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고성군 22사단 GOP(일반전초)에서 총기 난사 후 무장 탈영한 임모(22) 병장이 23일 오후 2시 55분경 생포됐다. 사진은 22일 오후 사건 현장과 가장 가까운 것으로 알려진 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명파리 민가 옥상에 매복한 채 경계근무를 서고 있는 장병들.ⓒ연합뉴스
과거 독일의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예술위기의 본질은 아우라의 상실”이라고 진단했다. 아우라란 ‘어떤 예술작품이나 물건에서 느껴지는 분위기 혹은 다른 것과는 다른 한 예술작품의 고유한 특성 혹은 미적 아름다움’을 의미한다. 가령,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역작 ‘모나리자’라는 그림을 미술관에서 원품으로 보았을 때 느끼는 감동, 음악홀에서 파바로티의 노래를 들었을 때의 바로 그 느낌이 아우라다. 20세기 초 유럽 철학자들은 산업화와 함께 예술이 기계를 통해 복제되기 시작하면서 예술의 위기를 우려했다. 무분별한 예술의 복제가 흡사 작품 고유의 ‘아우라’를 파기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대량복제 시대가 열림에 따라 예술이 더 이상 특정 계층을 위한 것만이 아니라 온 인류에 ‘정보의 평준화’를 가져왔다는 점은 벤야민도 부정하기 힘들 것이다. 가령, 이제 사람들은 ‘모나리자’를 보고자 값비싼 프랑스행 비행기 티켓을 사지 않아도 되고, 오페라 가곡을 듣기 위해 이탈리아로 향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인터넷 검색창에만 작품을 입력하면 언제 어디서든 예술작품을 듣고, 보고 느낄 수 있다. 즉, 대량복제와 인터넷의 범람이 아우라의 상실이라는 기우보다는 인류에 ‘정보의 접근성’을 가능케 했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평가해야 될 것이다.
다만, 현 시점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실시간으로 대량 생산, 복제되는 정보들이 과연 우리에게 오롯이 도움이 되느냐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필요해 보인다. 특히, 전통적인 미디어와 달리 시시각각 인터넷과 보도채널에서 쏟아지는 뉴스의 범람은 때론 ‘정보의 필터링’ 시간조차 허용하지 않는 모양새다. 물론, 국민의 알권리를 위해 언론이 신속히 뉴스를 전달하는 것은 기자들의 숙명이지만 클릭수와 시청률에 매몰돼 확인되지도 않는 정보를 쏟아내는 것은 결코 국민의 알권리에 부합하지는 않는다. 되레 확인되지 않은 정보의 전달은 국민들의 혼란만 가중시킬 뿐 올바른 정보로써 그 가치를 인정받기 어렵다.
우리 언론의 무분별한 경마보도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특히, 온 국민을 충격에 빠뜨렸던 세월호 참사에서 그 낯부끄러운 민낯은 처참히 공개됐다. 일부 통신사에서 속보로 뜬 ‘전원 구조’ 보도와 함께 인터넷 공간은 삽시간에 엄청난 대형오보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비단 인터넷 언론뿐 만은 아니다. 종편은 물론 각종 보도채널과 이른바 ‘지상파’ 방송이라고 불리는 KBS, SBS, MBC까지 해당 보도를 공격적으로 쏟아냈다. 물론, 애초에 구조인원 파악조차 제대로 못한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의 책임이 가장 크지만 그것을 전달하는 언론이 조금의 의심이나 확인도 없이 속도전에만 급급해 보도하고 ‘벌떼’처럼 똑같이 뉴스를 베껴서 대량생산했다는 점은 두고두고 우리 언론사의 부끄러운 기록으로 남게 됐다.
더 큰 문제는 세월호의 아픔이 지워지기도 전에 이 같은 문제가 되풀이됐다는 점이다. 특히, 22일 동부전선 GOP에서 동료 병사에게 총기를 난사하고 무장 탈영한 임모 병장(22)의 생포 과정을 전하는 언론의 모습은 세월호 보도의 참극을 똑같이 답습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실제로 23일 연합뉴스, YTN 등 일부 언론이 한 임모 병장을 생포했다고 보도 한 뒤 곧바로 ‘생포 임박’으로 정정하는 등 오락가락 보도로 혼란을 줬다.
심지어 YTN은 이날 9시 40분쯤 ‘군 총기난사 임병장 생포’ 속보를 전하면서 군이 임병장을 생포했다고 보도했다가 곧바로 생포가 ‘임박’했다고 슬며시 바꿨다. 연합뉴스도 ‘동부전선 총기난사 무장 탈영병 생포’ 보도하고, 속보로까지 전송했다가 ‘생포 임박’으로 정정했다. 더욱이 국방부가 일부 언론의 ‘생포 보도’에 대해 사실이 아니라면서 “임 병장과 가까운 거리에서 투항을 설득하고 있다”고 밝힌 후였다. 하지만 어느 언론도 해당 오보에 대한 사과는 없었다. 그저 뉴스를 바라보는 여론의 불안과 혼란만 가중될 뿐이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는 알권리로 둔갑한‘국익’이 아니라 ‘국실’이다.
물론, 한 병사가 총기를 사용해 무려 12명의 동료를 사상했다는 뉴스는 그 충격적인 소식만큼이나 우리 국민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관련 뉴스를 국민들에게 공개하는 것은 필요한 부분일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마치 드라마나 영화 속 ‘인질극’을 보는 것처럼 확인도 되지 않은 정보를 무분별하게 쏟아내는 뉴스가 과연 국민의 알권리를 충족하는 것인지, 그것이 우리 국익에 어떤 도움이 되는지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오히려 이 같은 오보의 대량생산이 되레 또 다른 오보로 꼬리를 물게 되면서 여론들이 취합해야 하는 ‘사실’은 왜곡되는 양상이다. 어쩌면 벤야민이 우려한 대량생산의 폐해는 ‘예술’이 아닌 ‘21세기 한국 언론의 현주소’가 아닌지 씁쓸한 뒷맛을 남기게 된다. 지금보다는 다소 더디게 느껴지겠지만 최소한의 ‘게이트 키핑’이 지켜지고, 남의 기사를 실시간으로 베껴 쓰기보다 각 언론사만의 ‘아우라’가 느껴졌던 기사들로 빼곡 찼던 시절이 어째 더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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