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 오브 파이’ 디렉터가 말하는 퍼펫의 7가지 원칙 [퍼펫 예술②]

박정선 기자 (composerjs@dailian.co.kr)

입력 2025.10.28 07:31  수정 2025.10.28 07:31

‘라이프 오브 파이’ 협력 퍼펫 디렉터 케이트 로우셀 인터뷰

"퍼펫티어의 상상력, 관객의 상상력을 이끌어내는 첫 번째 불씨"

"세 명의 퍼펫티어...그리고 주인공 '파이'가 네 번째 퍼펫티어 돼야"

하나의 퍼펫이 무대 위에서 살아 숨쉬기까지는, 관객의 눈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전문가의 손길과 치열한 고민의 과정이 응축되어 있다. 퍼펫은 단순한 소품이 아니라, 디자이너의 상상력에서 출발해 제작자의 손에서 ‘육체’를 갖추고, 퍼펫티어의 숨결로 ‘영혼’을 얻는 독립된 캐릭터다. 이 모든 과정은 정교한 ‘협업의 미학’ 그 자체다.


ⓒ에스앤코

모든 것의 시작은 연출가의 구상을 ‘육체’로 구현하는 단계다. 연출가의 창작 의도를 바탕으로 퍼펫 디자이너는 퍼펫의 움직임과 형태, 나아가 그 존재의 철학까지 담은 설계도를 그린다. 제작자는 재료의 물리적 특성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수많은 테스트를 거쳐, 이 설계도를 현실로 구현한다.


‘퍼펫 예술의 절정’으로 불리는 ‘라이프 오브 파이’에서도 이 과정이 고스란히 담겼다. ‘라이프 오브 파이’의 또 다른 주인공은 퍼펫, 즉 뱅골 호랑이 리처드 파커는 ‘워 호스’ 등에서 탁월한 퍼펫 연출을 해온 핀 콜드웰(Finn Caldwell)과 런던 올림픽 개막식 등에 참여하며 세계적인 퍼펫 예술의 장인으로 손꼽히는 닉 반스(Nick Barnes)의 손에서 탄생했다.


협력 퍼펫 디렉터 케이트 로우셀(Kate Rowsell)은 “닉 반스와 핀 콜드웰은 ‘라이프 오브 파이’의 놀라운 퍼펫들을 공동 제작했다. 제가 지금까지 작업해 본 퍼펫 중에서도 정말 완성도가 뛰어나다”면서 “대부분의 구조는 매우 가벼운 소재로 만들어져 있어 퍼펫티어들이 조작하기에 훨씬 쉽다. 특히 근육의 움직임, 유연성, 역동적인 동작을 표현할 수 있다는 점이 이 퍼펫들을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보이게 하는 핵심이다. 리처드 파커는 실제 호랑이의 골격을 기반으로 설계된 만큼, 그 정교함은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라고 말했다.


로우셀 디렉터는 약 3년 전, 이 작품의 리허설에 처음 참여했을 당시 퍼펫 연출가인 핀 콜드웰(펫 디자인/무브먼트 & 퍼펫 디렉터)과 스칼렛 와일더링크(Scarlett Wilderink, 글로벌 협력 무브먼트&퍼펫 디렉터)가 들려준 ‘퍼펫 연기의 일곱 가지 원칙’을 회상하기도 했다. 바로 호흡(Breath), 시선과 집중(Focus), 무게감(Weight), 정지(Stillness), 리듬(Rhythm), 상상력(Imagination), 마임(Mime)이다. 로우셀 디렉터는 이 원칙이 ‘무생물을 살아있는 존재로 관객을 설득시키는 핵심’이라고 말한다.


그는 “일곱 가지 원칙 중에서도 제가 가장 자주, 그리고 가장 절박한 순간마다 되돌아가게 되는 원칙은 ‘호흡’과 ‘상상력’”이라고 말한다. “퍼펫에 생명이 깃들게 하거나, 특히 여러 명이 하나의 퍼펫을 조종할 때 동료 퍼펫티어들과 연결되기 위해서는 호흡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이다. 즉, ‘함께 숨 쉬는 것’은 단순히 기술적인 타이밍을 맞추는 것을 넘어, 퍼펫이라는 하나의 유기체가 생각하고 반응하는 리듬을 만들어내는 과정이다.

