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제목이 상당히 이상하다는 걸 느낄 것이다. 조선의 왕위 계승은 장자 상속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물론 제대로 지켜진 적은 별로 없다. 당장 세종대왕만 해도 태종의 셋째 아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종대왕 역시 큰아들인 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었고, 문종의 아들 단종을 쫓아내고 왕위를 차지한 세조 역시 큰아들 의경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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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의경세자는 일찍 세상을 떠났고, 뒤를 이은 둘째 아들 해양대군 역시 오래 살지 못했다. 예종이라는 묘호를 받은 그가 왕위에 앉았던 시간은 불과 1년 3개월에 불과했다. 조카를 쫓아내고 죽인 천벌이었는지 세조의 자식들이 오래 살지 못한 것이다. 예종이 승하하고 조정 대신들과 왕실은 다음 왕을 누구로 삼아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예종의 아들은 아직 어렸기 때문에 그나마 장성한 의경세자의 아들들에게 왕위가 돌아가는 상황이었다. 서기 1469년 11월 28일자 실록을 보면 어떻게 다음 왕이 결정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여기서 언급되는 대비는 세조의 부인인 정희왕후로 남편과 아들들이 모두 죽어서 사실상 왕실의 가장 윗사람이었다. 이때는 자성대왕대비로 불렸기 때문에 실록에는 대비라고 언급된다. 차기 왕으로 누구를 삼는 게 좋겠느냐는 자성대비의 물음에 신숙주 등은 자신들은 모르겠다고 대답한다. 당연한 얘기로, 여기서 잘못 입을 놀렸다가는 당사자뿐만 아니라 일가친척들이 역적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신숙주는 사육신의 죽음과 예종이 즉위하자마자 벌인 남이 장군의 옥사를 직접 경험했기 때문에 더더욱 조심했을 것이다. 그러자 대비는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은 아직 어리기 때문에 제외하고 의경세자의 큰아들 월산군도 병이 있다는 이유로 제외하고 동생인 자산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는 뜻을 밝힌다. 이때 제안대군의 나이가 4살이기 때문에 제외하는 건 이해가 가지만 형인 월산군 대신 동생인 자산군에게 왕위가 간 것은 여러모로 복잡한 뒷 사정이 있다. 일단 자산군의 장인이 당대 최고의 권신인 한명회였으며, 임금이 한 살이라도 어려야 수렴청정을 더 오래 할 수 있다는 점도 감안된 것으로 보인다. 비슷한 사례가 먼 훗날 벌어지는데 흥선대원군이 큰아들이 아닌 둘째 아들인 고종을 왕위에 올린 것도 비슷한 이유로 추정된다.
이렇게 해서 형 대신 동생이 왕위에 오르는데 그가 바로 성종이다. 우리는 조선의 황금기를 세종대왕 때로 보지만 실제로 나라가 평안하고 백성들이 잘살던 시기는 성종 때였다. 성종이라는 묘호 자체가 국가의 전성기를 열고 체제를 안정시킨 임금에게 주어진다. 하지만 월산대군에게는 전혀 편안한 시대는 아니었다. 조선시대 왕실의 일원인 종친들은 목숨이 매우 위험한 존재였다. 특히, 남자들은 임금의 자리를 위협할 수 있는 존재들이라서 항상 경계의 대상이었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세조 역시 수양대군 시절 자신의 조카인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한 경험이 있었다. 세조가 의경세자 사후, 열 살이 넘은 그의 아들이 아닌 동생인 해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준 이유가 자신처럼 대군들 중 누군가가 왕위를 노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는 얘기가 전해진다. 자성대비도 이런 점을 염려했는지 무리수를 두었다. 예종의 아들인 제안대군을 세종대왕의 일곱 번째 아들인 평원대군의 양자로 입적시킨다. 그리고 성종의 형 월산대군을 덕종으로 추증된 의경 세자의 제사를 모시도록 한다. 왕이 될 뻔한 손자를 양자로 보내버리고, 월산대군에게는 제사를 모시는 일을 시켜서 교통정리를 한 것이다.
자성대비의 교통정리가 훌륭했는지 아니면 월산대군이 왕위에 욕심이 없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후로는 평온함이 이어졌다. 성종은 수렴청정을 끝내고 자신의 통치를 이어갔고, 월산대군에게는 지금의 정동에 있는 명례궁이라는 저택을 하사했다. 월산대군은 명례궁과 망원정을 오가며 한가하고 평화로운 나날을 보냈다. 실제 마음은 어땠는지 모르지만 눈앞에서 놓친 왕위를 아쉬워하는 티를 전혀 내지 않았고, 의심을 받을 만한 행동이나 만남도 자제했다. 하지만 그런 삶이 불편했던 것일까? 월산대군은 동생인 성종의 치세가 19년째 이어지던 서기 1488년 겨울에 세상을 떠난다. 불과 35살의 나이였는데 먹고 사는데 아무 문제가 없고, 스트레스도 받지 않을 위치였지만 오래 살지는 못했다. 형이 죽자 성종은 성대하게 장례를 치러주면서 효문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덕이 있고, 간사하지 않았으며, 시행하는 것이 이치에 맞았다는 뜻이다. 명례궁은 여러 번 주인이 바뀌다가 지금은 덕수궁이라는 이름으로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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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섭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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