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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 일그러진 애국주의가 판친다


입력 2024.03.17 07:07 수정 2024.03.17 07:07        김규환 기자 (sara0873@dailian.co.kr)

최대 음료업체 제품 디자인에 ‘친일 이미지’ 있다 맹폭

노벨상 작가 일본 中 침략 미화했다 친일 프레임 씌워

테슬라 제친 비야디 회장 불륜·자녀 美 국적 보유 매도

뒤틀린 애국주의…험난한 中경제 더욱 악화시킬 수도

지난해 8월 24일 일본 후쿠시마 제1원전 오염수 방류가 시작된 이후 중국에서 반일 움직임이 거세게 불고 있는 가운데 그해 8월 27일 베이징의 한 일식집에 "일본에서 수입된 모든 수산물의 판매를 중단한다"는 표지판이 붙어 있다. ⓒ AFP/연합뉴스

중국에서 뒤틀린 ‘애국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중국 최고 부호의 음료업체가 '일본에 아첨하는(媚日) 기업‘이라는 낙인이 찍혀 불매운동에 시달리고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친일파로 고소를 당했으며, 재벌그룹 창업자는 불륜을 저질렀고 그의 자녀가 미국 국적을 보유하고 있다며 매국노로 고발딩하는 등 애국주의를 빙자한 음모론이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 최대 음료업체인 눙푸산취안(農夫山泉)의 창업자이자 중국 부호 1위인 중산산(鍾睒睒·70) 회장이 난데없이 ‘한간’(漢奸·매국노) 취급을 받고 있다고 홍콩 명보(明報),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 등이 지난 12일 보도했다. 애국주의 성향의 네티즌들은 눙푸산취안 음료제품의 디자인이 일본의 건축물을 모방한 것이라는 친일기업설을 퍼뜨린데 이어, 중 회장의 아들 중수쯔(鍾墅子·30)가 미국 국적을 보유하고 있는 사실에 격분해 이 회사 제품 불매운동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소셜미디어(SNS) 상에는 눙푸산취안의 각종 음료를 변기나 싱크대에 콸콸 쏟아붓는 퍼포먼스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으며, 장쑤(江蘇)성 창저우(常州) 지역 편의점은 이 회사 제품을 판매하지 않겠다며 업체 로고가 붙어 있는 냉장고를 치우는 모습을 SNS에 올렸다. 쓰레기 더미에 버려진 눙푸산취안 생수의 빈 플라스틱병 무더기 사진도 빠르게 퍼지고 있다.


이들 네티즌은 먼저 눙푸산취안의 녹차제품을 정조준했다. 이 제품 포장에 ‘친일’ 이미지가 담겨 있다고 공격했다. 용기 겉면에 인쇄된 건물 그림이 '일본의 사찰'을 닮았다는 것이다. ‘은둔의 기업가’로 대외 노출을 극도로 꺼리는 중 회장이 직접 나서 "중국 전통 사원을 본떠 그린 창작물"이라고 해명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일본풍’ 논란에 휩싸인 중국의 대표 생수 눙푸산취안의 포장 디자인. 붉은색 페트병 뚜껑은 일장기의 붉은 태양, 포장의 산은 후지산을, 또 다른 제품의 포장에 일본의 5층탑을 인쇄했다고 애국주의 성향의 네티즌들이 맹공을 퍼부었다. ⓒ 홍콩 명보 홈페이지 캡처

네티즌들은 오히려 다른 제품 포장까지 문제 삼았다. 대표제품인 눙푸산취안 생수병의 빨간색 뚜껑이 사실 일본 욱일기 색깔을 차용했으며, 포장지에 그려진 산도 후지산을 그린 것이라고 억지를 부렸다. 빅뱅의 지드래곤을 광고모델로 기용한 차음료 茶π의 포장지에 쓰인 차(茶)와 수학기호 파이(π) 등이 야스쿠니 신사 건물과 닮았다고 주장했다. 또다른 음료 둥팡수예(東方樹葉) 포장은 도쿄 아사쿠사의 센소지 5층탑을 인쇄했다고 근거 없는 해셕을 내놓기도 했다.


중 회장은 2위안(약 366원)짜리 생수를 팔아 갑부가 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중국에선 '생수왕'이라고 불린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그의 자산은 624억 달러(약 82조 2700억원)로 중국 1위이고 세계 20위에 올랐다.


존경받는 기업가였던 그가 한순간에 한간으로 몰리게 된 것은 눙푸산취안의 경쟁업체 와하하(娃哈哈)그룹 '쭝칭허우(宗慶後) 회장 사망'과 무관하지 않다. 중 회장은 1990년대 쭝 회장 밑에서 일한 적이 있는데, 쭝 회장이 지난달 사망하자 "중산산의 성공은 은인 격인 쭝 회장을 배신한 덕"이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여기에다 중 회장의 아들 수쯔가 조국을 배신하고 미국 국적을 취득한 사실이 알려지는 등 꼬리에 꼬리를 물며 결국 친일 논란까지 이어진 것이다.


중국 네티즌들의 뒤틀린 애국주의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디. 한 블로거는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모옌(莫言·69)을 친일파로 몰아 법원에 고소해 ‘한간죄’를 씌웠다. 고소는 중국판 트위터인 웨이보(微博)에서 애국주의를 앞세워 21만 팔로워를 보유한 아이디 ‘진실을 말하는 마오싱훠(說眞話的毛星火)’가 주도했다고 SCMP가 전했다. 그는 지난달 27일 “모옌은 영웅선열을 먹칠한 혐의가 있으며, 영웅선열법을 위반했다”며 법원에 제출한 A4 4장 분량의 고소장을 공개했다.