‘상상력’ 역시 퍼펫티어에게는 필수적인 내면의 작업이다. 로우셀 디렉터는 “퍼펫의 내면 세계, 즉 지금 이 동물이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를 온전히 상상해야 한다”고 말한다. 퍼펫티어가 먼저 그 동물의 본질을 상상하고 믿지 않으면, 관객에게 ‘의도를 가진 생명체’로서의 설득력 있는 움직임을 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퍼펫티어의 상상력은 관객의 상상력을 이끌어내는 첫 번째 불씨인 셈이다.


ⓒ에스앤코

이 원칙을 무대 위에서 완벽하게 구현하는 것은 험난한 육체적 훈련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로우셀 디렉터는 “퍼펫티어 작업은 고도의 체력을 요구하며 일상에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 낯선 근육들을 써야 한다”고 토로한다. 이는 단순히 무거운 것을 드는 근력이 아니라, 퍼펫의 미세한 움직임과 무게 중심을 제어하는 정교한 ‘조정력’과 ‘지구력’이다. 그는 “이 힘을 몸에 익히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다. 오직 오랜 시간과 끈기 있는 훈련, 그리고 자신의 몸이 강해질 것이라는 믿음과 인내심으로만 얻을 수 있는 영역”이라고 설명한다.


이토록 치열한 훈련 과정은 철저한 ‘협업’을 기반으로 한다. 로우셀 디렉터에 따르면, 리허설 초기에는 전체 출연진이 ‘앙상블 트레이닝’에 집중적인 시간을 투자한다. ‘라이프 오브 파이’는 무대 자체가 하나의 유기적인 생명체처럼 호흡하며 거대한 ‘집단 서사’를 만들어내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배우들 간의 깊은 신뢰와 감각적 연결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를 위해 모두가 함께 워밍업하고, 장면을 분석하며, 무대 위 모든 요소가 참여하는 대규모 장면 전환을 함께 만들어낸다.


특히 이 작품은 퍼펫과 배우의 상호작용이 극의 중심을 이룬다. 로우셀 디렉터는 “파이가 무대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마주하는 파트너는 호랑이”라며 “주인공 파이 역의 배우가 네 번째 퍼펫티어’가 될 수 있도록 훈련한다”고 설명했다. 배우 역시 퍼펫티어의 7가지 원칙을 동일하게 몸에 체화하고, 호랑이를 조종하는 3명의 퍼펫티어와 함께 호흡하며 상호작용해야만 비로소 무대 위에서 처절한 생존의 드라마가 완성된다는 것이다.


대본 리딩에 참여하고 있는 '라이프 오브 파이' 퍼펫티어를 포함한 한국 초연의 배우들 ⓒ에스앤코

이 치열한 협업의 결과, 흥미로운 예술적 성과가 발생한다. ‘라이프 오브 파이’에는 한 마리의 호랑이를 연기하는 세 개의 ‘호랑이 팀’이 있는데, 모든 팀이 동일한 연출과 블로킹(동선)을 따름에도 불구하고 실제 무대 위에서는 전혀 다른 ‘성격’의 리처드 파커가 태어난다. 로우셀 디렉터는 “팀마다 즉흥적인 호흡과 반응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는 퍼펫 예술이 완벽하게 계산된 디지털 기술과 달리, 매 순간 예측 불가능한 ‘생생함’을 지닌 라이브 예술의 본질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 정교한 협업은 무대 위에서 끝나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을 완성하는 마지막 협업의 주체는 바로 ‘관객’이다. 관객은 무대 위의 호랑이가 인형이라 것과, 그것을 퍼펫티어들이 조종한다는 것을 명백히 인지한다. 작품 역시 이를 숨기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은 그들의 정교한 움직임과 배우의 연기, 무대 위 상황에 몰입하며 기꺼이 ‘속아주기’를 선택한다. 바로 이 자발적인 믿음과 능동적인 ‘상상력’이 더해질 때, 비로소 퍼펫은 단순한 인형을 넘어 무대 위에서 살아 숨 쉬는 완벽한 생명체로 완성되는 기적이 일어난다.


결국 퍼펫 예술의 본질은 무대 위에서 가장 투명하게 드러나는 협업의 과정 그 자체다. 디자이너의 창의력과, 제작자의 기술, 퍼펫티어의 땀,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완성시키는 관객의 상상력이 한데 모여 기적을 만들어내는 가장 아날로그적이고도 가장 강력한 종합 예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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