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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심 정책에 매번 홀리는 투표자는 무죄인가


입력 2016.04.11 05:22 수정 2016.04.11 05:22        데스크 (desk@dailian.co.kr)

<자유경제스쿨>총선 앞두고 정치의 본령을 다시 생각한다

제20대 국회의원 총선거의 사전투표가 시작된 8일 광주시 북구청에 마련된 사전투표소에서 유권자들이 사전투표를 통해 소중한 권리를 행사 하고 있다. ⓒ데일리안 박항구 기자

선거 때가 되면 투표자의 가치는 폭등한다. 대중 민주주의의 신(神)인 투표자는 합리적 주체라고 신봉되고, 이는 정치인도 본질적으로 경제인(homo economicus)이라는 전제 하에 정치제도를 분석해온 공공선택론에서도 마찬가지다.

투표라는 정치 행위에서 합리적 개인은 대안(정당, 후보자 및 공약)에 대한 정보를 정확히 평가하고 그것이 초래할 편익과 손실을 형량하여 합리적 대안만을 선택을 한다는 것이다. 투표에 소요되는 비용보다 편익이 낮을 경우에는 차라리 투표에 참가하지 않는 것이 더 합리적 선택으로 간주된다. 투표자 개인의 관점에서 볼 때, 투표 행위 참가로 얻을 이득은 그 투표 비용보다 적다고 본 고든 털럭(G. Tullock)이 생전에 투표에 거의 참가하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이다.

합리적 투표자는 후보자에 대한 정보가 부족한 경우에도 정보 취득에 드는 비용이 추가적 정보가 줄 이득보다 더 크다면 차라리 정보를 취득하지 않는 편을 선택한다. 이것이 공공선택론의 초기 연구자인 다운즈(A. Downs)가 세운 투표자의 ‘합리적 무시(rational ignorance)’론의 요체이다. 전통적 정치이론이 투표 불참 및 정보의 무지를 민주정치의 실패로 간주한 반면에, 공공선택론은 오히려 투표자의 합리적 선택의 모범적 예로 인용해 왔다. 투표자가 합리적으로 행동한다는 가정은 흔들릴 수 없는 대 원칙으로 신봉되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 간명한 원칙대로 우리의 현실 투표자들을 보면 엄청난 괴리에 직면한다. 선거를 앞두고 정당들이 급조해 던지는 거대한 선심 정책들의 본질은 가격통제, 경제규제, 재분배정책, 특혜배분의 심화이다. 그것이 우리 사회에 어떤 나쁜 결과를 초래할지는 조금만 주의 깊게 판단하면 알 수 있다. 그러나 결국 대개의 투표자들은 사회에 나쁜 대안들에 표를 던져 왔다. 합리적 투표자라면 어떻게 선거에서 이러한 대안을 선택한단 말인가!

몰라서 그런 짓을 한다는 ‘합리적 무시’로는 그 설명이 불가능하고 결국 캐플란(B. Caplan)이 지적한 대로 ‘투표자들은 불합리(voters are irrational)’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투표자는 정보에 무지할 뿐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정보의 존재 여부와는 상관없이 불합리한 것이다. 투표자의 불합리성 명제의 핵심은 이들이 투표에서 체계적으로 편향된 선택을 하게 만드는 일종의 세계관으로서의 고착된 믿음 체계에 매여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민주주의 선거가 오히려 반(反)사회적 후보와 정책을 양산하는 도구가 되어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주인인 투표자란 불합리한 주체일 뿐이란 점을 까발리는 것은 투표자를 신(神)으로 섬기는 여야 정당뿐만 아니라 민주주의를 가장 바람직한 정치체제로 옹호해 온 지식 세계가 쉽게 인정할만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총선 앞에서 한번쯤 이런 금기어를 거론할 필요가 있다. 캐플란에 의하면 투표자들이 불합리한 선택을 하게 만드는 체계적 편견(systematic bias)에 매여 있는데 그 예는 시장의 가치를 불신하는 반(反)시장 편견(anti-market bias), 외국과의 교역의 가치를 과소평가하는 반(反)외국 편견(anti-foreign bias), 경제적 번영을 생산이 아니라 ‘고용’과 동일시하려는 일자리 만들기(make-work) 편견, 경제 여건이 더 나빠질 것으로 보는 비관주의(pessimistic) 편견 등이다.

그런데 4.13 총선에 직면한 한국의 현실 투표자들은 여전히 강력한 힘으로 복류하고 있는 지역주의, 헬조선 및 흙수저론이 상징하는 자기 비하, 부자는 악이요 빈자는 선이라는 괴이한 도덕적 카스트(caste)의 편견을 추가하고 있다.

