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재현의 장편 데뷔작 '나홀로 휴가'에 출연한 박혁권은 "조재현 선배 믿고 영화에 출연했다"고 밝혔다.ⓒ데일리안 홍효식 기자
유부남 강재(박혁권)는 요가강사 시연(윤주)에게 미쳐 10년 동안 그녀의 곁을 맴돈다.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사진으로 찍고, 급기야는 집에 찾아간다. 강재의 아내는 남편의 불륜 사실을 알고도 모른 척한다. 영화는 말한다. 이 남자의 '10년'은 행복이라고.
여성의 입장에서 보면 '나홀로 휴가'(감독 조재현)는 상당히 불편하다. 남성의 시각으로 바라본 영화는 지극히 현실적인 결혼생활의 민낯과 인간의 욕망을 들춰낸다. 영화를 보고 궁금한 점이 많았다. 강재가 불륜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 강재가 아내에게 소홀해진 이유 등이 영화에 나오지 않아서다.
강재로 분한 박혁권(45)을 7일 서울 동숭동 수현재씨어터에서 만났다. 머리가 긴 모습으로 나타난 박혁권은 "유부남인 강재가 갑자기 찾아온 사랑에 미친 듯 빠질 수 있을까 고민했다"며 "금기된 사랑이라 강재에겐 더 절실할 수 있겠구나 싶었다"고 밝혔다.
배우 조재현이 각본과 연출을 맡은 '나홀로 휴가'는 10년을 하루같이 옛사랑을 쫓아온 한 남자의 지긋지긋한 사랑과 지고지순한 집착에 관한 스토킹 멜로다. 조재현과 박혁권은 SBS 드라마 '펀치'(2014~2015)를 통해 인연을 맺었다.
원래 조재현이 주연으로 나설 계획이었지만, 박혁권의 매력에 이끌린 조재현이 박혁권을 선택했다. 조재현은 8시간 만에 시나리오를 써서 박혁권에게 대본을 보냈다고.
박혁권은 "조재현 선배를 믿고 출연했다"며 "선배의 부름을 받고 영화에 출연했지만 내 능력 이상으로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은 느끼지 않았다. 배우 입장에 서서 연출하는 감독님 덕분에 편하게 연기할 수 있었다"고 조재현에게 고마움을 드러냈다.
조재현 연출, 박혁권 주연의 '나홀로 휴가'는 10년을 하루같이 옛사랑을 쫓아온 한 남자의 지긋지긋한 사랑과 지고지순한 집착에 관한 스토킹 멜로다.ⓒ(주)수현재엔터테인먼트
불륜에 빠진 유부남의 이야기는 여성 관객들 사이에서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부분이다. 남자는 행복이라고 하지만, 여자 입장에선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박혁권은 "여성 관객들에겐 '강추'하고 싶은 영화는 아니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집착과 불륜도 사랑의 한 갈래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미움은 아니잖아요. '사랑'을 하는데 '바람직함'을 따질 수 있나요?"
박혁권은 시사회 때 불륜의 미덕이 있다고 했다. 어떤 의미에서 그런 말을 했느냐고 물었다. "영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에서 바람 피우는 유부남 역할을 한 적 있어요. 그때 불륜의 장·단점을 생각해 본 적 있어요. 장점은 목표가 명확한 지점이죠. '둘만 좋자'는 거. 단점은 주변 사람들이 괴로워진다는 거죠. 바람을 피울 땐 걸리지 말아야 합니다."
다소 파격적인 발언을 한 그에게 만약 "아내가 바람을 피웠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날아왔다. "웃으면서 안녕할 것"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래, 날 사랑하긴 한 거니?'라며 울고불고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겠어요. 이미 깨진 관계인데."
강재와 아내의 관계에 대해서도 궁금했다. 아내와 자식에게 심드렁한 가장으로 나오는데 불륜에 빠져서 그런 건지, 아니면 이전부터 그런 건지 물었다.
