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리 초호황' 높은 성과 기대감 속 시장 재편·정세 변수
세계적 공급난 속 미·중 패권 경쟁 속 투자·외교 대응 요구
이재용 구속으로 대응력 저하...글로벌 경쟁력 상실 우려
인공지능(AI)과 5세대이동통신(5G)를 바탕에 둔 4차산업혁명 발발과 디지털 생태계 전환 가속화로 글로벌 경제계는 그야말로 혁신의 시대를 마주하고 있다. 여기에 지난해 시작돼 장기화 국면을 맞고 있는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은 비대면(언택트) 시대를 앞당기며 시장과 기업들에게 새로운 성장 해법을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파고는 대외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와 국내 기업들을 도약과 추락의 기로에 서게하고 있다. 변화와 혁신의 시대를 맞았지만 반도체·배터리·자동차 등 주요 수출 품목들의 앞에 놓여진 만만치 않은 리스크들을 살펴본다.[편집자 주]
올해부터 메모리 반도체 슈퍼사이클(초호황)이 본격화되면서 D램·낸드 최강자 삼성전자 실적 전망은 매우 밝다. 기술력뿐만 아니라 생산력에서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어 다른 업체들에 비해 경쟁우위를 보이고 있어 긍정적 업황의 수혜를 입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합종연횡에 따른 시장 재편 움직임과 함께 경쟁 업체들이 적극적인 투자 행보로 치열한 경쟁을 예고하고 있는 상황에서 총수인 이재용 부회장의 부재로 적기 대응력 상실로 인한 경쟁력 하락에 대한 우려는 가시지 않고 있다.
12일 관련업계와 증권가에 따르면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은 2분기 5조원대 영업이익을 달성하며 전체 영업이익 두 자릿수(10조원) 돌파를 주도할 전망이다.
5조원대 영업이익은 3조원대였던 1분기에 비해 크게 늘어나는 것이다. 증권가에서는 삼성전자가 1분기 반도체 사업에서 약 3조5000억~3조6000억원 안팎의 영업이익을 거뒀을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회사는 앞서 지난 7일 잠정 실적 발표를 통해 1분기 전체 영업이익이 9조3000억원을 기록했다고 밝혔다.
이같은 긍정적 전망은 메모리반도체 수요가 급증하면서 가격이 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타이완 시장조사기관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올 2분기 D램 가격은 10~15% 가량 인상되면서 당초 예상치(8~13%)를 뛰어넘을 것으로 보인다. 서버용 D램의 경우, 올해 가격 인상률이 40%에 이를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가격이 반등해 온 D램과 달리 그동안 보합세를 보여온 낸드플래시 가격도 2분기부터 상승할 전망이다.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범용제품인 128기가비트(Gb·16Gx8) 멀티레벨셀(MLC) 낸드플래시의 고정거래가격은 지난해 11월부터 올해 3월까지 5개월 연속으로 가격 변동 없이 4.2달러를 유지하고 있지만 4월부터는 우상향 조짐이 나타날 전망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펜데믹(대유행) 지속으로 전자기기 수요 회복이 예상보다 더디게 이뤄지기는 했지만 4월부터 제품 수요가 본격적으로 증가하면서 가격도 상승세를 탈 것이라는게 트렌드포스의 분석이다.
삼성전자는 2분기부터 호황을 맞는 반도체가 다시 전체 실적을 주도하는 구조로 변모하면서 분기 두 자릿수 영업이익 행진을 지속하면서 올해 연간 영업이익이 50조원에 육박할 것이라는 기대섞인 전망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경쟁 기업들이 인수합병(M&A) 등으로 시장 재편을 꾀하면서 경쟁력 강화에 나서고 있는데다 반도체를 둘러싼 글로벌 정세가 심상치 않은 상황에서 총수인 이재용 부회장의 부재로 인해 적기 대응을 하지 못하면서 경쟁력 상실로 이어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 낸드·파운드리 시장 지각 변동...치열한 경쟁 예고
D램과 함께 메모리반도체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낸드플래시 시장은 이미 지각변동 조짐을 보이고 있다.