시장에서는 개인은 여러 제품에 표를 던져 자신이 원하는 재화를 구입한다. 불합리한 선택으로 나타난 잘못된 결과에 대해서는 대가를 치른다. 개인의 이익에는 합리적이나 그것이 사회 전체에 나쁜 영향을 주는 선택을 할 수도 있는데 공장주가 폐수를 강에 버리는 것이 그 예이다. 이 경우 그에게 책임을 부과하여 강물의 오염을 막으려는 기제가 대두된다. 그러나 민주주의에서는 전혀 다르다. 우선, 민주주의는 표(화폐)를 던져 재화를 구입하는 시장이 아니라 일종의 공유자원(commons)일 뿐이다.

즉 개인은 개별 투표를 던져 후보 및 정책대안을 구입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표를 선거라는 공유자원의 풀(pool)에 던져 넣는다. 투표자가 얻는 사회적 결과는 바로 그가 던져 넣은 개별 표의 산물이 아니라 ‘모든’ 표들 집합의 평균 수준에 좌우된다. 따라서 시장에서와는 달리 투표자는 자신의 한 표가 초래할 사회 전체의 결과에 대해 예민하게 고려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투표에서 그는 자신이 강력하게 옹호하는 개인적인 그릇된 편견들을 충족하려는 불합리한 선택을 시도한다. 시장에서 개인만을 고려한 잘못된 선택, 이를테면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폐수를 무단 방류하는 행위는 이웃에게 잘 식별됨에 비하여, 선거에서 한 투표자만의 불합리한 선택 결과는 남에게 잘 식별되지도 않는다.

어느 후보가 공약으로 제시한 WTA 체결이 이뤄지면 사회에 더 바람직함은 알지만 그게 내 한 표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이상, 차라리 나는 사회적 후생보다는 내가 가진 반(反)외국인 편견이라는 개인적 증오심을 충족할 기회로 삼아 그 후보에 반대표를 던진다. 전술한 시장 기제 속 강물 오염 행위는 눈에 잘 띄는 물리적 오염 행위지만, 사회전체 후생을 내 팽개치고 개인의 사적 증오심을 충족시키려는 이러한 행위는 눈에 잘 띄지 않는 정신적 오염 행위다. 즉 개개 투표자의 그릇된 편견에 의한 투표 행위가 사회 전체에 악영향을 초래할지라도 그에 대한 나 개인의 책임은 외부에 잘 식별되지 않는다.

시장에서 개인이 불합리한 행동을 한다면 그에 상응하는 불이익을 받게 된다. 온라인 거래의 보안 상태를 잘 살펴보지 않았다면 손실을 입는 것은 당연하다. 인간이 선택(소비)하는 ‘불합리성’ 역시 일종의 재화로 간주하면 여느 수요곡선처럼 불합리성의 가격이 올라가면 그에 대한 수요량이 감소하므로 개인으로 하여금 합리적으로 선택하게 만드는 유인이 존재한다. 그러나 투표라는 정치행위에서는 투표자로 하여금 불합리성을 피하고 합리적으로 투표하도록 만드는 유인이 없다. 이 때문에 ‘합리적으로 투표하지 않으면 당신은 나쁜 정책을 얻을 것’이라는 말은 위협이 되지 못한다.

민주주의 선거 제도 하에서 투표자는 아무런 비용 부담 없이 자신이 신봉하는 편견들의 심리적 소비 편익을 누릴 수 있다. 즉 내가 가진 지역주의 정서, 부자에 대한 증오, 반(反)시장주의, 자기 비하와 같은 편견을 구사함에 따른 심리적 이득은 과도하게 강조하되 이런 식의 투표가 국민 전체에 대해 미칠 경제적 손실을 과소하게 추정하는 불합리성을 쉽게 자행할 수 있다. 이 때문에 과반수가 사회적으로 철저히 불합리한 정책 및 후보를 선택하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다.

대북정책, 복지의 범위, 경제규제, 경제민주화의 강도에 관한 정책 내용이 정당에 따라 판이하건만 우리의 경우 영호남 ‘지역’에 따라 그에 대한 투표자의 선호가 정확히 양분된다는 것은 여전히 출신 지역이라는 사라지기 힘든 체계적 미신이 작동하고 있다는 것 외에 다른 해석이 없다. 나의 ‘출신 지역’ 가치를 지킴에 따른 자족감이 나머지 손실을 상쇄하고도 남는다. 이 투표 결과가 바로 지역 몰표이다. 반(反)시장주의 편견의 소비도 유사하다. 자칫 부자들에게 이익을 줄만한 상황에서 징벌적 성격의 높은 세율로 이를 저지하는 정책에 표를 던지고 나서 느끼는 심리적 통쾌함은 그로 인해 결국 투자 위축 및 기업이 그 지역에서 퇴장한다는 사회 손실쯤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느끼게 해준다.

