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네르바와 막장드라마, 실명자들의 도시

김헌식 문화평론가 (codessss@hanmail.net)

입력 2009.01.15 09:31  수정 2013.05.22 16:25

<칼럼>자기중심적 편향에서 벗어나야 본질을 볼 수 있다

98년 노벨문학상 수상 주제 사라마구의 1995년 소설 ‘블라인드니스’(Blindness)는 국내에서 ‘눈 먼 자들의 도시’로 번역되었다. 영화도 개봉했다. 역시 ‘눈 먼 자들의 도시’로 이름을 달았다. 영화는 미국보다 더 많은 수익을 냈으며, 원작 소설을 베스트셀러 1위 자리에 올려놓았다. 10년간 10만 부 나가던 것이 한 달에 수 만 부가 팔려나갔다.

영화의 원제는 ‘블라인드니스’(Blindness)인데 영화 제목을 ‘눈 먼 자들의 도시’로 번역한 것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가 있다. ‘눈 먼 자들의 도시’는 자칫 시각장애인에 대한 비하적이라는 면에서 오해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이다. 장애인 단체나 장애인에 관심이 있는 이들은 ‘눈이 먼’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는다. 당연히 맹인이라는 단어도 쓰지 않기를 권하고 있다.

이러한 운동을 한 것은 수 십 년이다. 절름발이는 지체장애인이고 귀머거리를 청각장애인으로 고치려 했다. 예전보다는 많이 나아진 것이 사실이기도 하다. 그런데 수십년간 해온 장애인 단체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즉, 영화의 흥행과 소설의 높은 판매고의 영향 때문에 ´눈이 먼´이라는 말이 너무 쉽게 통용될 것이라는 장애인 단체의 자괴감이 있을수 밖에 없다.

눈이 먼이 아니라 실명(失明)한 사람들의 도시 정도로 번역하는 것은 어떨지 생각해 볼 수 있다. 문학적 수사를 위해 제목을 달았다고 해도 원제와 다르다면 문제다. 소설 제목의 번역은 터널 시야 현상처럼 우리는 자기중심적으로 세상을 보았기 때문에 결국 다른 면을 보지 못한 것이 되었다.

영화에서 안과 의사(마크 러팔로)의 대사 가운데에 “눈이 안보이게 되어서야 진정한 당신을 보게 되다니…”라는 말이 있다. 여기에서 ‘실명’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맹점(盲點)이다. 눈이 안보이고 나서야 전에는 하찮게 지나쳤던 것들이 오히려 비로소 의미 있게 보인 것이다.

나아가 영화는 견고할 것이라고 믿었던 문명과 도시가 실명 때문에 허무하게 무너지는 것을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얼마나 인간이 이성을 잃고 한 순간에 파괴적, 폭력적으로 변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그런 면에서 시각 장애인들이 온전한 인격체를 유지하고 사는 것은 대단한 일이 되는 셈이다.

미국의 경제 위기는 결국 당장 보이는 것만을 보다가 진정한 가치들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재앙 같은 일을 빚어냈다. 그렇게 보이는 것만 보다가 보지 못한 결과로 정말 눈이 있되 보지 못하게 되었다. 그 실명으로 굳건할 것 같은 거대한 금융시스템은 맥을 못 추었고, 전 세계를 불황의 늪에 빠뜨렸다. 수많은 사람들의 삶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다.

한국 대중문화 전반은 눈이 안 보이는,‘실명자들의 도시’같다. 영화계는 수익에 대한 맹점으로 다른 가치들을 보지 못하다가 막장으로 치달았다. 감각적인 ‘과속스캔들’이나 ‘쌍화점’의 예상치 못한 흥행은 이러한 점을 더욱 부추길 가능성이 크다. 이들이 성공하지 않았다면 더욱 내실 있는 작품들이 활성화되겠지만, 2009년에는 이러한 영화들의 짝퉁에만 영화 투자가 몰리면서 가뜩이나 맹점에 빠진 영화계를 더 어렵게 만들 가능성이 크다.

