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대의 이제는 품격>향 피울때 흰장갑도 벗어야
새해에는 1인당 국민소득 3만 불을 달성할 수 있을까? 일본은 1987년 1인당 소득 2만 달러를 넘은 뒤 5년 만에 3만 달러를 돌파했지만, 한국은 2006년에 2만 달러를 돌파한 이래 10년째 머물고 있다. 우리는 왜 3만 불을 넘어서지 못할까? 좀 늦어지고는 있지만 언젠가는 3만 불을 넘어설 수 있을까? 혹여 이대로 주저앉거나 추락하는 건 아닐까?
구태의연으론 창조경제 못한다
언제나 그랬듯 이 나라 지도자들은 국립현충원 참배에서부터 한 해를 시작한다. 그저 당연한 관행이려니 하고 시민들도 그에 대해 별 관심도 없지만, 이왕 눈 씻고 새로운 시각으로 보면 ‘시어족하(始於足下)’, 그 첫걸음에서 한 해를 예감할 수도 있다.
제일 먼저 박근혜 대통령이 국무위원 등을 대동하고 무명용사기념탑에 헌화하고 참배하였다. 역시나 흰 꽃 화환이다. 필자가 그동안 수도 없이 지적한 대로 흰 꽃은 무고한(inocent) 희생자에게 바치는 것으로 순결, 순종, 체념, 항복의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조국을 위해 목숨 바친 용사들에게 흰 꽃을 바치는 건 모욕이다.
현충원은 전몰용사의 원혼을 달래는 곳이 아니라, 그들의 고귀한 희생을 기억(memorial)하기 위해 만든 곳이다. 하여 전 세계 모든 나라에서 무명용사묘에는 붉은 꽃 바친다. 훈장이 용감함에 대한 ‘기억의 징표’라면 붉은 꽃은 용사들이 흘린 붉은 피를 ‘기억하고 있음의 징표’이다. 그에 비하면 흰 꽃은 ‘망각의 징표’인 셈이니 굳이 현충원을 세울 이유도 찾을 이유도 없겠다.
게다가 화환 밑에 ‘대통령 박근혜’라고 크게 쓴 이름표를 달았는데, 이는 인격보다 물격을 중시하는 전근대적인 후진국적 관습이라 하겠다. 본인이 직접 들고 와 바치는데 굳이 이름표를 단다는 것도 우습고, 국민의 대표로서 헌화한 것이지 대통령이 개인 자격으로 바친 것이 아니지 않은가?
다음, 전체적으로 헌화하는 사진이 너저분하다. 왜 그럴까? 우선 붉은 카펫이 거슬린다. 굳이 이런 데까지 카펫을 까는 것 역시 후진국적 권위주의적 발상이라 하겠다. 누구를 위해 카펫을 까는가? 대통령에 대한 의전? 아니다. 카펫은 귀빈을 위한 것이다. 이곳에서 대한민국 대통령은 주인이지 귀빈이 아니다. 그러니까 주인이 자기를 위해 카펫을 깐 셈이 된다. 또 잡인의 접근을 막으려 세워둔 금줄 펜스도 지저분한 사진을 남기는 데 크게 일조하고 있다. 그걸 무슨 장식쯤으로 여기는 모양인데 아예 치웠어야 했다.
셔터를 눌러대는 카메라맨 역시 사진을 망치고 있다. 분명 이쪽에도 카메라맨들이 있었을 것이니 서로를 마주보고 총을 쏘아대는 꼴이다. 경호원과 의장병 역시 카메라 앵글 밖으로 물러서 지켰어야 했다. 포토존에 대한 개념 부재한 탓이겠다. 선진시민들이 보기엔 한국은 아직 사진 한 장 제대로 찍을 줄도 모르는 나라다.
‘창조경제’ 이전에 ‘품격경영’부터!
어느 정권에서나 ‘소통 부재’를 탓하지 않은 적이 없지만, 정작 그런 불평을 하는 사람조차 소통의 의미를 잘 모르고 있다. 한국인들에게 소통이란 곧 당사자 간의 직접적인 대화이다. 간접적이고 은유적인 소통법이 있으며, 글로벌 비즈니스 무대에선 그것이 더 효과적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이미지로 소통하는 건 선진사회에서 일상화 된 일, 대표적인 예가 버락 오바마 미국대통령이다. 그의 연설은 철저하게 사전 세팅된 이미지 연출로 소통을 극대화시킨다.
