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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종선의 배우탐구⑲] 여자 배우 ‘나이 듦’의 정석, 페넬로페 크루즈


입력 2020.10.27 15:54 수정 2020.11.08 09:22        홍종선 대중문화전문기자 (dunastar@dailian.co.kr)


배우 페넬로페 크루즈. 영화 '내일의 안녕' 스틸컷 ⓒ㈜더쿱 제공 배우 페넬로페 크루즈. 영화 '내일의 안녕' 스틸컷 ⓒ㈜더쿱 제공

흔히, 배우는 이미지로 먹고산다고 한다. 한 번 박힌 이미지를 바꾼다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영화 ‘애마부인’(1982)의 주연배우 안소영은 여느 배우와 다름없이 연기에 대한 열정으로 배우의 길을 택했다. 배우에 대한 배려보다 영화 자체가 중요했던 과거 환경 속에서, 보호장치 없이 말갈기에 상처 입어 하혈해가며 ‘연기혼’을 불태웠건만 남은 건 ‘노출 배우’라는 이미지. 노출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출연해도 카메라가 돌아가면 말이 달라졌고, 모든 스태프가 기다리는 상황에서 배우 혼자 힘으로 버티기는 절대 쉽지 않다. 안소영 배우를 수년 전 만나 뵌 적이 있는데 적잖은 나이가 돼서도 자신의 연기를 봐 주지 않는 환경, 한 가지 이미지로만 기억되는 아쉬움이 이 나라를 떠나게 한 이유 중 큰 부분이었다고 토로했다. 그러니 영화 ‘미옥’(2017)에서 미옥(김혜수 분)과 상훈(이선균 분)이 어둠의 세계에서 커가는 모습을 모두 지켜보고, 어떠한 압박 속에서도 ‘비밀’을 지켰다가 언론을 통해 폭로하는 김 이사 역할이 그에게 얼마나 값진 의미일지 가늠이 된다.


포스터 ⓒ출처=네이버영화 '하몽하몽' 포스터 ⓒ출처=네이버영화 '하몽하몽'

가려지지 않는 미모를 지닌 페넬로페 크루즈는 10대 때부터 연기했다. 팝그룹 매키노의 뮤직비디오에 출연한 것을 시작으로 TV드라마의 단역과 조연을 맡았던 그는 불과 열여덟 나이에 영화 주연을 맡게 되는데, 그 유명한 ‘하몽하몽’(1992)이다. 모든 남자의 욕망 대상일 만큼 아름답고 관능적인 실비아 역을 맡아 안정적 연기력과 원숙미를 발산했다. 모든 빛엔 그림자가 있듯 페넬로페 크루즈는 ‘하몽하몽’이 트라우마로 남아 한동안 노출 연기에 대한 거부감을 가졌고, 미모로 각인된 바람에 진지한 배우로 평가하지 않는 대중의 눈을 견디며 오래도록 외로운 싸움을 했다.


다행인 건 ‘하몽하몽’의 연기를 눈여겨본 감독이 있었으니 페드로 알모도바르다. 페넬로페 크루즈 역시 가족과 둘러앉아 영화를 보며 자란 어린 시절, 알모도바르 감독의 영화를 좋아했다고. 알모도바르 감독과의 시작은 ‘라이프 플래쉬’(1997)였다. 버스 안에서 출산을 하는 젊은 여성 역할이었고, 출연 분량은 적었지만 인상적이다. 이후 감독의 ‘내 어머니의 모든 것’(1999)에서 임신한 수녀 로사를 설득력 있게 연기했는데, 정말이지 아름다웠다.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새로운 뮤즈가 탄생했다. 이 영화가 칸국제영화제 감독상뿐 아니라 아카데미와 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을 석권하면서 페넬로페 크루즈는 연기력을 인정받았고 할리우드 진출이 본격화됐다.


포스터 ⓒ출처=네이버영화 '오픈 유어 아이즈' 포스터 ⓒ출처=네이버영화 '오픈 유어 아이즈'

개인적으로는 스페인 혹은 유럽을 떠난 할리우드 영화 속 크루즈의 모습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드디어 미국영화 포스터에 본인의 얼굴을 대문짝만하게 드리운 ‘맛을 보여드립니다’(2000), 스페인에서 자신이 주연했던 영화 ‘오픈 유어 아이즈’(1997)가 할리우드에서 리메이크된 ‘바닐라 스카이’(2001) 등은 페넬로페 크루즈에게 세계적 유명세는 가져다주었을지 모르지만, 본인이 그토록 바라던 진지한 배우에서는 멀어진 느낌이 있다.