"드라마나 영화 보면 화목만 가족이 주로 나오잖아요. 너무 비현실적이지 않나요? 가족끼리 챙겨 주고, 다정다감하게 지내는 게 현실에서도 그런가요? 보통 서로 '틱틱'대면서 무시하잖아요. 그래서 자상하지 않은 강재의 모습을 이해했죠. 바람을 피우는 강재가 가족에게 미안한 마음에 더 살갑게 대하면 바람피우는 게 걸릴 것 같았어요. 오히려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한 겁니다."
실제로 결혼을 한다면 어떤 가족상을 원하느냐고 물었더니 "아내, 자식과 친구처럼 지냈으면 한다"며 "특히 자식은 하나의 독립체라고 생각할 듯하다"고 말했다.
영화 '나홀로 휴가'에 출연한 박혁권은 "집착도 사랑의 한 갈래라고 생각한다"고 전했다.ⓒ데일리안 홍효식 기자
만약 강재와 시연이 계속 만났다면 강재는 이혼했을까, 아니면 계속 불륜을 저질렀을까. 잠시 생각에 잠긴 박혁권은 한숨을 내쉰 후 답변을 내놨다. "가정을 깰 정도로 자기 주도적인 사람은 아닙니다. 혼자 속으로 삭이고, 몰래 훔쳐보는 소심한 사람이죠. 시연을 만나면서도 '이러면 안 되는데 어떡하지'라는 심정인 거죠. 강재의 입장에서 보면 슬픈 영화입니다."
시연의 이별에도 강재는 시연을 잊지 못한 채 무려 10년 동안 그녀를 훔쳐본다. 영화 속 강재의 행동은 '미친 짓'이나 다름없다.
이와 관련해 박혁권은 "10년 동안 집착하는 건 불가능"이라며 "아무리 집착해도 10년이라는 시간은 무리"라고 강조했다. "10년 동안 에너지를 쏟아붓는 건 건강을 해치는 지름길입니다. 허허. 누군가를 10년 동안 좋아한 적은 없어요. 부부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사랑으로 계속 사는 건 아닌 듯합니다."
박혁권은 한 남자가 여자에게 이렇게까지 빠질 수 있을까 고민했단다. 소름 돋는 범죄 행위처럼 보일 수 있다고 하자 그는 강재가 시연이를 훔쳐보는 건 '버릇'이자, '습관'이라고 해석했다. 훔쳐보기가 일상적인 일이 됐다는 거다.
그러면서 "사람을 좋아하는 감정은 10년 동안 지속되지 않는다"고 자신만의 사랑관을 말한 뒤 "그렇게 오랫동안 사랑하면 빨리 죽는다"라는 엉뚱한 답을 내놓으며 웃었다.
미혼인 터라 이 영화를 찍으면서 결혼에 대한 생각도 했을 듯하지만 자신 없단다. "누군가와의 관계를 오랫동안 유지하려면 상대방이 좋아하는 것을 하려는 것보다 싫어하는 행동을 하지 않는 게 더 중요해요. 결혼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요. 인간이 덜된 거죠. 하하. 만약 제가 결혼을 했더라면 캐릭터를 더 잘 이해하고, 표현할 수 있었을 겁니다. 경험이 없어서 조재현 선배의 도움을 많이 받았죠."
영화 '나홀로 휴가'에서 유부남 강재로 분한 박혁권은 "결혼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며 "성향이 다른 사람들은 따로 사는 게 낫다"고 털어놨다.ⓒ데일리안 홍효식 기자
극 중 강재의 친구 영찬(이준혁)은 부부가 10년간 의무적으로 살고, 5년 단위 재계약 형식으로 결혼제도의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박혁권은 "각기 다른 성향의 사람들에게서 나온 생각"이라며 "성향이 다른 사람들한테는 따로 사는 게 나을 듯하다. 정성 들여 만든 찌개도 짜다"며 결혼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영화는 강재가 시연의 집 장롱 안, 과거, 현재를 교차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혼란스럽게 다가오는 부분이다. 박혁권은 "불친절한 부분이 있는 건 인정한다"며 "시간이 없어서 후반부 편집을 못 했다"고 털어놨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강재가 시연이 사는 집을 서성거리는 장면이다. 시연의 아파트 복도를 지나가면서 시연이 있나 없나 확인하는 부분으로 강재의 집착이 엿보인다. 배우는 "긴 장면인데 긴장감 있게 표현됐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1993년 극단 산울림으로 데뷔한 박혁권은 이듬해 서울예대 연극과에 입학했고, 이후 극단 학전의 록뮤지컬 '지하철 1호선' 등 다수의 연극과 뮤지컬에 출연하며 연기력을 쌓았다. '시실리 2Km'(2004), '야수'(2006), '하얀거탑'(2007), '도약선생'(2011), '아내의 자격'(2012), '밀회'(2014), '펀치', '육룡이 나르샤'(2015) 등 총 70여편이 넘는 작품에 주·조연·주연 가릴 것 없이 출연했다.
