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혼’인가, ‘방치’인가…안전 불감증이 만든 예고된 인재 [위험에 노출된 예술인들②]

박정선 기자 (composerjs@dailian.co.kr)

입력 2025.11.20 11:01  수정 2025.11.20 11:01

고난도 무대 기술 대비 안전 관리관 배치 미의무화

"작은 극단 배우들 90% 이상 안전 보험 없이 무대 올라"

"사고 책임 개인에 전가...구조 바뀌지 않는 한 비극도 계속될 것"

K-컬처의 성공 신화가 연일 전 세계를 뒤덮고 있지만, 그 화려함의 근간인 무대 예술인들의 안전은 여전히 원시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하소연이 나온다. 배우와 스태프들은 불안정한 고용 형태와 제도적 사각지대 속에서, 부상을 ‘투혼’으로 미화하는 딜레마에 갇혀 있으며, 이는 결국 무대 위 안전을 위협하는 ‘구조적 안전 불감증’으로 이어진다.


ⓒ데일리안 AI 삽화 이미지

무대 예술인들의 안전 문제가 반복되는 가장 큰 원인은 이들의 불안정한 고용 형태에서 비롯된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지난 3월 발표한 ‘2024년 예술인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전업 예술인 중 61.7%가 근로계약이 아닌 ‘문화예술용역 계약’을 맺는 프리랜서로 활동하고 있다. 이는 예술인이 근로기준법상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자발적으로 산재보험에 가입해야 하는 ‘특수고용노동자’의 지위에 머물러 있다는 의미다.


정부가 2020년 예술인 산재보험 제도를 도입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실효성은 극히 낮다. 보험료의 50~90%를 지원받을 수 있음에도, 국정감사에서 드러났듯이 예술인 산재보험 가입률은 2021년 3.5%에서 2024년 2%로 떨어졌다. 사실상 대부분의 무대 위 노동자가 최소한의 안전망 없이 일하고 있는 셈이다.


한 소극장 연극 무대에 오르는 배우 A씨는 “대형 뮤지컬처럼 제작사 규모가 크면 단체 상해보험이라도 들어주지만, 작은 극단에서는 보험이라는 단어조차 꺼내기 어렵다”며 “현장에서는 ‘90% 이상이 안전 보험 없이 일하는 것이 현실’이라고 공공연하게 말한다”고 털어놓았다. 공연 기간이 짧고 여러 작품을 오가야 하는 프리랜서 특성상, 개인이 직접 복잡한 보험 가입 절차를 밟는 것에 대한 피로감과 불안정한 수입으로 인한 보험료 부담이 결국 예술인들을 제도권 밖으로 밀어내고 있다는 진단이다.


공연 예술계의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하고자 문화체육관광부는 2018년부터 공연 분야 표준계약서를 보급했다. 이 표준계약서에는 ‘안전·보건상의 의무’와 ‘산업재해 보상보험 가입 의무’ 등 제작 주체의 책임을 명시하는 조항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현장에서는 이 계약서가 무시되거나, 불리한 조항이 관행적으로 삽입되는 일이 다반사다.


뮤지컬 스태프 B씨는 “표준계약서에 ‘안전 교육을 실시한다’는 조항이 있지만, 촉박한 리허설 일정에 밀려 서류상의 절차로만 남는 경우가 많다”며 “특히 소규모 극단은 계약서 자체를 작성하지 않거나, ‘모든 안전사고 발생 시 배우 개인의 책임으로 한다’는 식의 조항을 넣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표준계약서는 존재하나, 제작 주체의 우월적 지위와 예술인의 ‘일을 놓치고 싶지 않은’ 절박함이 맞물려 계약서 속의 안전 조항은 힘을 잃는다는 것이다.


무대 장치는 날로 화려해지고 위험해지는 추세다. 수십 미터 높이의 리프트, 배우의 몸을 공중에 띄우는 와이어 장치, 회전하는 턴테이블 등 기술은 더 복잡해지고 있지만, 이를 전문적으로 관리할 ‘안전보건관리관’의 배치는 의무화되지 않았다. 공연장의 규모(객석 수 500석 이상)에 따라 안전관리조직을 설치하도록 하는 등 현행 공연법상 법규가 시설 중심, 기술 전문성 중심으로 규정되어 있어 무대 장치와 공연 행위 자체의 안전을 전담하는 전문 인력 배치는 여전히 모호한 영역에 남아있는 셈이다.


문화체육부에서 발간한 공연안전사고 사례집(2023)에 따르면 출연자 및 스태프 추락(37%)과 무대장치 낙하 및 전도(18%)와 같은 사고가 전체 사고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 산업안전보건법과 공연법에는 이같은 사고 예방을 위한 관리 규정은 미비한 상황이다.


이와 달리, 독일의 경우 ‘공연장 및 집합시설 운영규정(VStättVO)’과 ‘공연 및 연출 제작시설에 관한 산업안전규칙(DGUV 규칙 115-002)’에 따라 공연장의 안전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있다. 이 규정들은 무대 위 추락·낙하 위험에 대한 위험성 평가와 보호조치(난간, 안전벨트 등)를 의무화하고, 무대장치의 설치·리깅 과정에서 정적 안전검증, 전문기술자 감독, 접근통제를 필수로 요구하며, 해체 단계까지 동일한 기준을 적용한다.


익명을 요구한 한 무대 기술 관계자는 “대형 공연장이라고 해도 (무대 전반을 총괄하는) 무대 기술 감독이 기술적 완성도뿐 아니라 안전 관리까지 책임져야 한다. 안전만을 전담하는 인력은 사실상 부재하다”며 “해외에서는 고난도 기술을 요하는 무대에서 안전 전문가가 필수적으로 투입되지만, 우리는 ‘일단 (무대를) 돌아가게 하는 것’이 우선순위”라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촉박한 일정에 밀려 안전 리허설은 생략되고, 부상은 쉬쉬하며 넘어가려는 업계의 낡은 문화는 결국 ‘인명을 경시하는 구조적 안전 불감증’으로 귀결된다”며 “무대 위 위험은 ‘예고된 인재’인 셈”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중대재해 학자 전문가 네트워크(중대재해전문가넷)는 “이 같은 구조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상시 인력과 장비, 안전관리 체계를 갖추고 공연을 직접 기획·제작하는 ‘제작극장’ 체제의 도입이 필요하다. 제작극장은 외주·하청 중심의 단발성 시스템이 아닌, 예술가와 기술 인력을 고정적으로 고용해 안정적 환경에서 공연을 제작·운영하는 형태로, 공연예술의 품질과 안전을 함께 보장하는 핵심 기반”이라고 말했다.


특히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사고의 책임이 언제나 개인에게 전가된다는 점”이라며 “공연장 내 사고가 발생하면 안전 관리 부실이나 구조적 문제보다 예술인의 부주의로 몰리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이런 구조가 지속되는 한 같은 비극은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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