지난해 10월 SK하이닉스의 인텔 낸드사업 인수 발표에 이어 최근 미국 마이크론과 웨스턴디지털(WD)이 키옥시아(구 도시바메모리) 인수를 검토 중이어서 시장이 재편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키옥시아는 지난 2017년 일본 도시바가 적자 누적으로 인해 낸드플래시 사업을 분사해 만든 ‘도시바메모리’의 후신이다. 도시바는 지난 2018년 6월 매각에 나서 한·미·일 연합에 지분 59.8%를 넘겼고 연합은 지분 인수 후 이듬해 10월 키옥시아로 사명을 변경했다.
현재 전 세계 낸드플래시 시장은 삼성전자가 점유율 33.4%(지난해 4분기 기준)로 확고한 1위를 차지하고 있는 가운데 키옥시아(19.5%)·웨스턴디지털(14.4%)·SK하이닉스(11.6%)·마이크론(11.2%)·인텔(8.6%) 등의 순으로 순위를 형성하고 있다.
삼성전자만 30%대 점유율로 한발 앞서 있는 상황으로 나머지는 모두 10%대로 격차가 크지 않다.
SK하이닉스의 인텔의 낸드 인수에 이어 키옥시아 인수가 성사되면 3~4개 업체로 재편될 수 있는 상황이다. 산술적으로 보면 점유율 30%대 2곳, 20%대 1곳, 10%대 1곳 등으로 구도가 변할 수 있다.
업계 한 관계자는 “메모리 초호황을 앞두고 낸드 경쟁력 강화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어떤 형태로든 합종연횡이 이뤄질 수 있다”며 “삼성전자로서는 한 발 앞서 있는 기술 경쟁력과 생산력에도 불구하고 경쟁자들의 거센 추격에 시달릴 수 있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글로벌 반도체 공급부족으로 주목받고 있는 파운드리(위탁생산) 시장에서도 각 기업들은 잰걸음을 하고 있다.
전 세계 1위 업체인 타이완 TSMC는 이달 초 생산 확대를 위해 향후 3년간 1000억달러(약 113조원) 투자를 발표하는 등 전 세계적인 반도체 공급 부족 사태를 해결하기 위한 공격적인 행보를 예고했다.
앞서 지난 1월 올해 설비투자액(케펙스·Capex)으로 250억∼280억달러(약 28조~32조원)을 제시한 것에 이어 적극적 투자를 이어가는 모양새다.
앞서 미국 종합반도체기업(IDM) 인텔은 지난달 23일 파운드리 서비스 사업부 신설과 함께 200억달러(약 22조6000억원)를 투자해 미국 애리조나주에 두 개의 새로운 팹(공장)을 건설해 파운드리 시장에 진출하겠다고 선언했다.
최근 몇 년간 위기를 겪은 인텔이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한 차원에서 파운드리 사업 본격화 카드를 들고 나온 것이지만 최근 전 세계적으로 반도체 공급부족이 심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나온 발표여서 이목이 쏠리고 있다.
특히 이번 공장 설립이 대부분의 파운드리 제조시설이 아시아에 집중돼 있는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자국 내에 제조역량을 확보하기 위한 차원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미국 정부의 반도체 생산역량 확보 노력뿐만 아니라 자급론과도 묘하게 겹치는 모습이다.
1위와 격차가 큰 2위로 추격의 고삐를 죄어야 하는 삼성전자로서는 추격과 방어를 동시에 해야 하는 상황이다.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올 1분기 시장 점유율이 18%로 TSMC(56%)와 상당한 격차가 있다.