특히 최근 왕성하게 활동했다. '펀치', '육룡이 나르샤' 등 1년 6개월 동안 빠듯한 드라마 스케줄을 소화했다. 지친 나머지 올여름엔 아무것도 안했단다. 머리도 일부러 기른 게 아니라, 귀찮아서 그냥 뒀더니 길게 자란 거란다. "여름에 일 안 하길 잘 했어요. 너무 더웠잖아요. 촬영하는 팀 보면 '고생하겠구나' 싶었죠."
지난해 정우성의 실물을 보고 너무 잘생겨서 깜짝 놀랐다는 그는 "난 배우치고는 잘 생긴 스타일은 아니다"라며 "묻히는 외모인 게 스트레스인 적도 있었다"고 했다.
배우 박혁권은 영화 '나홀로 휴가'는 10년 동안 한 여자의 곁을 맴돈 유부남 강재 역을 맡았다.ⓒ(주)수현재엔터테인먼트
작품마다 다른 색깔을 내는 비결을 묻자 "연기를 일부러 다르게 한 적은 없다. 대본에 충실하게 연기한 것뿐"이라며 겸손한 태도를 보였다.
그는 독립영화, 상업영화, 드라마를 오가며 활동 중이기도 하다. "드라마는 너무 정신없더라고요. 무언가를 쳐내는 작업이 드라마라면 영화는 쌓는 작업입니다. 드라마와 영화의 중간 지점이 저한테 맞는 듯해요. 그런 의미에서 이번 '나홀로 휴가'는 저한테 맞았어요. 영화인데 딱 20회차 찍었거든요. 정신없이 바쁘지도 않았고, 늘어지는 부분도 없고."
박혁권은 아직도 017로 시작하는 2G 휴대폰을 쓴다. 요금제는 1만1000원짜리란다. 기자들이 웃자 그는 "스마트폰으로 쓸 필요성을 못 느낀다"며 "끝까지 써보고 싶다"며 강한 집착을 보였다. 그러면서 휴대폰과 관련된 웃긴 에피소드를 늘어놨다.
"카카오톡이 안 되니까 주변 사람들이 불편해해요. 모바일 청첩장도 안 열리고. 하하. 결혼식 시간, 장소를 문자로 보내주라고 합니다. 사진 찍는 것도 안 좋아하고요. 지인의 스마트폰을 빌려 인터넷 검색을 하곤 하죠. 한 번은 예전 매니저 스마트폰을 빌려서 검색했는데 매니저가 '매니저 비전'이라는 단어를 검색했더라고요. 결국 그 친구는 그만뒀습니다(웃음)."
매니저 비전도 나왔겠다, 박혁권이 생각하는 배우의 비전이 궁금해졌다. "'다시 태어나도 배우를 할까?'라는 생각을 했을 때 제 대답은 '예스'입니다. 연극부터 시작해서 드라마, 영화 등 다양한 장르를 경험하는 과정이 흥미로워요. 힘들 때도 있지만 저한테 도움되거든요. 대본과 캐릭터의 행동을 연기하는 게 재밌어요. 한 인물을 연기할 때 '이 사람은 왜 이렇게 행동했을까'라는 의문을 가지고, 공부하다 보면 생각의 폭이 넓어집니다."
연애는 하고 있느냐는 돌직구 질문을 던졌더니 "제가 알아서 하겠다"며 얼굴이 빨개졌다. 한 기자가 영화를 보고 '믿을 남자 없는 것 같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하자 박혁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남자를 믿으면 안 돼요. 적당히 믿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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