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반도체 경쟁서 더욱 중요해진 균형감 있는 대응력
인텔 낸드 인수에도 타 M&A 부상으로 효과 반감 우려도
세계 반도체 정세 급변에 정부의 적극적 대응 필요성 제기
차량용 반도체 부족 사태로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글로벌 반도체 패권을 놓고 미국과 중국이 본격 경쟁을 예고하고 있다. 여기에 낸드플래시 시장에서도 합종연횡 움직임이 나타나는 등 전 세계 반도체 시장의 정세가 급변하고 있다.
확고한 메모리반도체 경쟁력을 바탕으로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국내 반도체 기업들에게 변수로 작용할 것으로 보이는 만큼 정부가 보다 적극적인 대응 및 지원 방안 마련에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13일 관련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미국과 중국의 반도체 패권 경쟁의 한복판에 서게 될 처지에 놓였다. 세계 1위 메모리반도체 기업이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현실을 마주할 수 있는 상황이다.
삼성전자는 미국 백악관이 12일(현지시간) 반도체 칩 부족 사태의 해법을 모색하기 위해 온라인 화상회의 방식으로 개최한 '반도체 대책회의'에 참석했다.
최시영 파운드리사업부장(사장)이 참석한 이 회의에서 미국 정부는 그동안 '반도체 굴기'를 내세우며 대규모 투자와 적극적인 지원을 통해 반도체 경쟁력을 끌어 올리려는 중국에 대한 강한 견제 심리를 표출했다.
회의에 직접 참석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중국과 세계의 다른 나라는 기다리지 않고 미국이 기다려야 할 이유도 없다"며 반도체에 대한 공격적인 투자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상·하원 의원 65명에게서 반도체 지원 요청 서한을 받았다며 “중국이 반도체 공급망을 재편하고 지배하려는 공격적 계획을 갖고 있다”는 서한의 내용을 소개하기도 했다.
또 반도체가 주요 인프라 중 하나라는 점을 강조하며 국가적 인프라 구축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할 뜻을 분명히 했다. 그는 회의에서 반도체 웨이퍼를 들어 보이며 "내가 여기 가진 칩, 이 웨이퍼, 배터리, 광대역, 이 모든 것은 인프라"라고 규정했다.
◆ 미·중 반도체 패권 경쟁 격랑에 휩싸이는 삼성전자
미국이 정부 주재로 열린 반도체 대책 회의에서 중국과의 경쟁 의식을 드러내고 국가 인프라로서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삼성전자의 고민이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게 됐다.
일단 미국이 단기적으로는 차량용 제품을 중심으로 한 반도체 수급난을 타개하고 중장기적으로는 안정적인 공급망 구축을 꾀할 것으로 보이는 만큼 주요 반도체 업체인 삼성전자에 현지 투자 요청 등 손을 내밀 가능성이 크다.
삼성전자는 그동안 미국 현지에 170억달러(약 19조2000억원) 규모의 파운드리 공장을 추가로 건설하기로 하고 주 정부들과 협의를 진행해 왔고 기존 생산시설이 있는 텍사스주 오스틴이 유력 후보지로 부상한 상태다. 여기에 투자 규모 확대나 차량용 반도체 생산 등의 요구가 더해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또 향후 빅 2의 반도체 패권 전쟁이 본격화되면서 양국이 경쟁을 넘어서 갈등으로 치닫게 되면 두 국가 모두에 생산 기지와 기업 고객들이 있는 삼성전자로서는 둘 모두의 눈치를 봐가며 줄타기를 해야 하는 상황이다.
삼성전자가 미국의 투자 요구를 받아들이는 모양새를 취하게 되면 중국도 당장 삼성전자에 추가 투자를 요구할 가능성이 있다. 삼성전자는 중국 시안과 쑤저우에 낸드플래시 생산 공장과 반도체 후공정(패키징) 공장을 운영 중이다.
양국이 서로 견제 심리를 드러내면서 투자 압박을 할 수 있는 상황이어서 둘 사이에서 균형감 있는 대응 전략이 더욱 요구될 전망이다.