업계 한 관계자는 “확실한 3강 구도인 D램과 달리 낸드는 5~6개 업체들이 경쟁하는 구도여서 향후 시장 재편 요인이 클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며 “인공지능(AI)과 자율주행 등 시스템반도체 수요가 앞으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수 밖에 없어 파운드리 시장 성장세도 고공행진을 할 전망이어서 향후 경쟁이 한층 치열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 반도체, 수급대란 속 핵심자원 부상...정치적 대응력도 절실
최근 차량용 제품을 중심으로 글로벌 공급 부족 사태가 심화되면서 이를 둘러싼 글로벌 정세가 급변하고 있는 점도 고민거리다. 전 세계 각국에서 반도체가 핵심 안보 자원으로 부상하고 있는 가운데 미국에서는 자급론이 대두될 정도다.
정치적 이슈에서부터 무역 문제로 사사건건 부딪히고 있는 ‘빅2’ 미국과 중국간 반도체 패권 경쟁이 불거지면서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삼성전자가 그 한복판에 놓일 수 있는 상황이다. 미국과 중국이 주요 생산기지이자 시장이라는 점에서 보다 면밀한 대응전략으로 균형잡힌 접근이 필요한 상황이다.
올 초 출범한 미국 조 바이든 행정부는 12일(현지시간) 반도체 부족 문제 해결책을 논의하는 자리에 삼성전자를 초청했다. 미국은 정부 차원에서 수급난 해소라는 당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발벗고 나서고 있는 상황으로 자국 내 생산기지 확보 등을 위해 삼성전자에 협력을 구하는 모양새다.
중국 정부도 지난 3일 푸젠성 샤먼에서 열린 한·중 외교정상회담에서 우리 정부에 반도체와 5세대(5G) 이동통신 분야에서 협력할 것을 요구했다. 정부 차원의 논의이기는 하지만 삼성전자가 반도체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감안하면 논의 주체에서 빠질 수 없는 존재다.
삼성전자로서는 미국과 중국이 잇달아 손을 내밀고 있는 것이 글로벌 경쟁력을 인정받았다는 점에서 분명 긍정적인 부분이 있지만 경쟁을 넘어 갈등 관계에 놓인 양국 사이에서 균형잡힌 스탠스를 취해야 한다는 점에서 고심이 깊을 수 밖에 없다.
중국은 우리의 반도체 전체 수출량 중 40%를 차지하고 홍콩까지 감안하면 전체의 60%를 차지하는 최대 시장이다. 미국은 대만·일본과 함께 한국을 첨단 반도체를 조달하는 국가로 삼고 있는데다 초대형 IT 기업들이 많아 우리로서는 대형 고객 확보를 위해서도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다.
이러한 복잡한 방정식을 풀어나가기 위해서는 그 어느때보다 글로벌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한 대외 외교력과 협상력이 절실하다.
투자 요구를 적절히 수용하면서도 실리를 챙겨하는 것은 물론, 양국의 눈치를 봐가면서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균형잡힌 전략이 필요하지만 현실은 말처럼 쉬운 상황이 아니다. 자칫 대응력 부족으로 중요한 두 국가 중 하나를 아예 상실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려하지 않을수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총수인 이재용 부회장이 영어의 몸으로 손발이 묶인 상태여서 문제 해결은 난관에 부딪힐 가능성이 크다. 글로벌 기업 총수로서 지금이 그동안 축적해 놓은 글로벌 네트워크와 인맥을 가동해야 하는 시점인데 그럴수가 없다는 점을 아쉬워하는 분위기가 재계 곳곳에서 감지된다.
오는 18∼21일 중국 하이난다오 보아오에서 개최되는 아시아판 다보스포럼 ‘2021 보아오포럼’도 이러한 능력을 펼칠 수 있는 장이지만 활용할 수가 없는 실정이다.
재계 한 관계자는 “백악관 초청이나 보아오포럼 같은 중요 행사에는 글로벌 네트워크를 갖춘 인사여야 효용성이 높을 것”이라며 “비단 반도체 문제뿐만 아니라 미·중 무역분쟁 심화 속에서 활로를 찾아야 하는 국내 기업 입장에서 활용도가 높은 논의의 장인데 안타깝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