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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美 해군 함정 주치의(MRO)가 된다는 것은….


입력 2024.09.24 07:07 수정 2024.09.24 07:07        데스크 (desk@dailian.co.kr)

건국 후 미군 폐함정 들여와

‘1호 전투함’으로 써야 했던 최빈국이

천조국과 미래 협력 도모하는

초일류 조선·방산 대열에 올랐다는 뜻

함정 정비를 위해 2일 한화오션 거제사업장에 입항한 미국 해군 군수지원함인 ‘월리 쉬라’호가 안벽에 접근하고 있다.ⓒ 한화오션 제공

1950년 6월 25일. 북한이 38선을 넘어 전면 남침을 개시한 시각, 동해안에도 한 척의 대형 괴선박이 남하하고 있었다. 부산 근방에 상륙해 후방교란을 노리는 북한 특공대 수송선이었다. 해군본부 지시를 받고 긴급 출동한 백두산함은 밤늦게 영일만에서 이를 발견하고 치열한 교전 끝에 침몰시킨다. 대한민국 해군의 첫 공식해전인 ‘대한해협 해전’이다.


6.25 전쟁 초기 육상 전투에서 힘 한번 못써보고 낙동강까지 밀려 내려간 건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얘기다. 만약 북한 특공대가 계획대로 후방 상륙작전을 폈다면 유엔군이 참전할 때까지 낙동강 방어선이 버텨낼 수 있었을까.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지만 대한해협 해전은 오늘의 한국을 있게 한 수많은 기적과 행운 가운데 하나임이 틀림없다.


사실 승리 주역인 백두산함 자체도 열악했던 남한 상황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증거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해군에는 전투를 수행할만한 함정이 하나도 없었다. 군인들이 박봉을 쪼개 갹출하고 부인들은 삯바느질해서 모은 돈으로 미군이 폐기처분을 하려던 함정을 헐값에 사다 개조한 것이 해군 1호 전투함 백두산함이었다. 그 고물 배로 첫 해전승리를 끌어낸 것이다.


그로부터 70여 년이 흐른 지금, 한국은 조선과 방산에서 손꼽는 강국반열에 올라 있다. 그리고 한국 해양 역사에 기록될 또 하나의 사건이 최근 일어났다. 미국 해군 함정의 MRO(유지, 보수, 정비) 사업 수주다. 이번 계약에 따라 한화오션 옥포조선소에 입항한 미 해군의 첫 정비 대상은 4만t급 군수지원함 ‘월리 쉬라’호다.


함정 MRO는 미국 시장만 20조원, 글로벌 시장 규모로 80조원에 이르는 황금알 사업이다. 하지만 전쟁의 상흔을 가진 세대에겐 경제가치를 따지는 것조차 부질없는 사족일지 모른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에서 미군 수송선을 얻어 타고 목숨 건 피란길에 올라야 했던 나라의 국민으로서 먹먹하게 차오르는 격세지감이 워낙 크기 때문이다.


이번 사업은 파란만장한 역사적 배경과 함께 미래비전 차원에서도 의미가 남다르다. 미 해군 군수지원함 정비는 앞으로 아시아 지역에서 펼쳐질 원대한 구상의 신호탄일 뿐이다. 미 의회는 올해 내 사업 대상을 이지스 구축함까지 확대하는 법안을 준비 중인 것으로 전해진다. ‘신의 방패’라는 최첨단 무기체계도 한국 손에 맡겨질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다.


함정 수명은 보통 30년이다. 그 생애 동안 성능을 유지하려면 지속적인 관리가 필수적이다. 일상적 부대정비와 야전정비는 승조원이 직접 수행하지만 중대한 상황이 생기면 전문가에 맡겨야 한다. 갈수록 첨단화되는 함정 시스템들은 전문지식 없이 함부로 손대기도 어려워졌다. 그게 ‘창정비’에 해당하고, MRO 사업이란 통상 창정비를 뜻한다.


창정비는 환자가 의사에게 전문 검진과 수술을 의뢰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자기 몸과 건강정보를 맡기려면 주치의의 실력도 당연히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상호신뢰가 전제돼야 한다. 미 해군 함정은 그 자체로 거대한 군사기밀 덩어리이니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런 보안 문제 때문에 미국은 함정 정비도 자국 내 해결을 고수해왔다. 하지만 품질, 가격, 납기에서 경쟁력이 한계에 이르면서 아시아 지역으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다만 외국기업이 미 해군 MRO를 수행하려면 높은 수준의 역량을 공인받는 인증협약(MSRA)을 거치도록 요구한다. 한화오션은 올 1월에 MSRA를 신청했는데 보통 1년 이상 걸리는 인증 절차가 7개월 만에 끝났다. 그 후 불과 한 달 만에 수주가 성사됐다. 그만큼 미국의 신뢰도가 높다는 의미다.


한-미 간의 두터운 신뢰는 21세기 신해양시대를 열어갈 중요한 자산이다. 한국전에서 가장 많은 피를 흘렸던 혈맹이자 한국 경제성장과 안보 유지에 도움을 준 동맹국과 협력해나갈 분야는 광활하다. 한화가 금년 6월 미국 필라델피아 소재 필리조선소를 인수하며 미래 협력에 대비해온 것도 그런 이유다.


당시 칼로스 델 토로 미 해군성 장관은 추후 벌어질 상황을 예견하는 의미심장한 공식 성명을 남겼다. “이것은 우리의 새로운 해양 치국에서 판도를 바꾸는 하나의 이정표가 될 것입니다.”

글/ 이동주 한화오션 고문

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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