓는다. 얼마 후 희수 역시 자신의 남다른 능력을 봉석에게 얘기한다. 사실 희수는 진작부터 “난 다치지 않아”라고 말해 왔으나 봉석도 우리도 일반적인 의미로 받아들였던 터인데, 확실하게 비밀을 공유한다. 그리고 서로 비밀을 지켜준다.
사실 이 장면은 뒤에 나오는, 극 중 시간상으로는 먼저 이뤄진 김두식과 이미현의 비밀 공유 방식과 똑같다. 두식은 미현에게 이벤트를 열어 주고 싶어서, 사랑을 특별하게 표현하는 방법으로 초능력을 공개한다. 미현은 놀라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초능력을 지닌 미현인데다 두식이 못 알아들었을 뿐 미현은 “오감이 정말 좋다”고 누차 말해 왔다. 미현 역시 민용준 제5차장(문성근 분)에조차 두식의 비밀을 모른다고 보고하고, 두식도 발설하지 않았으므로 민 차장은 미현이 자신의 첫 번째 작전 때 시력을 많이 잃은 것으로 알고 있다.
남은 모르고 둘만 아는 비밀, 비밀의 공유는 우정과 사랑을 탄생시키는 위대한 법칙이다. 사랑과 우정에 함께할 때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