경제가 성장하더라도 일자리가 늘어나지 않은 이상, 그건 성장이 아니라 경제정책 실패라고 그 정부에 반대표를 던짐으로써 내가 충족하려는 것은 ‘일자리 만들기’ 편견인 것이다. 이명박 정부 때의 광우병 파동 현장의 잠재적 투표자들이 갈구하는 것은 결코 ‘바른 정보’가 아니다. 친기업, 친시장, 친개방주의 옹호자로 알려진 정치지도자에 대한 반대 표명을 통해 자신이 가진 반(反)시장주의 편견, 반(反)외국적 편견을 소비하는 행위를 통해 얻는 개개인의 심리적 만족인 것이다.

이러한 미신적 믿음들은 후보자의 대안을 평가한 후에 그로부터 확립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어떤 과정에 의해서건 이미 투표자의 의식 속에 선험적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 투표자에게 바른 정보를 많이 주면 좋은 후보자나 정책이 선정될 것이란 공민 교과서 및 정치학의 처방은 잘못된 것이다. 우리가 보는 현실 투표자는 대안을 보고 그에 대한 찬반 판단을 내리는 것(Seeing is believing)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선험적으로 확립한 이 편견에 토대하여 사실 하나하나를 재평가(Believing is seeing)할 뿐이다.

그래서 좌파인 내가 증오하는 친기업적 정당이 공약으로 내건 이상, 설령 그 속에 내게 경제적 이득을 줄 좌파적 정책이 포함되어 있더라도 그에 대해 확실히 반대할 이유를 발굴해 낸다. 또 나 같은 빈곤 계층을 대변한다고 믿는 정당이 내놓은 정책인 이상, 내게 다소의 불이익이 오는 친기업적 정책에 대해서도 그것을 지지할 논거를 쉽게 고안하고 이에 표를 던진다. 그때 투표자는 ‘나는 OOO당과 동일체’라는 신앙을 지킴에 대한 감격이란 심리적 편익을 누리는 것이다. ‘합리적 투표자’와는 전혀 안 맞는 이것이 불합리한 투표자이다.

현실의 투표자의 진정한 실체는 투표자의 의식 속에 똬리를 틀고 기표자의 손가락을 움직이는 이러한 미신 체계이다. 따라서 이런 불합리한 투표자가 지배하는 선거는 사실과 사실의 대결이 아니라 믿음과 믿음의 대결로 환원되고 그 경쟁은 종교전쟁에 유사한 근본주의 성격을 띤다. 이런 투표자들이 주도하는 정치 상황이 올바른 민주주의일리 없고 거기서 선정된 정책대안이 사회후생 증진에 부합할 리 없다.

우리는 지금까지는 자유의 적은 자유를 갈망하는 합리적 개인을 억압하고 그 선호를 왜곡하는 정치인쯤이라고 착각해 왔지 않았던가. 그러나 어느 반민주적 독재자가 민의를 떠나 오늘의 레비아땅, 보호주의, 재분배주의, 특혜주의를 양산한 게 아니다. 바로 이러한 불합리한 의식에 사로잡힌 ‘투표자’의 선택에 따라 이렇게 전개되어 온 것이다. 지역주의, 다다익선에 환호하는 복지, 인상할수록 환호하는 최저임금, 보육은 이미 국가의 몫이라고 굳게 믿게 된 부모들....

사실 자유주의 및 공공선택론이 지금까지 한껏 욕을 퍼부어 댄 천박한 포퓰리스트 ‘정치인’들이란 정확히는 이러한 불합리한 투표자들의 하수인일 뿐이다. 이런 불합리하기 짝이 없는 유권자가 쥔 표에 매여 정치인 역시 그토록 천박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고 정치 실패의 진범은 정치인이 아니라 투표자인 것이다. 영화 ‘스타워즈’ 속 악의 화신 ‘다스 베이더’의 유언은 이제 불합리한 투표자가 오늘날의 타락한 정치인에 던지는 고백에 정확히 해당된다: 내가 네 아비이다(I’m your father).

민주주의의 신으로 자처해 온 투표자(voters)야말로 우리 사회 몰락의 주범이란 점은 대중 민주주의에 대한 가장 결정적 타격이 될 것이다. 동시에 그에 대한 처방은 정치인이 주범인 경우보다 훨씬 더 어려울 것이란 절망을 준다. 4.13 총선은 우리가 직면한 선거는 투표자의 합리성이 아니라 어리석음이 주인 노릇을 하는 이벤트다. 그 어리석음이 이번에는 어떤 미신에 잡혀 어떤 괴이한 선택을 할지 또 숨죽이며 지켜보아야한다. 투표자 의식 근저를 장악하고 있는 이런 미신적 가치를 자유로 이식하고 대체하는 획기적 계몽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자유주의자들의 책무라고 말한다면 이미 도처에서 좌파 및 정치인들과 힘들게 싸워오고 있는 자유주의자들의 어깨는 또다시 무거워진다.

글/김행범 부산대 교수

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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