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귀의 ad Greece 42>그림같은 풍차들과 그리스 정교회 그리고 델로스
고대 그리스 문명은 유럽 문명의 시원이자 인류 문명의 원천입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창조해낸 독창적인 문화와 문명의 자취는 숱한 고전과 유물, 유적으로 고스란히 우리에게 남겨졌습니다. 여기엔 그리스의 12신과 영웅은 물론 현인과 보통사람들의 희로애락이 담겨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인의 열광과 환희, 고통과 좌절로 점철된 뜨거운 삶의 궤적이기도 합니다. 그리스 역사문화 탐방은 그리스 고대 문명과 영욕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는 신화기행이자 미학기행입니다. 오늘날 혼돈에 빠진 우리의 삶을 반추하고 새로운 지혜를 탐색하는 ‘나를 찾는 여행’이기도 합니다. 무엇을 발견하느냐는 각자 자신의 몫입니다. 열린 눈, 열린 마음으로 함께 떠나보시지요. ad Greece!!< 편집자 주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바다, 가장 아름다운 섬은 어디에 있을까? 물론 자신에게 특별한 감정과 사연을 안겨준 곳이 가장 아름다운 곳일 터이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꼽는 아름다운 바다 가운데 에게 해와 지중해가 으뜸일 듯싶다. 지중해에서 만나는 에메랄드 빛 바다는 정말 매혹적이다. 너른 지중해에서 400여개의 크고 작은 섬이 몰려있는 에게 해야말로 지중해의 중심이자 꽃이다. 그 가운데 산토리니와 미코노스 섬이 아름다운 낭만의 섬으로 선두를 다툰다.
아름다운 모든 섬을 다 가볼 수는 없다. 필자는 처음부터 미코노스를 택했다. 그곳은 바로 아폴론 신의 고향인 델로스 섬을 지척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커플들의 낭만 여행으로는 산토리니가 제격이겠지만, 그리스 문명 답사를 위해 홀로 떠난 배낭 여행자에겐 델로스를 가기 위해 경유하는 미코노스 섬이 더 유용한 선택이 된다. 에게 해의 낭만도 맛보고 아테네 황금시대를 연 최고의 국제도시 델로스 유적지를 가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델로스는 그리스인들의 최고의 사랑을 받고 있는 아폴론과 아르테미스 남매의 탄생지가 아니던가.
아폴론 신을 알현하는 일은 녹록지 않았다. 필자는 델로스 섬을 찾기 위해 미코노스를 두 번이나 방문해야 했다. 2014년 2월 첫 번째 배낭여행에서 낭패를 본 곳이 바로 미코노스 섬이다. 미코노스 섬까지 와서 바로 코앞에 있는 델로스 섬에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8월에 다시 방문하게 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언젠가 배낭여행을 떠날 독자들을 위해 필자가 겪은 실패담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첫 번째 배낭여행은 에어텔 방식으로 진행했다. 에어텔 방식은 국내 여행사가 여행에 필요한 해외항공권과 현지 국내 항공권, 그리고 여행기간 동안의 여러 지역의 호텔 예약을 대행해 주는 방식이다. 현지 사정에 밝은 여행사에 이런 것들을 맡기고 필자는 답사지별로 확인하고 주목해야 할 유물이나 유적, 관련된 신화와 역사를 공부하는 데 집중할 수 있었다.
그런데 미코노스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여행사가 예약해준 대로 델로스 섬에 들어가기 위해 미코노스 섬에 들어갔다. 에게 해의 낭만을 흠뻑 느껴볼 요량으로 미코노스로 들어갈 때는 페리편을, 아테네로 돌아올 때는 항공편을 선택했다. 그런데 종일 겨울비가 내리는 바람에 에게 해를 항해하며 에메랄드 빛 에게 해의 아름다운 풍광을 보려던 계획은 어긋났다. 약간의 멀미를 하면서 밤늦게 도착했다. 미코노스 신항구에 도착해 택시를 타고 예약된 호텔로 직행했다. 시내까지는 2.5km 정도로 멀지 않다. 가랑비는 밤새 내렸다.
