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일까지 충무아트센터 중극장 블랙
“‘프리마 파시’는 배우와 관객이 2시간을 함께 견디며 앞으로 나아가는 작품이에요. 그래서 공연이 끝났을 때 나오는 박수는 무대 위의 배우만이 아니라 관객 자신에게도 보내는 거라고 생각해요.”
배우 김신록은 승승장구하던 형사법 전문 변호사 '테사'가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가 되면서 자신이 굳게 믿어왔던 법 시스템의 모순과 마주하는 과정을 그린 작품 ‘프리마 파시’를 이 한 마디로 정의했다. 그의 말처럼 작품은 단순한 관람을 넘어선 하나의 ‘체험’에 가깝다. 120분간 오직 한 명의 배우가 이끄는 무대 위에서, 승승장구하던 변호사 테사의 견고한 세계가 무너져 내리는 과정을 관객 또한 온몸으로 함께 겪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김신록은 이 힘겨운 여정의 안내자이자 동반자다. 그는 테사라는 인물을 구축하기 위해 거쳤던 치열한 고민의 흔적들을 쏟아냈다. 단순히 대사를 외우는 것을 넘어, 인물의 몸과 공간, 말이 하나가 되는 순간을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또 작품이 가진 동시대성과 사회적 메시지에 대한 깊은 책임감을 느끼며, 무대 위에서 단순한 허구가 아닌 ‘체험’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프리마 파시’는 이자람, 차지연, 김신록이라는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진 세 배우가 한 인물을 연기한다는 점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신유청 연출은 배우 개인의 역사와 방식을 교정하기보다, 각자의 방식대로 인물을 해결할 수 있도록 자율권을 부여했다. 배우들은 서로의 연기를 보고 배우며 영감을 얻는 방식으로 각자의 테사를 완성해 나갔다.
“굳이 ‘나는 이런 배우고, 이런 세계관을 갖고 있다’고 말하지 않아도, 동료 배우가 무대에서 깊이 들어가는 모습을 보면 알게 되는 것들이 있는 것 같아요. 판소리 경험이 많은 이자람 배우, 뮤지컬 경험이 많은 차지연 배우처럼 어쩌면 다른 장르에서 온 배우들이 만나 서로를 설명하지 않아도 알아가는 시간이 참 좋았습니다. 더블, 트리플 캐스팅의 가장 큰 장점은 상대 배우를 보고 배운다는 점이에요. 구체적인 아이디어를 얻기도 하고, 더 크게는 인물이나 객석과 관계를 맺는 방식을 보고 제 연기를 조율할 수 있죠.”
“예를 들면 이자람 배우는 판소리가 본래 이야기 들려주기 방식이다 보니, 화자로서 객석과 직접적으로 관계를 맺으며 ‘내 이야기 들어봐’하고 관객을 확 휘어잡아요. 그래서 1막을 이끌어가는 힘이 굉장히 경쾌합니다. 반면 차지연 배우는 ‘내가 바로 테사’라는 것에 의심이 없어요. 굉장히 사실주의적으로 접근해서 온몸으로 그 상황을 관통하고 체험해버리는 힘이 있죠. 두 분의 연기를 보면서 1막에서는 이자람 배우의 경쾌한 거리감을, 2막에서는 차지연 배우의 의심 없이 믿어버리는 단단한 힘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프리마 파시’의 무대는 거대한 테이블 하나가 전부라고 할 수 있다. 배우는 이 테이블을 직접 밀어 돌리며 시간의 흐름과 심리의 변화를 표현한다. 1막에서 테사가 자신만만하게 세상을 굴리듯 돌리던 무대는, 2막에 이르러서는 밖으로 빠진 계단 때문에 훨씬 무겁고 힘겹게 돌아간다. 이는 단순한 무대 전환을 넘어, 배우의 육체적 힘겨움이 캐릭터의 고통과 일치되며 극의 설득력을 더하는 중요한 장치다.
