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와 사도세자의 비극적 서사, 장르물에 익숙한 타임슬립 설정, 그리고 저항과 젊음의 상징인 록 음악. 대중에 낯설지 않은 이 세 가지 요소지만, 도무지 한데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조합이 무대에서 조화롭게 펼쳐진다.
지난달 5일부터 서울 강남구 백암아트홀에서 공연 중인 뮤지컬 ‘쉐도우’의 이야기다. 작품은 조선시대 영조와 사도세자 사이에서 벌어진 비극적인 사건 ‘임오화변’을 소재로 삼는다. 다만 역사를 고증하고 재현하는 방식 대신, 시간 여행이라는 판타지적 장치를 통해 인물의 내면에 집중하며 현대적 감각으로 과감하게 이야기를 ‘재해석’했다. 여기에 록 음악이라는 장르까지 결합하면서 파격적으로 무대를 구현했다.
작품의 서사는 뒤주에 갇힌 사도가 죽음을 앞둔 순간,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과거로 돌아가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가 마주한 것은 왕이 되기 전, 젊은 아버지 영조다. 아들은 아버지를 몰라보고, 아버지는 미래의 아들을 알아보지 못한 채 둘의 관계는 새롭게 시작된다. 역사적 사실을 따라가는 대신, 두 인물의 내면과 관계의 본질에 집중하는 길을 택한 셈이다.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었던 아들의 갈망, 완벽한 왕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에 갇힌 아버지의 고뇌가 시공간을 초월해 부딪힌다.
여기서 록 음악은 두 인물의 감정의 충돌을 증폭시키는 장치가 된다. 강렬한 기타 리프와 드럼 비트는 인물들의 절규와 분노, 혼란스러운 내면을 효과적으로 대변한다. 특히 사도가 자신의 운명과 억압에 저항하며 부르는 넘버들은 록 장르가 가진 에너지를 통해 관객에게 강한 몰입감을 선사한다. 고전적인 음악을 탈피한 과감한 선택은 이 비극을 현대의 관객이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이야기로 확장시킨다.
무대는 매우 단출하다. 구체적인 시대를 재현하는 화려한 궁궐이나 소품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몇 개의 겹으로 이루어진 철제 골조 구조물이 무대를 채운다. 이 구조물은 때로는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궁궐이 되고, 때로는 사도를 옭아매는 뒤주가 되면서 인물들의 심리적 공간으로 기능한다.
복잡한 설정과 휘몰아치는 감정선을 담아내는 작품이 의도적으로 무대를 비워낸 것은 영리한 선택이다. 물리적인 공백은 배우의 연기와 감정, 그리고 음악과 조명이라는 다른 무대 언어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한다. 만약 무대가 사실적인 장치들로 가득했다면, 타임슬립이라는 비현실적 설정과 인물들의 내면 심리에 오롯이 집중하기 어려웠을 터다.
미니멀한 무대를 채우는 것은 조명이다. 조명은 단순한 밝기 조절을 넘어 공간을 창조하고 시간을 가르며 인물의 감정을 색으로 표현한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타임슬립의 순간, 여러 빛깔의 조명이 교차하며 시공간의 뒤틀림을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철제 구조물 사이로 쏟아지는 빛줄기는 인물들을 고립시키거나, 대립 구도를 명확하게 드러낸다.
인물의 내면을 파고드는 연출을 통해 작품은 역사를 소재로 한 판타지이지만,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엇갈리는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보편적인 관계로 이야기를 확장시키면서 결국 과거의 비극을 통해 오늘날 우리 사회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소통의 부재와 관계의 단절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쉐도우’는 11월 2일까지 백암아트홀에서 공연된다.
0
0
기사 공유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