다음날 아침 9시 배로 델로스 섬에 들어가기 위해 일찍 일어났다. 미코노스의 새벽을 보기 위해서였다. 호텔 테라스로 나가 미코노스 시내 호라(Hora)를 바라봤다. 규모가 크지 않은 펜션형 호텔이지만 테라스에 작고 예쁘장한 수영장을 갖추고 있었다. 온통 하얀 건물로 가득한 시내와 푸른 바다가 아름다운 조화를 만들어낸다. 전날은 종일 비가 내렸는데 다음날은 맑았다. 델로스 섬으로 들어갈 일진이 좋은 날인가 보다 생각했다.
호텔에서 시내까지는 10분 정도 걸어서 갈 수 있는 가까운 거리다. 9시 배 시간까지는 1시간 반 정도 여유가 있었다. 1시간이면 둘러 볼 수 있는 시내 산책에 나섰다. 구시가지 관광의 기점이 되는 만토(Manto) 광장에서 출발하여 미로 같은 골목을 지나 풍차 언덕으로 올랐다. 하얀 건물과 돌을 깔고 하얀 회칠을 한 골목길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아기자기한 아름다움이 마치 동화의 나라와 온 것과 같은 느낌을 준다. 예쁜 집들이 연이어 있는 골목에는 수많은 카페와 작은 쇼핑 가게가 연이어 있다. 이른 아침이어서 문이 모두 닫혀 있었지만, 한 낮이 되면 관광객들을 받기 위해 활짝 문을 열 것이다.
미코노스 풍광의 대표적 브랜드는 역시 풍차다. 언덕 위의 다섯 개의 풍차가 에게 해의 해풍을 맞는 풍경은 멀리서 바라볼수록 낭만적이다. 한때 풍력을 이용해 곡식을 찧던 곳이지만, 지금은 관광용으로 풍차만 남아있다.
미코노스 섬은 작은 섬이지만 그리스 정교회의 작은 교회가 유난히 많다. 무려 400여개나 있다고 하니 그리스인들이 얼마나 독실한 종교 생활을 하는지 짐작하게 한다. 미코노스 타운의 작은 시가지 골목길을 다니다 보면 다양한 건축양식의 교회를 만나게 된다. 이곳이 여러 민족에게 점령되었던 수난의 역사를 대변하는 듯하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곳은 파라포르티아니(Paraportiani) 교회이다.
이 건물은 아주 독특한 외양과 구조를 갖고 있다. 비잔틴 건축양식과 미코노스 전통 건축양식이 혼합되었고, 5개의 교회가 2층 구조로 결합된 복합 건물이다. 창문이나 지붕을 하늘 색 또는 붉은 색으로 도장한 다른 교회와 달리 이 교회는 건물 전체가 하얀 색으로 뒤덮여있어 순결하고 정갈한 느낌을 더해 준다.
풍차 언덕을 둘러보고 배편 시간을 맞춰 델로스 행 승선장으로 내려왔다. 이미 큰 배가 정박하고 있었다. 그런데 승선장 입구에 있는 매표소로 가니 문이 굳게 닫혀 있는 게 아닌가. 델로스 섬은 무인도여서 이곳에서 배를 갈아타야만 드나들 수 있다. 9시 출항하는 배를 타려면 30분 전 쯤에 부두에 관광객들이 나와 있어야 했는데 아무도 없었다. 배편이 변동되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주변의 행인에게 배편을 물어보니 인근의 페리 사무소에 가서 물어보라 한다.
200미터 쯤 떨어진 곳에 있는 페리 사무소로 달려갔다. 그리스에서 낯익은 유람선인 ‘블루 스타 페리’ 표지판이 걸려 있었다. 사무소 직원에게 물어보니 동절기엔 금요일과 주말만 1회씩 운항한다고 한다. 너무 황당해서 말문이 막혔다. 하절기에 3~4회 운행하는 것에 비해 비수기인 동절기에 운행 횟수가 적다는 것은 이미 여행 출발 전에 여행사에서 확인해 줘서 알고 있었지만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아예 운항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금시초문이었기 때문이다.