언제나 그랬듯이 박근혜 대통령의 참배 복장도 문제다. 맨살 스타킹 대신 검정 양말을 신었어야 했다. 바지를 입으면 남성과 동일하게 양말을 신어주는 것이 글로벌 정격이다. 여성이니까 맨살 스타킹을 싣는 것이 당연? 이는 한국 여성 모두가 잘못 알고 있다. 물론 이를 지키지 않는 외국 여성들도 적지 않다. 박 대통령의 패션 모델폼인 메르켈 독일 총리는 언제나 검정 바지에 검정 양말을 신고 있다.
게다가 한국인들은 가끔 이상한 데서 청결을 고집하는 경우가 있다. 박 대통령이 참배할 때 흰 장갑을 끼고 있다. 향 사르는 것이 비위생적이거나 힘을 써야하는 일인가? 아니면 향이 화약 성분이라서 만지면 안 되는 건가? 그렇다면 아랫사람에게 시킬 일이지 직접 향을 집을 일이 아니지 않은가?
설마 VVIP에 대한 예우로 흰 장갑을 낀 것이 아니라면, 근조용 위생마스크처럼 벗어 버리는 것이 오히려 보다 인격적인 매너라 하겠다. 꽃을 바쳤으면 굳이 향을 사르지 않아도 무방한 일. 그리고 묵념할 때 두 손을 그대로 쭉 내리고 있다. 유독 일본인과 한국인들이 그렇게 하고 있는데, 자칫 글로벌 사회에서 무신론자로 취급당할 수 있다. 아래에서 두 손을 모아야 한다.
박 대통령의 방명록 글씨는 싸구려 필기구란 점을 제외하곤 언제나처럼 단정하고 균형 잡히게 썼다. 다만 민원서식 작성하듯 쓴 ‘2016.1.1.’이 흠이다. ‘2016년 1월 1일’이어야 정품격이다. 그에 비해 얼마 후 참배한 정의화 국회의장이 방명록에 남긴 글은 차마 눈뜨고 못 볼 수준이다. 차라리 쓰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그동안 해외를 다니면서 국격 디스카운트에 크게 일조했을 것 같다. 그만한 직분이라면 고급한 자기만의 필기구로 평소에 연습이 되어 있어야 했다.
“너절한 것을 막는 둑을 쌓아야 한다.”
19세기 프랑스 작가 귀스타브 플로베르가 한 말이다. 매너에 대한 필자의 지적에 대해 “아무렴 어때, 참배했으면 된 거지?” “뭐 그 딴 게 그리 중요하다고 정초부터 트집?”이냐고 필자를 나무랄 수도 있겠다. 하지만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했다. 글로벌 무대에서 최고지도자의 2% 부족은 치명적이다. 선진주류사회 오피니언들이라면 대통령의 참배 사진 한 장만 보고도 국격의 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
‘메이드인코리아’가 품질에 비해 제값을 못 받는 이유, 명품 소비대국이면서 명품을 못 만드는 이유, 세계 10위권 안에 드는 무역대국이면서도 개인국민소득 3만 불을 못 넘는 이유, ‘창조경제’를 아무리 외쳐도 창조경제가 안 되는 이유, ‘통일대박’을 외쳐도 통일이 안 되는 이유, 청년 일자리를 만든다며 아무리 쫓아다녀도 일자리가 늘기는커녕 줄어들기만 하는 이유가 어쩌면 이 품격 낮음, 2% 부족에 있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참배 때마다 우루루 떼 지어 몰려가는 것도 전형적인 후진적 구태! 국무위원들이 다들 그렇게 한가한가? 대통령만 대표로 참배하고, 다른 이들은 차라리 그 시간에 각자 사무실에서 차분히 국정운영을 구상하거나 각오를 다질 일이다. 정히 참배를 하겠다면 각자 따로 찾을 일. 지난 날 아웅산 테러 참사에서 아무런 교훈도 못 얻은 모양이다.
