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평해전 그날 난 그저 만세나 외치던 대학생이었다
<칼럼>서포터즈가 돼 크라우드펀딩을 돕고 마침내 개봉의 감격
각자의 갑판 위에 마주보며 정렬해 있는 장병들. 모두가 일순간 거수경례를 한다. 경례로 묵언의 인사를 건네는 그들의 눈빛 사이로 전함이 교차되며 지나간다.
영화 '연평해전'에 딱 두 번 나오는 이 장면이 나는 가장 가슴에 와 닿았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이 모든 걸 말해주고 있는 것만 같다. '전우야 이곳이 우리가 지켜낼 바다야', '모두 무사하자', '서로를 굳건히 믿자'. 그리고 영화를 보는 내게도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바다는 우리가 지키겠습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세요!'. 어떤 장면보다 진한 여운과 감동에 눈물이 났다.
연평해전은 나에게 운명 같은 인연이었다. 2013년 2월 우연히 뉴스를 봤다. 한 영화사가 연평해전 영화를 제작 준비중인데, 자금이 여의치 않아 크라우드 펀딩을 진행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어떤 방식으로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다. 기사에 나온 영화사를 인터넷으로 찾아 무작정 전화를 걸었다.
"영화 연평해전이 만들어지는 데 보탬이 되고 싶습니다. 크라우드 펀딩이 세상에 알려져 많은 분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홍보활동이라도 하겠습니다."
그렇게 '영화 연평해전을 위한 2030나눔서포터즈'를 시작하게 됐다. 전국적으로 청년 100여명이 동참했다. 2월 18일,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첫 발대식을 열고 서울, 인천, 부산, 대구 등지에서 크라우드 펀딩 캠페인을 벌였다.
연평해전은 2002년 6월 29일에 벌어졌다. 당시 나는 대학생이었고, 캠퍼스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월드컵을 만끽했었다. 당시엔 연평해전이 일어났는지 조차 알지 못했다. 연평해전에 관심을 갖게 된 건 2010년 천안함 폭침사건이 터지면서였다. 46명의 젊은 청춘들이 북한 때문에 목숨을 잃어야만 했던 것이 안타깝고 화가 치밀었다.
많은 사람들은 46인의 용사를 추모했고 더불어 국가적 예우가 뒤따랐다. 그러면서 새롭게 알게 됐다. 8년 전 6월에도 북한의 도발로 젊은 청춘들이 목숨을 잃었지만 아무도 관심 가져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이다.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은 당시 월드컵 폐막식 참가를 위해 일본으로 떠났고, 모두의 무관심 속에 조촐한 영결식이 치러졌다. 미안해졌다. 나만 너무 행복했던 것 같았다.
2030나눔서포터즈에 참여했던 청년들도 비슷한 마음이었다. 자신이 지금껏 누려온 행복들이 누군가의 지킴과 노력에 의한 것이었음을 모르고 살았던 것에 미안해했다. 같은 청년세대로서 잊힌 연평해전 스토리를 세상에 함께 알리자는 열의가 있었다. 사람들도 조금씩 관심을 가져주기 시작했다. 크라우드 펀딩 소식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 폭발적인 참여가 이뤄졌다. 해군부인회의 영화제작비 마련 바자회가 성황을 이뤘고, 기업들의 기부도 이어졌다.
2013년 6월 28일, 그날을 잊을 수 없다. 이날 전국 각지에서 모인 2030 청년들과 함께 연평해전 유가족 및 생존 장병을 위한 추모문화제를 가졌다. 연평해전으로 아들을 떠나보낸 부모님들은 그날 연신 눈물을 흘렸다. 우리는 “연평해전 별이 된 그분들, 잊지 않고 지켜내겠습니다”라는 피켓을 들고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세상의 무관심 속에서 살아온 지난 11년이었는데, 지금이라도 이렇게 기억해주다니 너무 고맙습니다."
