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섭 없는 지원”이 공허한 정책에 그치지 않으려면 [기자수첩-문화]

박정선 기자 (composerjs@dailian.co.kr)

입력 2025.11.24 07:00  수정 2025.11.24 07:28

문화 정책의 가장 중요한 대원칙인 ‘팔길이 원칙’은 역대 많은 정부가 표방해 온 가치다. 하지만 예술 현장에서 이 원칙은 늘 위태로웠다. 지원금이라는 ‘돈줄’을 쥔 권력은 언제나 예술의 내용에 개입하고 싶은 유혹에 시달렸고, 과거 블랙리스트 사태는 그 유혹이 현실이 되었을 때 문화가 어떻게 질식하는지를 뼈아프게 보여줬다.


ⓒ뉴시스

이 가운데 이재명 정부 아래에서 출범한 대통령 직속 대중문화교류위원회와 문체부 장관 직속 문화예술정책자문위원회의 행보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재명 정부가 강조하는 문화 정책의 핵심은 단순히 예산을 늘리는 양적 팽창이 아니라, 지원의 방식 자체를 바꾸는 ‘질적 전환’에 있기 때문이다.


이 대통령은 당선 이후 여러 차례 ‘팔길이 원칙’을 강조해왔다. 지난 10월 대중문화교류위원회 출범식 당시에도 ”‘지원은 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팔길이 원칙을 철저히 지켜서 현장에서 자율성과 창의성이 제대로 발휘될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고 강조했다.


주목할 점은 이를 실현하는 방식이다. 정부는 위원회의 민간 위원장으로 박진영 JYP 수장을 위촉하는 등 민간의 전문성을 전면에 내세웠다. 이는 정책의 결정 권한을 관료의 책상에서 창작의 현장으로 이양하겠다는 의지다. 문체부 직속 문화예술정책자문위원회 역시 위원장에 은희경 작가를 필두로 각 분야 전문가 90명이 위원으로 위촉됐다.


기존의 정부 위원회가 구색 맞추기식 자문 기구에 그쳤다면, 이번에 출범한 두 위원회는 각각 ‘K-콘텐츠 산업의 글로벌 확장’과 ‘기초 예술인의 생존 및 창작 안전망’이라는 두 축을 담당하는 실질적 컨트롤타워 역할을 부여받았다. 정부가 일방적으로 가이드라인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현장의 플레이어들이 판을 짜면 정부는 그 판이 흔들리지 않게 재정적·제도적으로 받쳐주는 ‘서포터’의 위치로 물러난 것이다.


‘문화예술인 기본소득’이나 ‘국민 문화 향유권 확대’ 같은 공약들이 단순한 복지 정책을 넘어 ‘문화적 민주주의’의 실현으로 보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예술인의 생계를 보장하는 것은 그들이 자본과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고 마음껏 상상력을 펼칠 수 있게 하는 ‘자유의 토대’를 닦는 일이기 때문이다.


물론 시스템을 만드는 것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지는 않는다. 중요한 것은 이 원칙이 정권의 부침과 상관없이 흔들리지 않는 관행으로 굳어지는 것이다. ‘간섭 없는 지원’이 공허한 수사가 되지 않으려면, 위원회의 독립성이 철저히 보장되어야 한다. 자율성은 문화 생태계가 유지되기 위한 필수적인 토대인 만큼, 정부의 이러한 시도가 단순한 구호에 그치지 않고 실질적인 시스템으로 작동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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