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맺힌 월드컵’ 미우라, 그리고 박지성 불멸의 명예
일본 미우라, 47세에도 월드컵 1분 출전 간절
박지성, 4개대회 연속골도 가능..가치 있는 고민
"축구화를 벗는 순간까지 국가대표를 꿈꾼다. 물론 노장 공격수가 일본 대표팀에 발탁되는 것은 문제다. 그만큼 일본에 유망한 공격수가 없다는 것을 단적으로 말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나이 47살, 단 1분이라도 월드컵 본선무대를 밟고 싶다.”
일본 현역 전설 미우라 카즈요시(47·요코하마)는 월드컵에 한(恨) 맺힌 사나이다. 1994 미국월드컵과 1998 프랑스월드컵 아시아 예선에서 맹활약했지만 정작 본선과는 인연이 없었다.
미우라를 앞세운 일본은 1993년 도하서 열린 1994 미국월드컵 최종예선 최종전에서 이라크에 통한의 동점골(2-2)을 허용, 한국에 본선티켓을 내줬다. 일명 '도하의 비극(기적)'으로 불리는 이 사건으로 미우라는 4년 후를 기약해야 했다. 당시 축구 해설위원(겸업)이던 오카다 다케시 감독(57·항저우)도 허망한 현실에 할 말을 잃었다.
그때부터였을까. 미우라에 대한 오카다 감독의 냉혹한 잣대가 싹트기 시작했다. 오카다 감독은 일본의 1994 미국월드컵 좌절 배경엔 골 결정력 부족, 그 중심에 미우라가 있다고 단정했다.
‘브라질 유학파’ 미우라는 한국의 이동국과 비슷한 배경을 가진 골잡이다. 어린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내며 각급 대표팀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그러나 언론의 주목을 받은 것과 달리 곱지 않은 시선도 많았다. 축구팬들은 미우라가 골을 넣으면 환호하다가도 조금만 부진하면 “일본에 미우라말고는 공격수가 없나. 식상한 그의 공격 패턴은 이미 상대팀에 읽혔다”는 불평불만을 쏟아냈다.
미우라에 대한 일본 축구계의 반감은 1998 프랑스월드컵 최종예선에서 절정에 달했다.
당시 미우라는 예선 2차전까진 ‘축구판 총리’로 불렸다. 우즈베키스탄전서 4골을 터뜨려 일본 주요 언론 1면을 장식했다. 그러나 도쿄에서 열린 숙명의 한일전, 미우라는 ‘자물쇠 최영일’에 채워져 침묵했다. 서정원과 이민성의 골로 한국이 2-1 역전하자, 일본 축구팬들은 기다렸다는 듯 독설을 쏟아냈다. 미우라를 약팀 전용 공격수로 한정했고, 일본축구협회는 미우라를 전적으로 신뢰한 가모슈 대표팀 감독을 카자흐스탄 원정(1-1) 직후 경질했다.
그리고 등장한 인물이 4년 전 미국월드컵 최종예선에서 미우라를 혹평했던 오카다 감독이다. 가모슈를 보좌한 수석코치에서 선장으로 승격한 오카다는 부임하자마자 공격수 세대교체를 선언했다. 골잡이 조 쇼지 짝으로 귀화한 로페즈를 비롯해 나카야마, 오카노를 저울질했다.
여론은 오카다 감독 편이었다.
운명의 6차전 아랍에미리트와의 홈경기. 일본은 반드시 승리가 필요했지만 또 1-1로 비기자 여론은 폭발했다. 공격진 줄부상으로 불가피하게 선발 출장한 미우라를 질타하고 나섰다. 울트라 닛폰 공식 응원단은 일본대표팀 버스까지 점거한 채 난동을 부렸다.
그중 다수가 미우라를 헐뜯었다. 입을 모아 “칙쇼(축생), 쿠소(대변) 같은 녀석”이라는 욕설까지 퍼부었다. 일본 축구팬이 국가대표 선수 면전에 욕을 하는 것은 드물다. 그만큼 당시 일본은 월드컵에 나가고픈 열망이 한으로 맺혔다. '미국월드컵 트라우마’ 미우라도 월드컵에 한 맺힌 선수 중 둘째가라면 서럽다. 당연히 응수했다. “욕한 녀석 누구야? 당장 버스에서 내려와 내 앞에서 해보라고!”라는 미우라의 울분에 찬 고함은 당시 국내 9시 뉴스에도 소개됐다.
