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세장벽 넘어 블루오션 빗장 여는 MASGA협약

데스크 (desk@dailian.co.kr)

입력 2025.08.05 07:07  수정 2025.08.05 07:07

한화 필리십야드 혁신 모델로

몰락한 美 조선업 재건희망 보여줘…

100년간 닫혀있던 상선-함정시장도

미국 스스로 한국에 개방 기대

한국 정부는 미국 조선업 재건구상, 일명 ‘MASGA 프로젝트’를 협상카드로 활용했다.ⓒ 데일리안 AI 이미지 삽화.

중국의 과학과 문명 연구에 평생을 바친 영국 과학사학자 조지프 니덤(Joseph Needham)의 머릿속엔 늘 한 가지 질문이 따라다녔다. 이른바 ‘니덤 패러독스’다. “중국은 고대부터 중세까지 세계에서 가장 발달한 과학기술을 갖고 있었는데 왜 근대 과학혁명은 서구에서 먼저 일어났을까?”


니덤의 의문엔 나름의 근거가 있었다. 중국은 12~13세기까지 인류 4대 발명품이라는 종이, 나침반, 화약, 인쇄술을 독식했던 과학 강국이었다. 산업혁명이 영국보다 중국에서 먼저 일어났다 해도 하등 이상할 게 없었다. 그런데 근대화 과정에서 중국은 과학기술 혁신을 주도하지도, 동참하지도 못한 채 어느 순간 덩치 큰 나무늘보가 되어버렸다.


니덤은 오랜 연구 끝에 몇 가지 원인을 추출했다. 중국 특유의 유교적 관료사회, 자본주의 경제구조 미흡, 허황한 중화사상, 변화와 혁신에 대한 저항 등이었다. 다양해 보이는 이 현상들의 기저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외부 문명에 대한 거부감, 즉 사고방식과 사회체제의 폐쇄성이다.


명(明)에서 청(淸)에 이르는 수백 년 동안 민간 해상활동을 금지했던 중국 해금 정책은 무역, 해양기술, 외부 과학 유입을 모두 차단했다. 완고한 관료제는 기득권을 위협하는 논리적 추론과 실험, 수학과 공학, 상업 분야 신지식을 제도권 밖으로 밀어냈다. 요컨대 기존 질서를 지키려 문을 걸어 잠근 시스템이 ‘한때 찬란했던’ 중국 과학기술을 이집트 미라처럼 말려버린 것이다.


미국도 한때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조선 강국이었다.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공습을 계기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며 가장 심혈을 기울인 일은 선박 건조였다. ‘리버티선’으로 불리는 수송함을 4년 만에 2710척이나 만들었으니 ‘마구 때려지었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막강한 해군력을 기반으로 미국은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끌었고 전후 세계 패권을 거머쥐었다.


당시 미국이 생산성 향상을 위해 도입했던 블록건조 기술은 현대식 조선 공법의 기틀이 됐다. 그 혁신적이던 미국의 조선업은 오늘날 존재감이 없다. 지난해 세계 조선 시장 점유율은 0.1%였다. 과거 70여 개에 이르던 미국 조선소의 위용은 사라지고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만 살아남아 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그 해답 역시 니덤 패러독스의 범주 안에 있다. 노동집약적 요소가 많은 조선업 특성상 미국의 고임금 구조 영향도 물론 작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경제적 요인을 따지기 전에 ‘존스법(Jones Act)’으로 상징되는 조선 쇄국주의가 치명적이었다.


1920년 제정된 존스법은 미국 항만을 운항하는 모든 선박이 미국에서 건조되고 미국인이 소유하도록 규정했다. 심지어 승무원들마저 75% 이상 미국인을 고용하도록 했다. 100년이 넘게 강보에 싸여 지낸 해운, 조선업이 멀쩡하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하다. 영원할 것 같았던 미국 해군력이 중국의 물량 공세에 밀리게 된 건 결국 폐쇄성의 업보였다.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파상적으로 몰아쳤던 관세 태풍이 지난주 한고비를 넘겼다, 한국은 8월 1일 데드라인을 앞둔 막바지 협상에서 극적 타결을 이뤄냈다. 그 과정에서 우리 정부가 미국 조선업 재건구상, 일명 ‘MASGA 프로젝트’를 협상카드로 활용한 것은 현명했다.


특히 기업인을 동반한 협상기법이 주효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몰락한 미국 조선업을 되살리겠다고 말로만 장담한들 미국 정부가 믿어줄 리 없다. 지난해 말 한화오션이 인수한 필리조선소의 혁신 사례를 제시하며 설득한 것이 미국 협상팀에게 깊은 인상과 신뢰감을 주었다는 후문이다.


한화오션이 경영을 맡은 지 겨우 반년 만에 환골탈태한 필리십야드의 모습은 미국 정부의 눈에 마술처럼 보였을 것이다. 이곳에선 본사에서 파견된 전문가들이 현장 개선과 생산성 향상을 지휘해왔고 용접로봇과 자동화 설비를 갖춘 스마트시스템 도입도 추진 중이다. 1년에 한두 척 만드는 건조 능력을 10척 이상으로 끌어올린다는 계획도 현장에 가보지 않았다면 비현실적이라 했을 법하다.


지난 3일 서울 용산구 대통령실 청사에서 관세 협상 타결을 위해 우리 정부가 제작한 ‘마스가(MASGA)’ 문구가 쓰인 빨간 모자를 언론에 공개하고 있다.ⓒ 대통령실

MASGA 카드는 일단 관세협상을 타결 짓는 성과를 냈지만 여기서 그치는 게 아니다. 철옹성 같던 미국 조선 시장의 빗장을 열게 된다는 중장기적 효과가 더 중요하다. 초강대국 시장이 한 세기 동안 꽁꽁 닫혀있었다는 건 역설적으로 진입장벽을 통과한 기업에게 ‘블루오션’이 열린다는 의미다.


미국의 조선산업이 쇠퇴했다 해서 수요까지 위축될 리는 만무하다. 오히려 트럼프 행정부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은 함정과 상선 건조가 필요하다. 북극 개발과 관련해 쇄빙선 같은 특수선박 수요도 급증하고 있다. MASGA 프로젝트는 그런 미국의 원대한 전략과 정확히 일치했기 때문에 효과적인 협상카드가 될 수 있었다.


물론 MASGA 구상은 아직 밑그림 단계다. 1500억 달러 한미조선협력펀드의 일차적 목표는 선박건조와 유지보수정비(MRO) 확대, 조선기자재 및 생태계 조성 등이지만 세부 협의가 필요하다. 자율운항선박 같은 미래분야에서 한국 조선 역량과 미국 첨단기술이 협업하는 방안도 추가될 만하다. 조만간 한미 정상회담이 성사되면 더 구체적인 윤곽이 드러날 것이다.


현시점에서 명확한 사실은 MASGA협약이 K-조선의 도약에 또 하나의 변곡점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 신해양시대를 이끌어갈 새로운 모멘텀으로 손색없다. 이번 대미협상 과정에서 정부와 기업이 원팀으로 움직인 협력 모델도 함정 수출을 모색하는 시점에서 좋은 선례가 될 것이다.


중국과학사 전문가 니덤이 오랜 연구를 통해 발굴해낸 지혜는 놀라웠다. 새로워서가 아니라 너무 쉬워서다. 문을 걸어 잠그는 독불장군 방식이 오래가지 못한다는 건 상식이다. 빗장을 열고 협력하는 자가 결국 승리한다. 다만 인간은 그 쉬운 교훈을 자주 잊을 뿐이다.

글/ 이동주 한화오션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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