고 윤영하 소령의 아버지는 유가족을 대표해 감사인사를 해줬다. 영화 연평해전의 제작자인 김학순 감독도 요즘 청년들이 이런 데에 관심을 가져준다는 게 그저 신기하면서도 감사할 따름이라며, 청년들과 국민들이 기억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겠다고 말했다.
연평해전 서포터즈는 내가 도우려 시작한 일이었지만 오히려 더 많이 배운 경험이었다. 이해영 원사(2002년 당시 참수리357호 갑판장)는 2013년에 만났을 때 평택2함대에서 전시된 천안함을 든든하게 지키고 있었다. 지금은 인천의 항만부대에서 근무하고 있다.
권기형 병장(당시 갑판병)은 연평해전 당시 팔에 총상을 입었던 이야기를 부산 청년들에게 담담히 풀어내며 공감을 이끌었다. 그는 현재 회사에서 열심히 일하며 결혼도 앞두고 있다.
이희완 소령(당시 부정장)은 오른쪽 다리를 잃어 의족에 의지하면서도 청년들을 위해 연평해전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는 현재 대전합동군사대학 교관으로 있으면서 후배들을 가르치고 있다.
죽음을 불사한 경험을 안고서도 묵묵히 또 희망적으로 살아가는 분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도 더 단단해져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됐다.
유가족분들은 지난 2년 동안 석가탄신일 때 얼굴을 뵈었다. 평택2함대의 법당에는 여섯 전사자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아버님과 어머님들은 석가탄신일마다 법당을 찾아 예불을 하고, 참수리호와 위령비를 방문해 아들의 모습을 회상하곤 한다. 13년이란 시간이 지났음에도 자식을 잃은 슬픔과 회한은 벗기 어려운 것 같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손을 잡아드리는 것, 아들 대신 카네이션을 달아 드리는 것이 전부였다.
얼마 전 석가탄신일에 뵈었을 때 유가족분들은 많이 떨려했다. 영화를 통해 자식이 죽는 모습을 눈으로 확인해야 한다는 것이 상상하기 싫은 모습이었다. 그러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봐주길 희망하셨다.
2년여의 기다림 끝에 영화 연평해전이 개봉했다. 6월의 첫 시사회 날, 영화관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나는 상기된 표정의 유가족분들과 같이 영화를 관람했다. 잦은 훈련과 출동, 비좁은 참수리호의 침실. 생존 장병을 통해 증언된 모든 것들이 실감나게 표현됐다. 전투신은 울분을 터뜨리기에 충분했다. 생사의 갈림길과 혼란 속에서도 모두가 있는 힘을 다해 싸웠다. 자기 목숨보다도 전우를 위해 고군분투했다. 영화는 우리가 여태 무심했던 젊은 청춘들의 애국심과 열정을 고스란히 보여줬다.
6월 29일, 평택2함대에서는는 열세번째 연평해전 추모식이 진행된다. 추모식은 늘 조용히 거행됐다. 대전 현충원에는 아직도 여섯 명의 전사자들이 각기 따로 묻혀 있다. 누군가 달아놓은 ‘제2연평해전 전사자 묘역’이란 표식이 없으면 찾기도 어렵다. 이번엔 메르스 탓에 외부 초청인원도 많이 제한됐다고 한다. 이번을 끝으로 추모식은 ‘서해 수호의 날’ 또는 ‘국가 안보의 날’을 정해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도발과 함께 통합돼 진행될 예정이다.
그래도 유가족분들과 생존 장병들의 마음은 그 어느 때의 추모식과는 사뭇 다를지 싶다. 이제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연평해전을 함께 기억해주지 않는가. 추모식이 열리는 동안에도 누군가 는 연평해전을 보러 극장을 찾을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큰 힘이 될 것이 분명하다. 청년으로서, 우리가 꿈꿀 수 있는 현재를 만들어준 젊은 청춘들과 유가족분들을 만나러 29일 나도 평택 2함대를 찾아 추모식에 함께할 것이다. 가서 가족분들의 손을 잡고 서해바다에 이야기 할 것이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잊지 않겠습니다.
글/신보라 청년이여는미래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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