이미 국내 여행사에서 동절기에는 1일 1회만 운행하니 여름처럼 당일치기는 할 수 없고, 따라서 반드시 델로스로 들어가기 전날 미코노스에서 하룻밤을 묵고 아침 첫배를 타라고 안내했었다. 여행사가 완전히 잘못된 정보에 의해 항공편을 잡아주고 배편을 알려준 셈이었다. 동절기엔 금요일과 주말만 운항하는 사실을 국내 여행사는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여행사가 이런 상황을 미리 알았더라면 미코노스 방문 일정을 주말로 맞출 수도 있었을 것이다. 또 아예 다른 지역의 방문 일정을 잡을 수도 있었다. 아무튼 여행사의 안내만 믿고 현지 사정을 재차 확인하지 않은 필자의 잘못이었다.
필자가 미코노스를 방문한 날이 목요일이었으니 델로스 섬에 들어가려면 미코노스에서 하루를 더 묵어야 했다. 그런데 문제는 금요일이 되어도 바다의 풍랑과 일기 상황에 따라 배를 띄우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거였다. 1~2월의 경우 파고가 높아 배가 운항할 수 있을지는 당일 일기 상황에 크게 좌우된다는 것이었다. 미리 예측할 수 없다는 얘기다. 도서의 선박 항해 시 바다 기상의 영향을 받는 상황은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비슷한 사정이긴 하다.
결국 필자는 델로스 행을 포기해야 했다. 여행사에서 이미 확보해 준 그리스 국내 항공권과 이후의 모든 호텔 예약을 취소할 경우 여행 전체 일정이 뒤죽박죽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남은 일정만이라도 차질 없이 진행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일단 첫 방문 시도는 아폴론과 인연이 닿지 않는 듯싶었다. 이런 예기치 않는 사고는 이후에 계속된 필자의 배낭여행 패턴을 완전히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실패로부터 배운 교훈은 오히려 이후의 배낭여행을 튼실하게 만들어주었다.
2월의 사건 이후 이어진 2014년 8월, 9월, 10월의 그리스, 터키, 이탈리아 배낭여행은 모든 것을 필자가 직접 준비하고 시행했다. 국제 항공편과 현지 국내 항공편을 확보하고, 여행 일정의 변동 가능성에 대비해서 입국 첫날과 출국 전날에 머물 도시의 호텔만 예약했다. 나머지 일정은 사전 예약하지 않고 매일 매일 변동되는 일정 닿는 곳의 호텔을 찾아 숙박했다. 그리고 방문 유적지의 박물관 개장 시간과 폐장시간도 홈페이지에서 미리 찾아 확인해 두었다. 이렇게 직접 여행을 기획하다보면 많은 시간을 빼앗기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회를 거듭할수록 요령이 생겨 효율적으로 준비할 수 있었다.
아무튼 동절기에 지중해 섬을 방문하는 일정은 신중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 독자 여러분은 11월에서 3월까지는 해상 여건에 따라 언제든지 선박 운항 일수가 제한되고 일정의 변동도 심하니 가급적 바다 상황이 안정되어 선박 운항이 원활해지는 하절기를 선택하길 바란다. 또 대개 여행 준비 시간이 부족하다보니 여행사에 의존하게 되는데 여행사가 제공하는 정보를 그대로 믿지 말고 자신이 직접 확인할 필요가 있다. 아예 여행의 모든 것을 자신 스스로 설계하고 실행해 보는 것도 바람직한 방법이다.
델로스 섬을 코앞에 두고 발길을 돌려야 했던 그때의 낙담하던 정황을 생각하면 지금도 아쉬움이 진하다. 크게 실망하여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델로스 행 승선장엔 큰 유람선이 덩그러니 떠 있고, 부두와 맞닿아 있는 작은 교회 위로 갈매기만 무심하게 날았다. 내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결국 델로스를 가보지 못하는 아쉬움은 미코노스 고고학 박물관 관람과 시내 관광으로 달랠 수밖에 없었다.
새벽부터 설레었다가 한바탕 해프닝을 치르고 나니 아침 구름도 걷히고 하늘은 더욱 파래지고 겨울 햇살은 따사로워졌다. 미코노스의 밝고 생그러운 분위기는 잠시 침울해졌던 필자의 마음을 달래주었다. 남국의 강렬한 태양, 청명한 하늘, 보석처럼 빛나는 바다와 더불어 사는 그리스인들이 천성적으로 낙천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 듯싶다. 내친 김에 이른 아침에 미처 보지 못한 골목들을 이리 저리 다녀보고, 풍차 언덕에도 다시 올라 느긋하게 거닐며 에게 해의 풍광을 만끽했다.