축구팬과 입씨름 한 결과는 가혹했다. 미우라는 예선 종반 카자흐스탄과의 홈경기에서 볼 수 없었다. 오카다 감독은 미우라 대신 동갑내기 나카야마에게 기회를 줬다. 나카야마는 오카다 감독 기대에 부응, 골을 터뜨리며 일본의 조2위 플레이오프 진출을 견인했다. 당시 아시아에 주어진 월드컵 본선티켓이 3.5장. 이에 따라 A조 1위 사우디와 B조 1위 한국이 1998 프랑스월드컵 본선에 직행하고, A조 2위 이란과 B조 2위 일본이 중립지역에서 단판승부 플레이오프를 치렀다.
미우라는 이란과의 플레이오프에 모습을 드러냈지만 후반 조 쇼지와 교체됐다. 교체되는 순간, 미우라는 오카다 감독을 향해 “정말 나야?”라고 물으며 이해할 수 없다는 행동을 취했다. 오카다 감독은 미우라의 항명을 무시한 채 연장전 ‘비밀병기’ 오카노까지 투입했다. 오카노는 극적인 골든골(3-2)로 보답, 일본을 1998 프랑스월드컵 본선으로 이끌었다. 당시 미우라는 웃고 있었지만,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었다. 사상 첫 일본에 월드컵 본선을 안긴 오카다 감독은 “지역예선과 본선은 다르다”며 허벅지 부상까지 겹친 미우라를 프랑스에 데려가지 않았다.
미우라는 서럽게 울었다. 미국월드컵 트라우마에 이어 ‘충신에서 역적’으로 내몰린 프랑스월드컵 상처로 은퇴기로에 섰다. 그러나 미우라는 일본인에게 보기 드문 강인한 정신력의 소유자다. 다시 축구화 끈을 동여매고 안방서 열리는 2002 한일월드컵을 위해 달렸다. 비록 트루시에 감독마저 미우라를 외면했지만, 미우라는 지금도 현역생활을 이어간다. 목적의식은 변하지 않았다. “내 나이 47살, 단 1분이라도 월드컵 본선무대를 밟고 싶다”는 열망은 식지 않았다.
그만큼 축구선수에게 월드컵은 꿈의 무대다. 홍명보 감독이 박지성에게 ‘2014 브라질월드컵’복귀를 제안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혹자는 대표팀이 일방적으로 박지성 복귀 분위기를 조성한다고 꾸짖는다. 물론 박지성이 복귀를 꺼리는 이유는 잘 알고 있다. 본인 스스로 “후배들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서”라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박지성을 위해서라도 월드컵 본선행을 제안한다. 박지성은 안정환, 알 자베르와 월드컵 아시아 공동 최다골(3)을 기록 중이다. 안정환과 알 자베르는 은퇴했고 박지성은 현역이다. 2014 브라질월드컵에 출장해 ‘1골’이라도 넣는다면 독보적인 아시아 스타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또 국제축구연맹(FIFA) 공식 책자에 4개 월드컵 연속골을 넣은 불멸의 선수로도 기록된다. 이 기록은 '월드컵 84년 역사'에 단 2명(브라질 펠레, 구 서독 젤러) 뿐이다.
박지성 복귀는 불멸의 박지성 명예를 위해서, 한국축구를 위해서 모두가 웃을 수 있는 대형 프로젝트다. 하늘은 살신성인 박지성에게 네 번째의 선물을 주려한다.
첫 번째 선물은 훌륭한 스승이다. 박지성 진가를 알아본 히딩크를 비롯해 퍼거슨, 이학종 수원공고 감독, 허정무 전 감독, 기무라 분지, 그리고 홍명보 감독이 있다. 두 번째 선물은 인종을 초월한 우정을 나눈 맨유 파트리스 에브라다. 세 번째 선물은 백년가약을 맺은 SBS 김민지 아나운서다. 그리고 마지막 4번째 최고의 선물은 전 국민의 전폭적인 신뢰다. 국민의 머릿속 박지성은 ‘영원한 캡틴’으로 자리매김했다.
브라질월드컵에 나가든 안 나가든 국민은 박지성 결정을 존중할 것이다. 다만, '선배이자 스승’ 오카다 감독으로부터 외면 받아 월드컵 본선을 밟지 못한 미우라와 비교하면 박지성에겐 충분히 가치 있는 행복한 고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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