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반느' 고아성, 20대부터 아껴온 9년의 기다림..."나의 첫 멜로는 '쓸쓸함'이었다" [D:인터뷰]

전지원 기자 (jiwonline@dailian.co.kr)

입력 2026.02.27 14:01  수정 2026.02.27 14:01

"언젠가 다시 만나겠지요"…미정에게 건네는 고아성의 마지막 인사

'파반느'는 배우 고아성에게 단순한 차기작 그 이상이었다. 2017년 이종필 감독의 초고를 받은 후부터 촬영이 진행된 2024년, 작품이 나온 올해까지 그녀의 마음 한구석엔 늘 미정이 살고 있었다. 25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고아성은 미정으로 살았던 9년과 배우로서의 철학을 가감 없이 쏟아냈다.


ⓒ넷플릭스

고아성은 원작 소설로 '파반느'를 처음 접했다고 한다. "저도 책이 출간됐을 때 뒷장에 CD까지 들어있던 원작을 읽었었어요. 2017년에 이종필 감독님의 각색 시나리오를 처음 본 뒤로 매해 수정고를 받아보며 변화를 지켜봤죠. 저는 이종필 감독님을 전적으로 믿는 편이에요. 특히 감독님이 그리는 여성상을 굉장히 신뢰합니다. 감독님이 '이 대사는 이제 하면 안 될 것 같아'라거나 '설정을 이렇게 바꿔보자'고 하시는 모든 변화에 기꺼이 동의하며 시작했어요"


베테랑 배우에게 '무한 신뢰'를 주는 감독의 힘은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궁금했다. "감독님은 인물의 전사를 구태여 설명하지 않아도 첫 등장만으로 그 인물을 이해하게 만드는 힘이 있어요. 감독님의 전작 '탈주'에서 이제훈 배우님의 첫 장면을 보자마자 '탈주하려는 사람이구나'라고 생각이 들었던 것처럼요. 미정 역시 첫 등장에서 많은 설명이 없지만 감독님의 인물 서술 방식을 믿었기에 확신을 갖고 임할 수 있었죠. 또 배우 출신이셔서 카메라 앞에서 나약해지는 배우의 마음을 누구보다 먼저 캐치하고 헤아려주세요. 그게 모든 배우가 감독님을 좋아하는 이유일 거예요"


그래서인지 이번 작품에 고아성이 아이디어를 낸 부분이 많진 않지만 미정의 집 구조에는 의견을 제시했다고 한다. "제가 생각했을 때 미정이는 스스로 거울을 설치해 놓지 않을 거 같았어요. 그래서 옷장 문 안쪽에 붙은 거울을 기억하고, 밥상을 끌고 와서 그 앞에 앉아 화장을 할 것 같다고 얘기한 적이 있어요. 그걸 그대로 세트로 구현해 주셔서 너무 감사했죠. 또 글씨를 쓰는 장면에서도 미정은 말보다 글이 익숙한 사람이라 생각해서 글자 하나하나를 꾹꾹 눌러 쓰려고 노력했어요"


이 감독과는 2019년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으로 첫번째이자 두번째 만남으로 먼저 작품을 공개했다. "이번 촬영장에서도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때 함께했던 스태프분들이 많았어요. 그때 맡은 자영이는 밝은 캐릭터라 에너지를 얻기 위해 스태프들에게 먼저 말을 걸었는데 이번 미정 역할을 할 때는 현장에서부터 빌드업이 필요했어요. 갑자기 '액션'했을 때만 미정인 척하는 게 이상할 것 같았거든요. 그래서 감독님께 미리 양해를 구하고 조금 물러나 있었죠. 혹시라도 오해하실까 봐 조심스러웠지만, 미정의 닫힌 마음을 표현하기 위한 선택이었어요"


그러나 미정의 마음은 원작 소설에서 그가 '추녀'로 묘사된 것처럼 외모 때문은 아니라고 해석했다고 밝혔다. "감독님과 그 부분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나눴어요. 영상화하면서 원작의 형태를 그대로 따라가기보다 어둠 속에 마음을 닫고 살던 인물이 한 줄기 빛을 만나 서서히 열려가는 과정 자체를 보여주는 게 더 중요하다고 하셨죠. 저 역시 미정의 마음이 단순 외모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사랑에 자신 없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가장 행복해야 할 순간에 떠나고 싶어지는 그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죠"


고아성은 미정의 직업적 배경도 디테일하게 분석했다고 한다. "백화점이라는 화려한 공간의 주 무대가 '지하 주차장'이라는 점에 주목했어요. 화려한 물건들이 들어오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 그곳을 청춘의 한 시절로 보여주고 싶다는 감독님의 설명이 인상적이었죠. 백화점 직원분들의 모습도 관찰하고 연구하면서 화려함의 인형 같은 공간이 아니라 진짜 사람 냄새 나는 공간으로 표현하려고 노력했어요"


오랜 시간 상대 역이 결정되지 않은 채로 기다려온 작품이 문상민을 만났을 때 고아성은 감격했다고 한다. "미정의 대사를 연습할 때 혼자서 또는 감독님이랑만 맞춰보다가 상민 군이 캐스팅되고 처음 리딩을 하는데, 정말 경록인 채로 나타났더라고요. '내가 너를 기다려 왔구나' 싶어 혼자 감격했어요. 상민 군은 키가 아주 큰데 저는 좀 작아서 그 불균형에서 오는 독특한 케미가 있었고, 내면에 쓸쓸하고도 뜨거운 에너지를 가진 준비된 배우였어요. 특히 고마웠던 건 제가 연기할 때 시선을 잡아주기 위해 카메라 밖에서도 단 한 순간도 자리를 비우지 않고 서 있어줬다는 거예요. 덕분에 외롭지 않게 연기했죠"


