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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종선의 배우탐구㉑] 태권소녀, 상처를 쓰다듬는 배우로 성장


입력 2020.11.17 02:00 수정 2020.11.16 23:16        홍종선 대중문화전문기자 (dunastar@dailian.co.kr)

중학생 시절의 김혜수 ⓒ본인 미니홈피

다 가지고 태어난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있다. 키도 170cm로 크고, 얼굴도 예쁘고, 몸매도 육감적이고, 건강해 보이고, 인성의 흠을 잡는 이도 없다. 정말 다 가지고 태어났을까. 알고 보면 지독한 노력파다. 타고난 신체조건과 건강이 시간이 지나도 여전하다면 노력의 결과이고 인성은 말할 것도 없이 자기연마의 덕이다. 배우 김혜수 얘기다.


김혜수는 박해일, 김남길과 함께한 영화 ‘모던 보이’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조난실 역을 맡았고 여러 모습으로 등장하는데, 그중 하나가 비밀구락부 댄서였다. 김혜수는 조난실이 정체를 완벽히 숨기기 위해선 그만큼 완벽하게 프로페셔널 댄서로 보여야 한다는 생각에 “힘들어 죽을 만큼”, 죽기 직전까지 땀을 빼며 연습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 김혜수가 새로운 배역을 맡을 때마다, 그게 드라마 ‘직장의 신’이든 ‘하이에나’든, 영화 ‘차이나타운’이든 ‘미옥’이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캐릭터 그 자체가 되기 위해 얼마나 열심히 준비하는지는 소문이 자자하다. 영화제 심사위원을 해도, 영화상 사회를 봐도 마찬가지다.


MBC 드라마 '여자의 남자' 스틸컷 ⓒ 출처=네어버 영화

비록 대중에게 공개된 모습에 한해서겠지만, 인생도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해 보였다. 1982년 초등학생 시절, 88 서울올림픽 준비상황 점검 차 내한한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위원장이 국기원을 방문했을 때 김혜수는 어린이시범단 대표로 꽃다발을 전한 화동이었다. 3년 뒤 ‘마일로’라는 초콜릿음료 CF에 출연했고, 이를 눈여겨본 이황림 감독이 영화 ‘깜보’에 캐스팅했다.


중학교 3학년 때 본격적으로 연기를 시작한 김혜수는 승승장구했다. 열일곱 나이에 단막극 ‘인형의 교실’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연기해도 어색하지 않았다. 데뷔하지 얼마 되지 않은 10대 때 유독 유부녀 역할을 많이 했는데, 그 상대역도 대선배들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어리둥절할 정도인데 드라마 ‘순심이’에선 고인이 되신 김성원 배우, ‘꽃 피고 새 울면’에서는 노주현, ‘장미빛 인생’에서는 박근형, 사극 ‘사모곡’에서는 길용우 배우의 극 중 아내였다. 김혜수가 출연하면 시청률이 나왔고, 성숙한 외모에 다부진 연기력을 지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영화 '미옥'의 미옥, 배우 김혜수 ⓒ씨네그루㈜키다리이엔티 제공

너무 어려서부터 과하게 소비되는 건 아닌가 걱정했는데, 기우였다. 김혜수는 차근히 필모그래피를 쌓아 올렸고 안방극장 출연도 잊을 만하면 계속하며 명실상부한 톱스타 배우로 성장했다. 데뷔 35년 차, 출연작 66편, 시작도 주연이었고 지금도 주연이다. 차이가 있다면 이제는 자연 나이보다 어린 역할을 맡는다.


생각해 보면 현실인데, 현실인가 싶다. 쉼 없이 주연이었는데 대중은 싫증을 내지 않는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변화를 추구해서다. 무작위로 2007년 필모그래피를 봤다. 영화 ‘바람 피기 좋은 날’에서 연하와 불륜을 즐기는 섹시 유부녀였다가, ‘좋지 아니한가’에서 무협소설 작가를 꿈꾸는 백수였다가, ‘열한 번째 엄마’에서는 피폐한 삶에 찌든 ‘여자’가 된다. 영화 ‘타짜’에서는 가장 농염했다가, ‘차이나타운’에서는 백발에 기미투성이가 됐다가, ‘굿바이 싱글’에서는 만삭이 되고, ‘미옥’에서는 하얘 보일 만큼 빛나는 금발이 되어 장총을 겨누고, ‘내가 죽던 날’에서는 자연인 김혜수를 투영해 낸다.