예상된 결과다. 할리우드가 어디인가, 그 배우가 가진 매력 중 최고의 상업적 매력을 쏙쏙 뽑아 재탕하는 곳이 아닌가. 모든 영화가 그랬던 것은 아님에도 할리우드 영화들을 통해 관능적 이미지는 강화됐다. 누구나 하는 연애건만 맷 데이먼, 톰 크루즈, 매튜 매커너히와의 연애도 섹시스타 이미지를 부추겼다.


동병상련, 엄마 라이문다(왼쪽)와 딸 파울라 ⓒ출처=네이버영화 '귀향' 동병상련, 엄마 라이문다(왼쪽)와 딸 파울라 ⓒ출처=네이버영화 '귀향'

또 다행인 건, 페넬로페 크루즈 자신이 그러한 지점에 대해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다. 유럽 영화나 작아도 예술적인 영화 출연을 의식적으로 늘렸고, 연기력을 과시했다. 고향인 스페인에서 고향과도 같은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과 재회한 ‘귀향’(2006)이 그러한 노력의 초반에 힘을 발휘했다.


크루즈는 이 영화에서 남편의 폭력과 가난 속에 내일이 보이지 않는 오늘을 억척스레 살아가는 라이문다를 열렬히 연기했다. 라이문다는 감춰둔 과거사로 어머니 이렌느와 관계가 틀어진 채 사별했는데, 딸에게 똑같은 아니 한층 더한 비극이 벌어져 삶의 벼랑 끝에 선다. 자신의 어머니와는 달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동생의 힘을 빌리고자 하는데 여동생 집에서 어머니의 기척을 느낀다. 죽었지만 살아있는 어머니 역은 알모도바르의 초창기 뮤즈 카르멘 미우라가 맡아, 두 뮤즈의 만남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여성들의 연대로 여러 난제를 해결해 가는 이 영화에서 크루즈는 모든 이와 모든 것을 아우르고 품어내는 그 중심 역할을 훌륭히 소화했다. 칸국제영화제는 크루즈에게 여우주연상 트로피를 수여했다.


영화 '브로큰 임브레이스' 스틸컷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제공 영화 '브로큰 임브레이스' 스틸컷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제공

그 뒤로는 스페인영화나 유럽 영화가 아니라 해도, 미국영화나 미국과 유럽 합작의 할리우드 영화 등 다양한 국적의 영화에 출연해서 섹시 이미지를 발산해도 단순한 ‘관음의 대상’으로 보이지도 평가되지도 않는다. 우디 앨런 감독의 ‘로마 위드 러브’(2012)에 매춘부로 등장해도, 이탈리아 영화 ‘8과 2분의 1’(1963)을 뮤지컬영화로 재해석한 ‘나인’(2009)에서 남편을 두고 귀도 감독을 사랑하는 내연녀로 분해도 더이상 그를 ‘가벼이’ 평가하지 않는다.


그래도 페넬로페 크루즈가 가장 빛날 때는 패드로 알모도바르와 함께할 때, ‘브로큰 임브레이스’(2009)에서다. 알모도바르 감독 역시 크루즈를 만날 때 빛나고, 크루즈 역시 마찬가지다. 집착이 병적으로 심한 백만장자의 애인 레나는 어릴 적 꿈인 연기를 소원하고, 드디어 그 꿈을 이룬다. 크루즈는 극 중에서 출연한 영화 속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하는데 반짝반짝 빛이 난다.


마그다, 막달레나가 전하는 위로 ⓒ㈜더쿱 제공 마그다, 막달레나가 전하는 위로 ⓒ㈜더쿱 제공

그래도 배우 페넬로페 크루즈가 가장 아름다워 보인 건 자신이 제작한 영화 ‘내일의 안녕’(2017)이라고 생각한다. 원제목은 ‘ma ma’로 영화 내용상 가슴으로도 어머니로도 읽힌다. 크루즈가 연기한 인물은 마그다, 대사에 따르면 막달레나의 준말이다. 크루즈는 이 영화에서 자신의 연기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은 ‘어머니’라는 것, 그 어머니는 한 아이의 엄마가 아니라 마음이 허한 모든 이들에게 어깨를 내주는 존재라는 것을 조용히 웅변한다. 이야기 설정상 가슴을 종종 드러내는데 선정적 노출이 아니고 의미 있는 표현이다 보니 더욱 아름답다. ‘라이프 플래쉬’의 버스에서 아기를 낳았던 아가씨, ‘내 어머니의 모든 것’에서 임신한 수녀, 모든 역경을 이겨내는 강인한 ‘귀향’의 어머니, 그리고 ‘ma ma. 크루즈는 어머니일 때 가장 아름답다.


