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스포츠 전문 ESPN에는 사이영 프리딕터(Cy Young Predictor)라는 항목이 있다. 말 그대로 기록을 수치화해 사이영상 수상자를 예측한다는 뜻이다.
세이버 매트릭스의 대부 빌 제임스가 고안한 수치는 단순하면서도 복잡한 계산법을 지닌다. 공식은 {(5*이닝수/9)-자책점}+(탈삼진/12)+(세이브*2.5)+완봉+{(승*6)-(패*2)}+VB로 이뤄진다. VB(Victory Bonus)는 소속팀이 지구 1위에 올라있을 경우 무려 12점의 가산점이 주어진다.
물론 완벽하다고 볼 수 없지만 사이영 프리딕터는 그동안 실제 사이영상 수상자들을 높은 확률로 맞히곤 했다. 서비스가 제공된 2002년부터 지난해까지 13년간 26명의 수상자 중 19명을 맞혔고, 적중률은 73%였다.
틀린 경우는 2003년 로이 할러데이, 2004년 로저 클레멘스, 2005년 바톨로 콜론, 2006년 브렌든 웹, 2009년 잭 그레인키, 팀 린스컴, 2010년 펠릭스 에르난데스 등 7명의 수상자들이다. 이들보다 순위가 높았던 대부분의 투수들은 마무리 투수들이 주를 이뤘다. 이렇듯 사이영 프리딕터는 마무리 투수의 비중도 높게 평가한다.
올 시즌은 최근 무실점 행진을 이어가고 있는 LA 다저스의 잭 그레인키(125.7점)가 내셔널리그 선두를 달리고 있다. 하지만 그레인키의 경우 피츠버그의 에이스 게릿 콜(117.4)과의 격차가 크지 않다. 만약 지구 1위의 가산점이 없었다면 순위는 바뀔 수 있었다. 반면, 아메리칸 리그에서는 휴스턴의 달라스 카이클이 가산점 없이도 압도적 1위를 달리고 있다. 이대로라면 생애 첫 사이영상 수상이 유력해 보인다.
이 공식을 KBO리그에 대입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다만 VB의 경우 1~3위팀(삼성, 두산, NC)에게만 부여했다. 메이저리그는 디비전시리즈 진출이 확정되는 각 지구 1위 팀에게만 주어지며, 와일드카드 결정을 치러야 하는 팀에게는 가산점이 붙지 않는다. KBO리그 역시 올 시즌부터 4~5위팀들 간의 와일드카드 결정전이 도입됐다.
사이영 프리딕터에 의한 올 시즌 KBO리그 최고의 투수는 놀랍게도 NC 외국인 투수 에릭 해커였다.
해커는 올 시즌 11승 3패 평균자책점 3.09로 순항 중이다. 지난 2년간 유독 따르지 않던 승운은 비로소 물꼬가 터진 듯 벌써 두 자리 수 승수를 따냈고, 기록 전반에 걸쳐 최상위권을 내달리고 있다. 여기에 팀 성적에 의한 가산점까지 챙기며 106.46점을 획득했다.
2위는 20승 도전을 선언한 두산 유희관(105.73점)이다. 23일 SK전에서 부진하는 바람에 포인트를 많이 잃었지만 다승 부문 단독 선두를 비롯해 한 차례 완봉승, 그리고 12점의 가산점까지 얻으며 해커를 바짝 뒤쫓고 있다.
하지만 실질적 최고의 투수는 따로 있다. 바로 1점대 평균자책점을 유지 중인 KIA 양현종이다. 23일 삼성전에서 10승 고지에 오른 양현종은 체력 문제에 대한 의문부호가 있지만 여전히 강력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양현종은 가산점 없이도 105.14점을 기록, 실질적으로 해커, 유희관보다 뛰어난 투수임을 입증하고 있다.
올 시즌 KBO리그 사이영 프리딕터. ⓒ 데일리안 스포츠
마무리 투수 가운데서는 삼성 마무리 임창용이 75.77점으로 선두를 달리고 있다. 하지만 가산점이 없었다면 임창용의 순위는 3위로 내려앉는다. VB를 뺄 경우 올 시즌 최고의 마무리는 한화의 뒷문을 책임지고 있는 권혁이었다.
7승 8패 12세이브를 기록 중인 권혁은 무지막지한 이닝 소화(78이닝)는 물론 역전승이 많은 팀 사정상 승수에서 많은 혜택을 보고 있다. 권혁의 사이영 프리딕터는 69.83점이다. 임창용-권혁에 이어 FA를 바라보는 넥센 손승락이 69.78점으로 3위에 올랐다.
그렇다면 메이저리그의 사이영 프리딕터가 KBO 최고 투수에게 주어지는 골든글러브 수상자도 잘 맞혔을까. 정답은 ‘어느 정도 맞았다’에 가깝다.
일단 2005년(롯데 손민한)부터 2006년(한화 류현진), 2007년(두산 리오스), 2008년(SK 김광현), 2009년(KIA 로페즈), 2010년(한화 류현진), 2011년(KIA 윤석민)은 모두 적중했다. 그리고 지난해 밴헤켄도 그대로 들어맞았다. 이 가운데 가장 높은 점수를 얻은 투수는 20승 고지를 밟았던 리오스였다.
다만 2012년과 2013년 수상자는 실제와 거리가 멀었다. 2012년 최고 점수를 받은 투수는 162.43점의 넥센 나이트였다. 하지만 골든글러브 수상자는 가산점 12점을 더하고도 나이트에 크게 못 미친 삼성 장원삼(137.81점)이었다. 외국인 선수에 대한 차별이 단적으로 드러난 예라 할 수 있다.
2013년에는 넥센 마무리 손승락이 골든글러브의 주인공이었다. 당시 구원왕이었던 손승락은 사이영 프리딕터 점수에서 여타 선발 투수들보다 높은 점수를 얻어 수상 자격이 충분했다. 하지만 당시 최고 점수의 주인공은 손승락이 아닌 LG 봉중근이었다. 봉중근은 그해 손승락보다 위력적인 공을 뿌렸지만 타이틀을 손에 쥐지 못해 아쉬움을 삼켜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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