드라마 '직장의 신' 스틸컷 ⓒKBS 제공

대중과 더 가까이 다가서는 안방극장에서의 활약도 대단하다. ‘직장의 신’에서는 무엇이든 못하는 게 없는 인공지능 AI 직원이라고 할 정도의 미스 김이 되고, ‘하이에나’에서는 무엇이든 해결하지 못하는 게 없는 변호사가 아니라 마타하리 첩보원이라 해도 무방할 정금자가 되어 시청자의 마음을 쥐락펴락한다. 여전히 김혜수가 뭘 입었는지, 뭘 들었는지, 휴대전화 줄 하나까지 화제다.


뿐인가. 노래 잘해서 드라마와 영화 OST에 참여하고, 그림 그려 전시회에도 참가하고, 책을 좋아해 한 작가 파기 시작하면 끝까지 파고 직접 쓰기도 한다. 봉사도 열심, 영화 ‘차이나타운’의 칸국제영화제 레드카펫 대신 미얀마 봉사를 택했는가 하면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난민촌 등 손길이 필요한 곳을 발로 찾았고, 그림을 그려 얻은 수익금으로는 몸이 아픈 환우들을 위해 기꺼이 기부해 왔다.


영화 '내가 죽던 날' 스틸컷 ⓒ워너브러더스코리아㈜ 제공

그렇게 하드웨어나 소프트웨어나 완벽해 보였던 김혜수가 배우 생활을 그만두려 한 시기가 있었다. 어머니의 일명 ‘빚투’가 터진 때였다. 30년 넘는 배우 생활에, 그 많은 CF에, 그러나 부가 쌓이기는커녕 거액의 빚이 남았다. 13억 원이었고, 처음 알게 된 건 8년 전이었다. 일할 정신도 아니었고, 일할 상태도 아니었다. 영화 ‘내가 죽던 날’에서 주인공 현수(김혜수 분)가 하는 말 “난 내 인생이 멀쩡한 줄 알다가 이렇게 된 줄 몰랐다”은 김혜수 자신의 말이었다. 하지만 일했다. 일해야 했다. 물론 경제적 이유도 있었지만, 일이 돌파구가 돼 주기도 했다.


그렇게 7년을 애써 달리고 있을 때쯤, 아마도 진이 다 빠져나가 있을 때쯤, 이제 에너지를 빼서 쓰지만 말고 채워 넣어야 할 때쯤 영화 ‘내가 죽던 날’(감독 박지완, 제작 오스카10스튜디오·스토리풍, 배급 워너브러더스코리아㈜)을 만났다. 상처받아 누군가의 위로가 필요할 때 운명처럼 시나리오를 읽었고, 촬영하며 동료 배우들에게 박지완 감독에게 힘을 받았다. 분명 힘을 써야 하는 가능한 게 ‘일’인데 되레 힐링이 됐다. 그래서일까. 영화 속에서 김혜수는 제대로 뒤통수 맞아 정신어 얼얼한 인물 김현수로도 보이고 자연인 김혜수로도 보인다. 진한 메이크업, 개성적 머리색, 독특한 의상, 그 어느 것도 없는데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답다.


영화 '내가 죽던 날' 촬영현장의 김혜수 ⓒ

사실 김혜수는 영화 ‘타짜’ ‘도둑들’ ‘관상’ 같은 멀티캐스팅 영화에서도 빛나지만, ‘얼굴 없는 미녀’ ‘분홍신’ ‘열한 번째 엄마’처럼 단독 주연일 때 더욱 배우처럼 보인다. 드라마 ‘국희’ ‘직장의 신’도 마찬가지. 그런데 영화 ‘내가 죽던 날’은 세 여자의 영화다. 배우로는 김혜수 이정은 노정의, 배역으로는 김현수 순천댁 세진. 그러함에도 김혜수는 그 어느 때보다 좋은 배우로 보인다. 때로 세 명이 하나의 인물로 느껴진다. 배우 김혜수는 앞으로 35년은 더 배우일 것이다. 그래도 이번처럼 배우 김혜수와 사람 김혜수가 겹쳐 보이는 작품은 없을 것이다. 충분히 봐둘 만하지 않은가.


“아마 저를 포함해 많은 사람은 (힘겨움이나 상처를) 혼자 감당하려 할 거예요. 누군가와 얘기한다면 서로 소통할 부분만 열어 보이고요, 저도 제 곁에 누군가 있었어요. 지금도 극복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어떤 상처나 이런 것들 완전히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다시 살아갈 용기, 힘이 생기는 정도죠. (‘내가 죽던 날’은) 상처받은 이들이 위로받고 사는 얘기예요. 누군가에는 내 얘기로 다가오고 누군가에게는 아니고, 누군가에는 크게 느껴지고 누군가에는 스쳐 지나가는 정도의 느낌일 수 있어요. 그래도 다가서자, 관객 여러분께 다가가서 전해 보자, 라는 마음으로 만든 영화예요. 제가 힘을 받았듯 누군가는 그러시면 좋겠습니다.”

홍종선 기자 (dunastar@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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