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사미와 효심의 난 – 대장군을 자살하게 만든 반란 [정명섭의 실패한 쿠테타㉛]

데스크 (desk@dailian.co.kr)

입력 2026.03.10 14:01  수정 2026.03.10 14:01

망이와 망소이, 그리고 손청의 난이 오늘날의 충청도 지역을 휩쓸었다면 김사미와 효심의 반란은 경상도 지역에서 기세를 떨쳤다. 반란의 성격과 진행 과정도 여러모로 비슷하다. 주모자인 김사미는 사미라는 이름이 동자승을 뜻하고, 반란을 일으킨 운문 지역에 유명한 운문사가 있어서 학계에서는 승려 혹은 사미승 출신의 인물로 보고 있다. 일부에서는 김씨라는 성을 토대로 신라의 왕실인 경주 김씨와 연결해서 보기도 한다. 어쨌든 고려사에는 명종 23년인 서기 1193년 7월에 처음 이름을 남긴다.


밀양의 영남루 (필자 촬영)


당시에 남쪽 지방에서 반란군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극심한 것은 김사미(金沙彌)가 운문을 근거지로, 효심(孝心)이 초전을 근거지로 삼아서 떠도는 자들을 불러 모아 주현을 약탈하였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근심하였다.

경상도 역시 개경 남쪽이라 남적이라는 표현을 썼다. 정황상 남쪽 지방 전체에 반란군이 들불처럼 일어났고, 그중에서도 가장 세력이 큰 반란군이 운문과 초전이었고, 그들을 이끄는 게 김사미와 효심이었다. 김사미가 반란을 일으킨 운문은 지금의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이고, 효심이 반란을 일으킨 초전 지금의 울산광역시다. 직선거리로 30킬로미터가 조금 넘는 거리다. 효심 역시 어떤 지위의 인물인지 알 수 없지만 평범한 백성들 중 리더십과 용기를 겸비한 것으로 보인다. 사미승 혹은 사미승 출신의 인물과 평범한 백성이 일으킨 반란은 어째서 남쪽 지역의 반란군 중 가장 강력해서 임금이 걱정할 정도였을까?


일단 두 명은 망이와 망소이가 손청과 손을 잡은 것처럼 서로 합심해서 협동 작전을 펼친 것을 보인다. 지방의 반란군이 초기에 기세를 올렸다가 나중에 진압군에게 패퇴한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고립된 성격의 군대라는 점이기 때문이다. 초반에 기세를 올리고 진압군을 한두 번 격파한다고 해도 결국 조정에서 거듭 진압군을 내려보내면 밀리다가 패퇴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김사미와 효심은 서로 손을 잡은 상태라 한쪽이 위기에 처하면 도울 수 있었다. 그렇게 되면 진압군 역시 마음 놓고 한쪽을 공격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들이 손을 잡은 것이 우연의 일치인지 아니면 망이와 망소이가 손청과 손을 잡은 것을 직간접적으로 알고 따라 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덕분에 김사미와 효심의 세력은 남쪽의 반란군 세력 중에 가장 강력했고, 조정의 토벌 대상이 되었다. 같은 달, 명종은 대장군 전존걸을 비롯해서 이지순과 이공정등 장군들을 파견해서 이들을 토벌하려고 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바로, 이의민이었다.


의종을 죽인 킹 슬레이어 이의민은 경대승이 집권하자 눈치를 보면서 고향인 지금의 경주, 동경 지역에 은거하다가 그가 죽고 나서 임금의 부름을 받고 상경한다. 그리고 정권을 장악하고 무신 집권기를 이어갔다. 그런데 누구에게 부추김을 받았는지 모르지만, 뜬금없이 자신이 왕이 될 것이라는 허무맹랑한 예언 아닌 예언을 믿고 김사미와 효심의 반란군을 은근히 지원했다. 이들의 도움을 받아 왕위를 찬탈하려고 했는지 아니면 신라를 부흥시켜서 자신이 새로운 신라의 임금이 될 생각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쨌든 진압군 지휘관 중 한명인 이지순이 바로 이의민의 아들이었다는 점은 이의민이 뭔가 다른 마음을 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지순은 반란군에게 진압군의 각종 정보는 물론이고, 물자까지 지원하면서 반란군은 진압군을 격파하며 기세를 올린다. 진압군을 이끌던 전존걸은 이 사실을 알았지만 뾰족한 해결책이 없었다. 반란을 진압하지 못하면 그 책임을 지고 처벌당할 것이고, 내통했다는 혐의로 이지순을 처형한다면 이의민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고민에 빠져있던 전존걸은 결국 독약을 마시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반란군 때문에 진압군의 지휘관이 자살을 해버린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조정에서는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 해 11월, 상장군 최인을 남로착적병마사로 삼아서 다시 진압군을 보낸다.


이번 진압군은 이의민의 방해를 받지 않았는지 순조롭게 토벌을 감행했고, 결국 다음 해인 서기 1194년 2월 김사미가 항복하면서 반란은 일단락 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김사미가 처형당하자, 남은 효심이 반란을 이어받는다. 고려사에는 1194년 4월, 진압군이 지금의 밀양인 밀성의 저전촌이라는 곳에서 남적을 공격해서 7000명의 목을 베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여기에 나오는 남적이 효심이 이끄는 반란군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효심 역시 그해 12월 진압군에게 사로잡혔다는 기록이 나온다. 최후가 어땠는지는 알 수 없지만 김사미처럼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으로 보인다.


김사미에 이어 효심까지 사로잡았다는 소식을 들은 고려의 조정은 크게 기뻐했을 것이다. 하지만 수백 명을 넘어 수천 명 단위의 반란군이 계속 일어나고 있는 것은 정치가 대단히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증거였다. 하지만 아무도 그것을 얘기하지 않았고, 반란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반란이 진압되고 몇 년 후인 서기 1200년, 밀성의 관노 50여 명이 관청의 은그릇을 훔쳐서 김사미가 반란을 일으켰던 운문의 반적들에게 투항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아무리 잔혹하게 진압해도 먹고 살기 힘들면 백성들은 반란을 꿈꾸게 마련이다.


정명섭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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