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로그로 빚어낸 판타지의 정점…연극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D:헬로스테이지]

박정선 기자 (composerjs@dailian.co.kr)

입력 2026.02.18 14:01  수정 2026.02.18 14:01

3월 22일까지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명작 애니메이션을 무대로 옮기는 일은 득보다 실이 많은 위험한 도박이다. 원작이 가진 환상적인 이미지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2차원의 평면을 3차원의 입체로 설득력 있게 일으켜 세워야 하기 때문이다.


ⓒTOHOTheatricalDept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무대에 오른 연극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이 난제 앞에서 최첨단 기술로 원작을 모사하려는 강박을 과감히 버린 수작으로 평가된다. 원작은 소녀 치히로가 우연히 신들의 세계에 발을 들이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로, 대담한 상상력과 그것을 구현한 영상미 등으로 널리 사랑받았다. 2002년 열린 제52회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황금곰상, 이듬해 제75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장편 애니메이션상을 받았다.


연극은 이를 무대화한 것으로, 투박한 나무 질감과 사람의 손, 거친 호흡이라는 가장 ‘연극적인 재료’로 정면 승부를 걸었다.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의 미학으로 판타지의 정점을 빚어낸 이 무대는, 스크린 속 그림이 결코 줄 수 없는 묵직한 ‘진짜’의 감각으로 관객을 설득한다.


존 케어드의 연출은 영상 편집 기술을 무대 위 ‘회전’과 ‘이동’으로 바꿨다. 무대 중앙을 차지한 회전 장치와 수직 구조물은 쉴 새 없이 돌아가며 유바바의 온천장, 보일러실, 기차 내부 등 서로 다른 시공간을 연결한다. 관객은 세트가 해체되고 다시 조립되는 과정을 눈앞에서 목격하는데, 이 투박한 노출이 오히려 온천장이 살아서 움직이는 거대한 생명체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작품의 시각적 언어를 완성하는 것은 퍼펫(인형)이다. 퍼펫 디자이너 토비 올리에는 캐릭터의 크기와 특성에 맞춰 다양한 형태의 인형을 도입했다. 팔이 여섯 개 달린 가마 할아범이나 거대한 머리만 둥둥 떠다니는 유바바, 작은 숯검댕이들까지 모두 배우의 신체와 결합하거나 독립적인 오브제로 존재한다. 핵심은 인형을 조작하는 연기자(퍼펫티어)를 숨기지 않는다는 점이다. 특히 가오나시가 배우의 신체를 활용한 절제된 움직임만으로 공허함과 탐욕을 표현해내는데, 이는 컴퓨터 그래픽으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생생한 질감을 준다.


ⓒTOHOTheatricalDept

청각적 경험 또한 이 물리적 공간감을 뒷받침한다. 히사이시 조의 원작 스코어는 11인조 라이브 오케스트라 연주로 극장을 채운다. 현장에서 직접 연주되는 음악은 극의 긴장감을 조율하는 제2의 연출가 역할을 수행한다. 원작 애니메이션에는 없는 새로운 곡 2곡도 공연 중간에 삽입돼 선보인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원작과 얼마나 똑같이 만들었나”를 보여주는 작품이 아니다. 그보다는 “연극이라는 장르가 어디까지 표현할 수 있는가”를 증명하는 작품이다. 화려한 특수효과가 없어도 나무와 천, 그리고 사람의 에너지만 있으면 관객을 압도하는 환상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3시간 동안 관객이 마주하는 것은 매끈한 스크린 속 환상이 아니라, 배우와 스태프들의 땀이 만들어낸 무대 예술의 정수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올려진 이번 공연에서 치히로 역에는 2022년 일본 초연부터 참여했던 가미시라이시 모네와 아이돌 그룹 에이케이비 출신 가와에이 리나가 더블캐스팅됐다. 유바바는 나쓰키 마리, 하노 아키, 다카하시 히토미가 번갈아 연기한다. 특히 나쓰키는 원작 애니메이션에서 유바바 목소리를 연기했던 배우다. 무대 주변에 설치된 화면을 통해 한글 자막이 나오는데, 화면과 무대가 한눈에 들어오지 않아 아쉬움이 남는다. 공연은 오는 3월 22일까지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0

0

기사 공유

댓글 쓰기

박정선 기자 (composerjs@dailian.co.kr)
기사 모아 보기 >
관련기사

댓글

0 / 150
  • 최신순
  • 찬성순
  • 반대순
0 개의 댓글 전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