미코노스의 건물들은 건축 양식은 거의 비슷하지만 섬세한 부분에선 각기 특색이 있다. 건물 외관은 흰색으로 동일하지만, 문과 테라스를 파란색, 붉은색, 청록색으로 채색하여 색다른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남과 동조하면서도 판박이가 되지 않으려는 그리스인들의 독특한 개성이 반영된 것이다.
한낮이 되니 미코노스의 사물들이 에게 해의 태양 아래 제각각의 색조를 뚜렷이 드러내면서 언덕 위의 풍차들은 그림 같은 풍경을 연출했다. 또 이곳은 동절기가 우기(雨期)라 초목이 푸르고 우리나라의 가을 날씨 같은 따뜻한 기후여서 꽃을 피우는 겨울 꽃들도 적지 않다.
미코노스 타운의 골목길 안에는 에게안 해양 박물관과 민속 박물관이 있다. 헌데 관광객이 적은 비수기여서 그런지 문이 닫혀 있었다. 미노안 시대부터 19세기까지의 선박과 관련된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는 해양 박물관을 보고 싶었는데 아쉬웠다. 델로스를 갈 수 없게 되니 시간 여유가 많이 생겼다. 부둣가에 있는 미코노스 시청에도 들어가 보고 야채와 생선을 파는 부두 근처의 노점도 둘러봤다. 부둣가에 연이어 있는 작은 레스토랑에서 수불라키로 점심을 한 후 미코노스 고고학 박물관을 찾아갔다. 미코노스 타운에서 걸어서 10분 정도 거리로 가깝다.
미코노스 고고학 박물관에는 다른 곳에 없는 진귀한 유물이 하나 있다. 트로이의 멸망을 묘사한 대형 저장 용기 피토스(pithos)이다. 트로이 전쟁의 영웅들을 묘사한 도기 그림은 그리스의 다른 도시에 많이 남아있지만, 트로이 목마를 묘사한 작품은 이곳의 작품이 유일하다. 이 유물이 미코노스 박물관의 대표 브랜드가 된 이유다.
이 피토스는 기원전 7세기 중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높이가 130cm 정도로 매우 크다. 크레타 섬의 크노소스 궁전에서 발굴된 대형 피토스를 연상시킨다. 크노소스의 피토스는 대형 표면을 기하적 문양으로 채웠다. 이곳의 피토스는 트로이가 멸망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잔혹한 살육과 전쟁의 비참함을 파노라마처럼 여러 장면의 연속 그림으로 부조했다.
특히 목 부분에는 트로이 목마가 묘사되어 있다. 목마의 몸체에 네모난 창문이 나있고, 병사의 얼굴을 새겨 넣었다. 목마 속에 병사들이 숨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묘사인 것 같다. 목마 위와 아래 부분에 그려진 전투하는 병사들의 모습은 트로이군을 기습하는 그리스 군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피토스의 둥근 몸통의 공간을 빙 둘러 채운 그림이 인상적이다. 그리스 군이 트로이 병사는 물론, 어린이와 여인들을 죽이는 장면을 파노라마처럼 묘사하고 있다. 전쟁 과정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잔혹한 행위를 반복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전쟁의 비극을 서사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미코노스는 그리스 본토에서 트로이가 있던 일리오스 지방으로 가는 중간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그렇다면 트로이를 정벌하려던 그리스 연합군이 이곳을 거쳐 갔을 것이다. 또 귀향하는 그리스 연합군 병사들에 의해 트로이 전쟁의 영웅담뿐만 아니라 전쟁의 참화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이 이곳에 전해졌을 것이다. 이런 배경이 트로이 멸망 장면을 담은 피토스가 이곳에 서 만들어지고 전해진 연유일 수도 있을 듯싶다. (다음 회는 아폴론 신의 고향 델로스 답사가 이어집니다.)
글/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한국정책평가연구원장(kipeceo@gmail.com)
©(주) 데일리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