“연출님께서 제안한 콘셉트는 시간성이었어요. 1막은 선형적으로 흐르지만, 2막은 782일 동안의 기억을 넘나들기에 무대가 반대로 돌죠. 그런데 실제 공연을 하면서는 개념을 넘어서는 감각을 체험하게 됐어요. 1막에서는 테사가 자기 힘으로 세계를 굴려가는 느낌이라면, 2막에서는 배우도 실제로 지치고 힘들기 때문에 이 테이블을 미는 것 자체가 힘겨워져요. ‘이 힘든 일을 헤쳐 나가리’라는 마음으로 밀게 되는데, 마치 테사의 생존기를 그리는 듯한 감각이 들죠. 연극은 이처럼 처음의 설계나 해석을 넘어서는 체험과 감각의 힘이 있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김신록은 ‘프리마 파시’가 허구의 드라마가 아닌, 지금 우리의 현실과 맞닿아 있는 이야기이기에 더욱 연기하기 어려웠다고 토로했다. 특히 ‘나는 강간 피해자’라고 말하는 순간은, 역사극 속 인물 뒤에 숨을 수 있었던 과거의 연기와는 차원이 다른 무게감으로 다가왔다. 이 작품이 1인극으로 설계된 이유 역시, 관객이 줄거리를 따라가는 것을 넘어 한 인물의 고통을 직접 체험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이게 완전히 허구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에, ‘나는 강간 피해자’라고 말하는 게 정말 어려웠어요. 만약 이 작품이 그저 드라마로 보이길 바랐다면 1인극이 아니었을 겁니다. 여러 인물이 등장해서 하나의 이야기, 허구를 보여줬겠죠. 하지만 한 인물이 처음부터 끝까지 끌고 가는 이유는 이것이 이야기가 아니고, 굉장히 체험적이고 현재적이며 사회적인 작품이기 때문인 것 같아요. 그래서 인물 뒤로 숨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 작품이 단순히 ‘증상이 이렇습니다’라고 다시 말하는 데서 그치지 않기를 바랐어요. 우리는 이미 미투 운동 등을 겪으며 증상 치료의 부작용을 체험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이제는 ‘더 근본적인 대안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져야 할 때이고, 이 작품이 거기에 기여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김신록이 해석하는 테사는 단순히 법정에서 패배한 피해자가 아니다. 그는 워킹클래스 출신으로서 세상에 ‘나 여기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던 인물이다. 그 욕망이 사회의 게임 룰 안에서 ‘이기는 것’으로 변질되었지만, 모든 것을 잃고 산산이 부서진 후에야 비로소 자신의 진짜 목소리를 찾게 된다. 그것은 이기거나 지는 것과 상관없이, 망가진 모습 그대로 ‘여기 있다’는 존재 자체를 긍정하는 목소리다.
“테사가 법정에서 증언하기로 결심한 건 ‘내 안의 어린 아이를 잃고 말 거야’라는 생각 때문이었어요. 그 어린 아이가 원했던 건 사실 세상에서 제일 잘나가는 게 아니라, ‘나 여기 있어, 나 좀 봐줘’하고 인정받고 싶었던 마음이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우리 사회는 그걸 증명하기 위해 남들보다 잘해야만 하잖아요. 모든 것이 무너지고 나서야 테사는 그 어린 아이가 처음 꿈꿨던 진짜 목소리를 찾게 된 거죠.”
“마지막에 무죄 선고를 듣고 테사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해요. ‘나는 망가졌어. 하지만 달라진 것은… 아직 여기 있어.’ 이전에는 여기 없을까 봐 맨 앞줄에 서려고 했다면, 이제는 내가 망가졌건 아니건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 자체가 변치 않는다는 것을 굳게 믿게 된 겁니다. 이것이 사탕 발림 같은 희망이 아니라, 철저하게 무너진 땅에 발을 딛고 겨우 일어서려는 그 묵직함이야말로 이 작품이 가진 진짜 가치라고 생각해요.”
0
0
기사 공유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