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수서경찰서는 6일 “조성민이 도곡동의 한 아파트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고 밝혔다. 경찰에 따르면 조성민은 발견 당시 허리띠를 목에 묶은 채 쓰러져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경찰은 자살에 무게를 두는 가운데 정확한 사인을 조사 중이며 아직 유서는 발견하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야구선수 출신의 조성민은 아마추어 시절, 최고의 유망주로 손꼽혔다. 신일고-고려대 출신의 그는 휘문고-연세대를 나온 임선동과 함께 1973년생 선수들 중 양 강으로 손꼽혔으며, 이들은 최근 은퇴한 ‘코리안틉급’ 박찬호보다 훨씬 뛰어난 평가와 기량을 선보이기도 했다.
고려대 졸업 후인 1996년에는 일본 프로야구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계약금 1억 5000만엔+연봉 1200만엔의 대우로 현해탄을 건넜고, 이듬해 팀의 붙박이 마무리 투수로 자리를 잡았다. 선발 투수로 보직을 바꾼 1998시즌에는 전반기에만 7승을 거두며 맹활약을 펼쳤고, 이로 인해 올스타전에 출전하는 영광을 누렸다.
하지만 이후 팔꿈치 부상으로 결장하는 일이 잦았고, 부상 복귀 후에도 이렇다 할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자 2002년 계약 종료와 함께 요미우리에서 퇴단했다. 2005년에는 한화 이글스와 계약금 없이 연봉 5000만원의 계약을 맺었고, 주로 불펜에 몸담았지만 인상적인 활약과는 거리가 멀었다.
또한 조성민은 2000년 12월, 탤런트 최진실과 세기의 결혼식을 올려 큰 화제를 낳기도 했다. 그러나 최진실과의 결혼 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조성민은 결혼한 지 2년 만에 기자회견을 열어 이혼의 뜻을 밝혔고, 불륜 관계를 주장한 최진실과 공방을 펼치기도 했다. 결국 두 사람은 폭행 논란에 까지 휩싸이는 등 악화된 관계가 절정으로 치달았고, 결국 2004년 9월 협의이혼했다.
최진실 빈소에 모습을 드러냈던 조성민.
이혼 후에도 두 사람은 꾸준히 세간의 관심을 받아왔다. 최진실은 친권의 자동 부활을 금지하는 일명 ‘최진실법’을 이끌어내 부모 중 어느 한 쪽이라도 사망할 경우, 가정법원이 아이를 키울 사람을 심사해 친권자로 지정하게 만들었다.
2008년 10월, 최진실이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되자 조성민은 장례식장에 모습을 드러내 빈소를 지키기도 했다. 무엇보다 아이들의 양육권과 이들에게 주어질 유산이 과연 조성민에게 갈 것인가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르기도 했다.
이에 대한 논란이 거세지자 조성민은 한 방송과의 인터뷰를 통해 "(최진실)재산에는 관심 없다. 아이들 엄마랑 살 당시에도 재산이 얼만지 몰랐다. 그저 이제라도 아이들의 아버지로서 살고 싶을 뿐"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실제로 조성민은 이혼 당시 친권 포기 각서를 쓴 것으로 알려졌다.
조성민은 2010년 3월, 전 처남이자 배우 최진영이 사망하자 빈소를 찾았고, 한때 케이블 채널 야구 해설가 활동과 지난해까지 두산 베어스 코치직 등 간간이 모습을 드러내다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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