‘ma ma’의 마그다는 인생의 절벽 앞에 서 있다. 교수인 남편은 전화메시지 한 통 남기고 제자와 장기 여름휴가를 떠났고, 마그다는 유방암 3기 판정을 받는다. 축구를 좋아하고 잘하는 마니, 그를 눈여겨보는 레알 마드리드 청소년팀의 스카우터 아르투로. 마니의 축구경기 중 아르투로가 전화 한 통을 받고 쓰러지는데, 교통사고로 딸이 사망했고 아내는 혼수상태란다. 마그다는 자신이 암 판정받은 날 더한 비극을 마주한 아르투로에게 자신에게 남은 모든 기운을 주겠노라며 위로한다. 아르투로는 아내마저 세상을 떠나던 날 마그다가 암 투병 중임을 알게 된다. 마니는 아버지의 부재, 어딘가 다른 엄마에게서 불안을 느끼는데 곁을 돌아보면 스카우터 아저씨가 서 있다. 우선 유방암 수술은 성공적으로 마쳤는데, 이 세 사람의 앞날을 어떻게 될까. 스포일러라 자세히 말할 순 없으나 이 세 사람은 또 다른 세 사람이 된다, 그리고 여기에 마그다의 암 치료를 위해 애쓴 의사까지 네 사람은 각자의 구멍 뚫린 가슴을 서로의 어깨에 기대 새로운 가족이 된다.


담담해서 더 좋은 비극연기 ⓒ㈜더쿱 제공 담담해서 더 좋은 비극연기 ⓒ㈜더쿱 제공

‘내일의 안녕’은 깊이 있으면서도 재미있고, 슬프면서도 따뜻한 영화다. 그리고 이 영화의 시작부터 마지막 장면까지 ‘누수 없이’ 우리를 고스란히 데려가는 인물은 마그다, 배우는 페넬로페 크루즈다. 사그라져가는 사람이 되레 남은 자들에게 커다란 사랑과 행복과 위로를 전하는데, 이름 그대로 막달라 마리아의 모습이 크루즈에게서 보인다. 종교적 마리아가 아닌 일상에서 우리가 흔히 보는 엄마, 일상의 마리아를 페넬로페 크루즈가 담담히 연기했다.


배우 페넬로페 크루즈의 연기는 언제나 담담하다. 과장이 없고 꾸밈이 없고 전형적이지 않다. 메소드 기법을 통해 그 인물 자체가 되어 미친 듯한 몰입의 연기를 보여주지 않는다. 그것은 배우가 저쪽에서 혼자 하는 공연이다. 크루즈는 그 인물의 감정에 공명한다. 그리고 그 감정을 매우 자연스럽게 표현한다, 일상의 우리가 그러하듯이. 보는 우리도 편하고 그러다 눈물이 터지면 주체할 수가 없다, 누르고 누르다 솟아난 울음이니까.


영화 '누구나 아는 비밀' 스틸컷 ⓒ오드 AUD, 티캐스트 제공 영화 '누구나 아는 비밀' 스틸컷 ⓒ오드 AUD, 티캐스트 제공

또, 페넬로페 크루즈가 선택하는 영화나 표현하는 인물은 사랑에 거침이 없고 자유롭다. 사랑 앞에 두려움이 없고 인생에서 무엇이 중요한지를 안다. ‘내일의 안녕’ 말미에 나오는 대사 “사랑해, 그게 우리가 사는 이유야”를 그가 말하기에 공감도가 커진다.


남편인 하비에르 바르뎀과의 공동 출연 행보를 봐도 크루즈는 자유스러워 보인다. 스크린 데뷔작 ‘하몽하몽’(1992)에 함께 출연한 뒤에는 접점이 없더니 전처로 등장해 남편(하비에르 바르뎀 분)의 애인(스칼렛 요한슨 분)과 연분이 나는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2008)를 함께 찍은 뒤 결혼에 이르렀다. 그 뒤에는 리틀리 스콧 감독의 ‘카운슬러’(2013), 남편은 마약왕 아내는 뒤통수 치는 내연녀가 되어 ‘에스코바르’(2017), 세상이 다 아는 비밀을 혼자만 모르는 남자와 그 비밀을 숨긴 여자로 만난 ‘누구나 아는 비밀’(2018)까지 이어질 듯 어긋나는 관계들로 조우한다.


주름마저 아름다운 배우, 페넬로페 크루즈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제공 주름마저 아름다운 배우, 페넬로페 크루즈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제공

세상의 어머니들을 연기하고 사랑 앞에 주저하지 않는 인물들을 담담히 연기하며 배우로서 제대로 나이 들고 있다. 인공미 없는 얼굴과 자연스러운 나잇살이 도리어 배우로서의 아우라를 더한다. 점점 더 깊이와 당당함을 더해가고 있는 페넬로페 크루즈. 어떤 영화를 새롭게 내놓든 볼 테지만, 우선은 이 영화를 기다린다. 제대로 된 여성 스파이 영화라는 ‘355’(2021년 개봉 예정), 5개국 다섯 스파이 속에서 패넬로페 크루즈는 어떤 해석을 보여줄지 궁금하다.

홍종선 기자 (dunastar@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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