막장 드라마가 화제에 오르고 있다. 욕하면서 보는 드라마를 뛰어넘는 수준이다. 다른 한쪽에서는 일본에는 일드가 있고, 미국에는 미드가 있다면 한국에는 막드가 있다고 자학적으로 조롱한다. 통속극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극단적인 억지나 너무 단순한 설정, 비윤리적인 선정성은 분명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고 시청률만 올릴 것이다. 그것을 즐겨보는 이들이나 그것을 만드는 이들이나 통속성의 막장에 다른 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형국이다.

드라마 ‘꽃보다 남자’를 즐겨보는 이들은 막장 드라마를 욕하던 젊은 층이다. 꽃미남 스타와 소녀적 로맨스 코드의 종합선물세트다. 그 종합선물세트 이외에는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점 때문에 이 드라마가 막장 드라마에 꼽히기도 했다. 결국 맹점적 몰입은 드라마의 질을 낮추게 된다. 어디에도 팔아먹을 수 없는 콘텐츠가 되는 것이 현실이다. 당장에 보이는 것만 보는 그 맹점으로 계속 될 것 같던 한류의 거대함도 이미 사라지고 없다.

맹점적 몰입은 바로 자기중심적 편향이다. ´막드´나 욕하면서 보는 드라마의 특징은 선과 악을 이분법적으로 보고 자기가 응원하는 항상 좋은 쪽이라는 단순성에 기반 한다. 음모나 복수와 폭력적인 언사들이 정당화된다. 물론 이러한 심리적 편향은 인간의 기본적인 속성이기는 하지만, 사회문화적으로 다층, 다종하게 나타난다.

우선, 하스토프(Hastorf)와 캔트릴(Cantril)의 고전적인 연구에서 자기중심적 사고의 편향을 알 수 있다. 다트마우스와 프린스턴 팀이 거친 경기를 펼쳤다. 이 과정에서 프린스턴 팀의 선수 하나가 코가 부러지는 상처를 입었다. 다트마우스 팀의 한 선수도 다리가 부러져 실려나갔다.

연구자들은 두 학교 학생들에게 어느 팀이 더 거친 경기를 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프린스턴 대학의 학생들은 다트머스 대학의 학생들이 더 거칠었다고 대답했다(86%). 하지만 다트머스 대학의 학생들이 자신의 대학 팀 선수가 먼저 거칠었다고 대답한 것은 36%에 불과했다. 양쪽 다 책임이 있다고 한 학생은 53%였다.

이번에는 다른 학생들에게 이 경기의 필름을 보여주고 그들이 본 반칙을 기록하게 했다. 다트머스 대학 학생들은 평균 4.3개와 4.4개의 반칙을 기록했다. 그러나 프린스턴 대학의 학생들은 다트마우스 팀에게서 9.7개의 반칙을 프린스턴 팀에게서 4.2개의 반칙을 확인했다. 모든 학생들이 본 경기내용은 같았는데 그 해석은 달랐다.

좀 더 확실하게 편향이 드러나는 연구를 보자. 로스(L Ross)와 레퍼(M. R. Lepper)의 연구에 따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후보에 대해서 언론이 적대적이라고 생각한다. 한 조사에서 지난 대선에서 언론의 보도 태도가 편향적이었는지 물었다. 3분의 1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이중 90%는 자신이 지지한 후보에게 적대적이라고 말했다.

한국에서 지금 언론의 미네르바에 대한 보도 태도나 경제위기에 대한 시각도 자기중심적 편향이 강하다. 다른 정책 사안들도 마찬가지인 경우가 많다. 일종의 아전인수가 많은 것이다. 사라마구의 ‘블라인드니스’(Blindness)의 내용처럼 본질적인 가치들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한 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 안과 의사부인처럼 한 사람은 볼 수 있어야 한다.

객관적으로 접근하는 중심적인 주체가 있어야 하는데 보이지 않는다. 스스로 어떤 들보에 씌워서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이 더 다행일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라면 기존의 것을 보지 말아야 새로운 것이 보일 듯싶기 때문이다. 답답하고 불확실한 상황에서 시민과 국민들이 보고 싶은 것은 그런 것인지 모른다. 보지 않음으로써 기존의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거나 진실을 보고서 그것을 놓치지 않는 이들을 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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