변요한 배우와의 인연도 특별하다. "요한 배우님은 언젠가 꼭 만날 것 같은 느낌이 있었어요. 이거 제가 얘기했었나요? 사실 저는 이번 작품으로 처음 만났다고 생각했는데 요한 배우가 기억 안나냐면서 말해줬는데요. 2009년에 제가 고등학생 때 한국예술종합학교 졸업작품을 찍으러 교복 입고 갔었는데, 그때 이미 '괴물'이 개봉해 인지도가 있어서 학생들이 저를 보고 장난스럽게 '선배님'이라고 불렀는데 그 무리에 요한 배우님과 박정민 배우님이 계셨대요(웃음). 요한 배우만이 가진 유머러스하고 진중한 에너지가 우리 영화의 세 축을 완성해 줬어요. 경록, 요한, 미정이 모였을 때의 그 이질적이면서도 상호 보완적인 분위기가 너무 좋았어요"


ⓒ넷플릭스

영화 속 음악의 의미에 대해서도 감독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고 한다. "제가 감독님께 '이 영화는 락 영화인가요, 클래식 영화인가요?'라고 여쭤본 적이 있어요. 감독님은 '멜로 영화이자 음악 영화'라고 답해주셨죠. 경록은 락, 미정은 라디오를 통해 듣는 클래식에 가깝지만, 결국 그 비중보다 중요한 건 음악을 통해 마음을 여는 과정이었어요"


노래방 장면도 화제다. 그런데 반주 없이 나오는 목소리를 듣고 고아성은 당황했다고 한다. "사실 저는 조금 만져주실 줄 알았어요(웃음). 극장에서 보는데 너무 '생목'으로 제 목소리만 나와서 순간 몰입이 깨질 정도로 부끄러웠거든요. 화면 속 경록이는 울고 있는데, 화면 밖 저는 당황해서 울고 싶었죠. 하지만 그게 미정다운 솔직함이었던 것 같아요"


'파반느'는 고아성의 첫 멜로 작품이다. 그는 영화를 통해 사랑의 이면인 '쓸쓸함'을 연기할 수 있어 행복했다고 고백했다. "저는 사랑이란 개념이 혼자 있을 때도 든든하고 씩씩한 모습이라고 생각하는데, 미정이 경록을 만나고 나서도 혼자 씩씩하게 일하고 전화기로 달려가는 그런 장면들이 너무 소중했죠. 그리고 지하철역에서 경록에게 '왜 이렇게 잘해주냐'고 묻는 대사가 미정의 인생을 대변하는 것 같아 현장에서 눈물이 많이 나기도 했어요"


긴 기다림 끝에 마침표를 찍은 고아성은 묘한 무력감을 느끼기도 했다고 털어놨다. "파이널 믹싱이 끝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기분이 너무 이상했어요. 진짜 내 20대부터 준비했던 게 이렇게 끝나는 건가 싶었죠. 멜로 영화가 처음이라 그런지 모르겠지만, 정말 지난 한 시절을 보낸 듯한 느낌이에요. 영화는 끝났는데 저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기분이 들어 한동안 무력감이 찾아오기도 했죠."


한국 영화의 마지막 필름 세대에 나온 '괴물'로 데뷔한 그는 OTT 시대까지 관통해 왔다. "동시에 전세계의 반응을 볼 수 있는게 신기해요. 태국의 한 관객분이 제 메일에 리뷰를 보내주시기도 했는데요. '파반느'가 내 안에 평생 있었던 미정을 찾게 해줬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홀로 준비해 온 미정이 전 세계 누군가에게 닿을 수 있는 OTT의 힘을 체감한 순간이었죠. 요즘은 '방토(방울토마토) 데이트' 같은 귀여운 리뷰들을 찾아보며 행복하게 지내고 있어요"


고아성은 '바냐 삼촌'으로 연극이라는 새로운 도전을 앞두고 있다. "늘 카메라에 담기기 위한 연기를 해왔는데 문득 그 이외의 효용을 못 느끼고 살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관객 눈앞에서 공기를 표현한다는 게 저에게는 너무나 새로운 패러다임이라 설레면서 준비하고 있습니다. LG아트센터 제작진의 팬이기도 했고 대본이 너무 좋아서 기꺼이 참여하게 됐어요"


인터뷰를 마친 후 고아성은 자신의 아이패드 잠금화면인 올라프 작가가 그린 소녀의 뒷모습을 보여줬다. "이 사진이 감독님이 보여주신 초기 미정의 모습이이에요. 2017년부터 이 화면이었는데 이제 이것도 바꿔야겠네요. 이상한 기분이에요. 하지만 그녀는 어느 세계에서든 씩씩하게 수영하며 잘 살고 있을 거라 믿어요. 저에게 이 영화는 한 줄기 빛이었고 보시는 분들에게도 잠시나마 그런 빛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언젠가 다시 만나겠지요. 그때까지 잘 지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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