비단 이날 참배만의 문제가 아니다. 평소 대통령의 해외순방 때 공항에 우루루 마중 나가는 것도 이제는 좀 지향했으면 싶다. 여타 기관장은 물론 대기업 회장의 출입국 때나 출퇴근 때 입구에 주요 인사나 직원들이 도열하는 진풍경도 없어져야겠다. 귀빈 맞이 의전도 아닌 저들끼리 병정놀이? 갑(甲)질놀이? 봉건적인 전통에서 남은 구태인지 아니면 일본 조폭에게서 배운 악습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참 보기 딱하다.
품격은 디테일에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4일 오후 청와대 영빈관에서 입법·사법·행정부 주요 공직자와 여당 대표 등 2백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신년인사회’를 가졌다. 한데 연단 뒤 스크린 그림이 참 황당하다. 새해라 하여 해를 그린 모양인데 이는 누가 봐도 일장기다. 그리고 그 아래에 태극기와 청와대기를 세워 두었다. 콜라(국산음료?)잔 건배도 초라하기 짝이 없고, 설마 그곳에 참석한 사람이라면 못 알아볼 리 없는 인사들이 이름표를 달고 있는 모습 또한 너절하고 우습다.
청와대에 더블 체크 기능이 부재함을 보여주는 대형 사고다. 하긴 청와대 내에 품격에 대한 안목을 지닌 사람이 없다면 백번을 체크 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그리고 한국인들은 무슨 행사를 할 때마다 초등학교 학예회 하듯 너절하게 써서 내 걸기를 좋아하는데, 이는 유치하고 촌스런 후진적 겉치레의 전형이라 할 수 있겠다.
한국인이 모든 분야에서 설계능력이 떨어지는 사실(원인까지)을 이처럼 사진 한 장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2조 5천억 원짜리 인천대교 건설비 절반은 영국의 설계회사가 가져가고, 조선 3사가 해양플랜트 쪽으로 눈을 돌렸다가 10조원을 넘는 적자를 내고 허덕이는 것도 그 때문이다.
개별 물건을 디자인 하는 것만 디자인이 아니다. 디자인을 디자인할 줄 아는 폭넓은 안목을 기르지 못하면 이젠 땀값조차 건지기 어렵다. 디테일이 경쟁력이다. 아무리 성능 좋은 제품도 마무리에 티끌 하나만 있어도 제 값 못 받는다. 디테일하지 못하면 품격이 안 나오고, 부가가치를 높이지 못한다는 말이다. 논리적으로 성립이 안 되는 ‘창조경제’를 부르짖는 이유도 기실 한국인들이 그만큼 창조적이질 못하다는 반증이겠다.
변화를 이끌려면 대통령은 물론 시민 개개인이 달라져야 한다. 세계 속의 코리아를 외치기 전에 자신부터 살필 일이다. 한국을 알리려 안달하지 말고 한국을 알고 싶어 안달하게 만들어야 한다. 품격을 갖추면 그렇게 된다. “God is in the details!” 디테일이 곧 문화다.
대한민국은 실패다
일찍이 야스퍼스가 말한 ‘한계상황(grenzsituation)’이 바로 작금의 대한민국이 처한 위기다. 글로벌 무대에서의 즉각적인 소통매너, 예절과 규범을 재창조하지 않으면 이 수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 다소 ‘불편한 지혜’를 소화하지 못하면 아무리 공부를 더 하고 일을 더 해도 3만 불을 넘어서기 어렵고, 설사 넘어선다한들 결코 행복하지 않을 것이다.
필자가 새해 벽두부터 그윽한 고담준론이 아닌 이 측은한 담론을 고집하는 건 ‘우표수집가의 열정’도 ‘변태적인 긍지’도 아니다. 형식주의를 반대하는, 글로벌 매너에 낯선 사람들에게 위선적 내지는 또 다른 사대주의 신봉자라고 비난받을 위험성을 모르는 바도 아니다. 그렇다 해도 시각과 생각이 다를 뿐, 다 각자가 애국하는 방법일 것이다.
“Less is more!” 품격의 시작이자 끝이다. 품격이 곧 날개다. 애벌레가 금선탈각(金蟬脫殼)하기 위해서는 티끌 한 점 더해서도 덜해서도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검토 없이 물려받은 모든 것들에 대한 반성적 성찰을 통해 너절한 편견과 관습부터 떨쳐내야 한다. 대한민국,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글/신성대 도서출판 동문선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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