‘진실을 말하는 마오싱훠’라는 중국 애국주의 성향의 블로거는 지난달 28일 웨이보에 노벨수상작가 모옌을 기소했다며 올린 기소 접수증(왼쪽)과 이를 비판한 후시진(오른쪽) 전 환구시보 편집인. ⓒ 싱가포르 연합조보 홈페이지 캡처

마오싱훠는 고소장에서 모옌이 소설 ‘붉은수수밭’(紅高粱家族)과 ‘풍유비둔’(豊乳肥臀)에서 일본의 중국 침략을 미화했고 마오쩌둥(毛澤東) 주석을 모욕했다는 등의 26개의 ‘범죄 증거’를 나열했다. 이와 함께 모옌의 작품을 판매금지하고, 사과와 함께 15억 위안을 배상하게 하라고 법원에 요구했다.


모옌 기소 주장은 단숨에 핫이슈로 떠올랐다. 마오싱훠는 온라인 투표에서 1만여 명의 지지자를 확보했다며 “압도적 승리”를 주장했다. 하지만 웨이보 팔로워 430만명을 보유한 모옌은 일절 대응하지 않고 있다. 논란이 확산되자 대표적 국수주의 논객인 후시진(胡錫進) 전 환구시보(環球時報) 편집인이 나서 이들 네티즌을 질타했다. 그는“노벨문학상이 모옌의 ‘원죄’가 됐다”는 글을 올려 기소자가 트래픽을 짜내기 위한 소동임을 다들 알면서도 버젓이 확산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고 개탄했다.


한 유명 셰프는 마오쩌둥 주석의 아들 마오안잉(毛岸英)을 조롱했다는 비판에 결국 사과를 해야 했다. 명보에 따르면 왕강(王剛)은 지난해 11월29일 “다시는 계란볶음밥을 만들지 않겠다”고 공개 선언하며 고개를 숙였다. 왕강은 웨이보 팔로워 337만 9000명, 동영상 사이트 빌리빌리 팬 687만 5000명을 거느린 스타 셰프다. 앞서 27일 밤 그가 SNS에 계란볶음밥 요리 영상을 올리자 애국주의 네티즌들은 마오안잉을 조롱했다며 맹비난하며 댓글 폭탄을 퍼부었다.


마오안잉은 1950년 11월25일 한국전쟁 때 참전했다가 유엔군 폭격으로 숨졌는데 그의 죽음 원인을 두고 여러 설이 있다. 마오안잉의 사망이 계란볶음밥 때문이란 주장은 그와 함께 근무했던 인민지원군 작전처 양디(楊迪) 부처장이 쓴 한국전쟁 참전 회고록 ‘지원군 사령부의 세월 속에서’에 처음 나온다.


ⓒ 자료: 미국 퓨리서치

회고록에 따르면 마오안잉은 밥을 짓다가 연기 때문에 미군의 폭격을 맞고 숨졌다. 방공수칙을 어기고 불을 피운 탓에 연기가 연합군 폭격기의 눈에 띄었다는 얘기다. 사망 당시 그의 나이는 28살이었다. 이어 재발간된 책에서는 전쟁 중에 매우 귀한 계란이 배급되자 마오안잉이 계란볶음밥을 만들어 먹기 위해 불을 피우다가 폭격 때문에 사망했다고 좀 더 구체화됐다.


이에 중국역사연구원은 2020년 11월 SNS를 통해 마오안잉은 부대 사령부의 무선이 노출됨에 따라 위치가 알려져 폭격으로 사망했다며 목격자들의 증언을 근거로 내세웠다. 공산당도 2021년 마오안잉이 계란볶음밥을 만들어 먹다가 목숨을 잃었다는 설은 ‘10대 가짜뉴스’라며 강력히 부인했다. 이후 애국주의 네티즌들은 마오안잉이 사망한 11월 25일이면 이날을 ‘계란볶음밥절’이라 부르며 희화화하는 게시물들을 찾아내 당국에 고발하거나 사과를 요구했다.


최대 전기자동차 업체 비야디(比亞迪·BYD) 창업자 왕촨푸(王傳福·58) 회장도 애국주의 성향 네티즌들의 희생양이 됐다. 자동차 애호가 커뮤니티인 쑹싼지처(鬆散機車)를 설립한 장샤오레이(張小雷)가 왕 회장이 불륜을 저질렀다고 실명 고발했다.그는 왕 회장이 사내 여성 임원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으며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윌리엄과 딸 앨리스 모두 원정출산으로 미국 국적을 획득했다고 주장했다. 윌리엄은 이미 비야디 경영에 참여하고 있는 만큼 수백만 비야디 소유주의 개인정보와 운행 데이터가 미국으로 넘어갈 수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상황이 격화하자 중국 내에서 그릇된 애국주의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가뜩이나 민간기업이 위축된 데다 소비시장마저 빈사상태에 빠져 있는 마당에 경제에 악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한 것이다. 저우더원(周德文) 저장(浙江)성 원저우(溫州) 중소기업협회장은 "가장 무서운 것은 애국주의라는 이름으로 앞서가는 사람과 기업을 공격하는 것"이라며 "우리는 냉정함을 유지해야 하며, 여론에 의해 강요당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눙푸산취안은 중국 경제와 사회에 큰 공헌을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글/ 김규환 국제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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