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무부·국시원 통계를 보면 최근 2년간 변호사시험 합격자는 매년 1740명대(2024년 1745명·2025년 1744명), 의사 국가시험 합격자는 2025년 기준 269명이다. 의정 갈등으로 인해 응시자 자체가 대폭 감소했지만 2024년만 봐도 3045명 수준이다. 20·30대 인구 1200만명이 넘는 현실에서 법조인과 의사가 될 수 있는 청년은 극소수지만 드라마 속 2030의 상당수는 여전히 이 직업을 가진 인물로 그려진다.
ⓒtvN
법조인과 의사 캐릭터가 유독 사랑받는 건 이들이 다루는 이야기가 에피소드로 쪼개기 쉽고, 시즌제로 이어가기 편하며 사회적 이슈를 다루기 좋은 포맷이기 때문이다. 이 직업들이 지금 드라마 산업의 안전한 카드라는 뜻이기도 하다.
법정‧의학 드라마의 가장 큰 장점은 자연스럽게 나오는 사건 단위 에피소드 구조다. JTBC '에스콰이어: 변호사를 꿈꾸는 변호사들'과 tvN '서초동'은 주인공 변호사들이 의뢰인의 사건을 맡아 해결하는 과정을 회차별로 풀어낸다. 각 회차마다 형사·민사·가사 사건이 달라지고 의뢰인들의 사연도 다양하다.
의학물도 구조는 비슷하다. 넷플릭스 '중증외상센터'는 외과 전문의 백강혁(주지훈 분)이 유명무실한 대학병원 외상팀을 맡으면서 교통사고·추락사고·화재 등 매 회 새로운 환자를 받는 이야기로 구성된다. 각 에피소드마다 다른 외상 케이스가 등장하고 수술과 팀워크, 병원 내부 갈등이 함께 전개된다. tvN '언젠가는 슬기로운 전공의생활'은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스핀오프로, 산부인과 레지던트들이 맡는 분만·수술·응급환자 에피소드가 한 회씩 나온다.
이런 포맷의 장점은 분명하다. 시청자가 중간 회차부터 드라마를 시작해도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가기 쉽고 한두 회만 골라봐도 몰입하기 좋다. 출퇴근길·주말에 쇼츠나 하이라이트 영상으로 가볍게 소비되는 지금의 시청 패턴과 잘 맞는 구조다.
에피소드 구조는 자연스럽게 시즌제·IP 확장으로 이어진다. 의료·법정 장르는 직장을 그대로 유지한 채 새 의뢰인과 사건, 새로운 상사와 후배를 합류시키는 것만으로도 다른 시즌을 만들기 좋다. 2024년 방영된 SBS '굿파트너'가 대표적이다. 17년 차 베테랑 이혼 전문 변호사 차은경(장나라 분)과 신입 변호사 한유리(남지현 분)가 각종 이혼 사건을 맡는 이야기로, 최고 시청률 17.7%를 기록하며 흥행하자 제작진은 곧바로 시즌2 제작을 확정했다. 이 과정에서 남지현·김준한 등이 하차하고 김혜윤·박해진이 새로 합류하는 등 주연 라인업이 크게 바뀌었지만 로펌이라는 기본 무대는 그대로 유지된다. 이혼 소송이라는 소재 역시 재산 분할·육아·불륜·황혼 이혼 등 에피소드화할 수 있는 경우의 수가 무궁무진해 법정·의학 장르가 시즌제로 반복되기 좋은 이유를 잘 보여준다.
법정·의학 드라마가 가진 또 하나의 장점은 사회적 이슈를 넣고 빼기 쉽다는 점이다. ‘에스콰이어’는 기업 범죄, 부동산 사기, 가정폭력 사건 등을 한 회씩 다루며 최근 한국 사회에서 논란이 된 사건 유형들을 변호사의 시선으로 재구성한다. 6화를 예로 들면 교제폭력이 주요 소재로 등장한다. 의뢰인 설은영(천희주 분)은 전 남자친구 정한석(최정우 분)에게 강압적 성관계와 폭행을 당해 전신에 흉터가 남고 생업이던 모델 일을 잃는다. 이별 후에도 상대가 자신을 조종하려는 듯한 행동을 계속하자 상해죄 고소를 의뢰하지만 사건은 결국 치료비와 법률비용을 받는 선에서 마무리된다. 교제폭력의 심각성을 희석시켰다는 지적도 있었으나 현실적인 피해자의 모습을 다룬 회차로 평가받는다.
ⓒSBS
문제는, 이렇게 다뤄지는 사회적 이슈들이 대부분 의뢰인 또는 환자가 안고 온 문제에 머문다는 점이다. 한 회 동안 전력을 다해 싸우고 때론 눈물도 흘리지만 에피소드가 끝나면 주인공은 화목하고 안전한 자기 자리로 돌아가 다음 사건을 맞는다. 노동자·임차인·피해자·이주민·장애인의 삶이 한 번씩 조명되지만 어디까지나 타인의 문제다.
결국 법정·의학 장르 쏠림에는 산업 구조의 문제가 겹쳐 있다. 이성민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미디어영상학과 교수는 현재 드라마 시장을 두고 "한 작품씩 찍을 때마다 실패 비용이 커지면서 투자와 캐스팅 단계에서 가장 안전한 장르와 설정만 반복해서 고르는 악순환이 일어나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요즘 인기 있는 장르물은 대체로 의뢰인이나 사건이 매회 바뀌는 에피소드 구조를 갖고 있다. 한 회마다 작은 완결이 있어서 시청자 입장에선 부담이 적고, 제작사 입장에선 시즌제로 이어가기 쉬운 포맷"이라며 "반대로 오롯이 인물 감정선만 따라가는 정통 멜로 같은 장르는 앞 회를 모두 봐야 이해가 되는데다 해외 판매나 시즌제 확장에도 불리해 점점 밀려나고 있다"고 설명했다.
드라마 투자 결정권자들이 선호하는 배우·직업도 비슷한 방향으로 고정된다. 이 교수는 "예산이 커질수록 이미 흥행 이력이 있는 얼굴과 장르에 돈이 몰린다. 새로운 배우와 낯선 직업군을 전면에 내세운 작품은 기획 단계에서부터 탈락할 가능성이 크다"며 "결국 의사·변호사 같은 직업이 가장 덜 위험한 선택지로 굳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청년 백수 158만명, 매년 수십만 명의 취준생이 쏟아지는 현실에서 의사·변호사가 될 수 있는 2030은 극히 일부다. 그럼에도 드라마 속 2030의 상당수가 이 직업을 가진 사람들로 그려질 때, 나머지 다수의 청년들은 자연스럽게 지워진다. 법정·의학 드라마가 가진 장점과 재미를 인정하더라도 현실의 2030이 겪는 불안과 노동, 실패의 이야기 역시 어디쯤 화면 안으로 들어와야 하지 않느냐는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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