높은 정치력과 외교력이 필요해 글로벌 네트워크와 인맥이 더욱 중요할 수 밖에 없는 현실에서 총수인 이재용 부회장의 부재 상황이 더욱 아쉽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 낸드 시장 재편 불확실성 직면한 SK하이닉스
삼성전자와 메모리반도체 투톱인 SK하이닉스도 변화의 한복판에 서 있다. D램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한 낸드 제품의 경쟁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지난해 10월 90억달러(약 10조3000억원)를 투자하는 인텔 낸드사업 인수합병(M&A)을 발표했다.
M&A를 통해 현재 5위권인 순위를 삼성전자에 이은 2위로 끌어올리며 시장재편을 주도하겠다는 야심찬 포부에서 나온 결정이었다.
하지만 최근 미국 마이크론과 웨스턴디지털(WD)이 업계 2위 키옥시아(구 도시바메모리) 인수를 검토하면서 시장 재편 주도권을 빼앗길 처지다.
현재 전 세계 낸드플래시 시장은 삼성전자가 점유율 33.4%(지난해 4분기 기준)로 확고한 1위를 차지하고 있는 가운데 키옥시아(19.5%)·웨스턴디지털(14.4%)· SK하이닉스(11.6%)·마이크론(11.2%) 등이 톱 5위를 형성하고 있다.
삼성전자만이 30%대 점유율로 한발 앞서 있는 상황으로 나머지 2~5위권은 모두 10%대로 격차가 크지 않다.
SK하이닉스가 인텔(점유율 8.6%) 낸드사업을 인수하면 점유율이 20%선으로 올라서는 가운데 업계 3위 웨스턴디지털과 5위 마이크론 중 하나가 키옥시아를 인수하게 되면 산술적으로는 점유율이 30%대로 뛰어오르면서 당장 삼성전자와 치열한 1·2위 경쟁을 펼치는 상황이 된다.
◆ 산업부 뒤늦은 반도체 공급난 대책 간담회..."능동적 대응 필요"
결국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모두 글로벌 반도체 패권 경쟁의 격량에 휩싸이는 상황이다. 격랑의 파고가 높아 민간기업들의 힘만으로는 대응하기 어려운 상황이지만 정부의 대응은 한발 늦는 모습이다.
지난해 말부터 불거지기 시작한 차량용 반도체 공급대란 사태를 넋놓고 지켜보고 있다 이제서야 부랴부랴 대응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정부는 지난 9일에야 한국반도체산업협회 등 국내 반도체 업계 관계자들과 대책 간담회를 열었다. 국내 자동차 업체들이 반도체 수급난으로 생산라인 일시 중단 및 감산 등의 조치가 이뤄지고 삼성전자가 미국 백악관 반도체 대책 회의 초청 소식이 전해진 한참 뒤였다.
지난해부터 시작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산업과 시장의 변화가 커지고 있고 5G·AI·자율주행 등 미래 신성장산업에서 핵심 자원인 반도체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너무 늦은 대응이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반도체업계는 9일 간담회에서 반도체산업육성을 위한 특별법 제정과 함께 이를 바탕으로 국내 반도체 제조시설 구축 확대를 위한 투자비용에 대한 세액공제, 각종 인허가 지원, 시설투자 환경 구축, 규제 정비 등 전폭적 지원을 요구했다.
또 반도체 공급망 안정을 위한 생태계 구축과 함께 연구인력 양성 등 인재 육성 지원도 요청했다. 이와함께 글로벌 반도체 산업을 둘러싼 정세에 보다 능동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정부의 지원도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업계 한 관계자는 “반도체는 민간기업들이 알아서 잘하니 신경을 안써도 된다는 식으로는 K-반도체의 미래는 없다”며 “향후 반도체의 중요성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지는 만큼 경쟁력 제고와 대응력 향상을 위한 정부 차원의 보다 적극적인 정책과 지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