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초격차 전략·현대차 본업 벗어난 미래투자, 총수의 강력한 리더십 필요
전문경영인 중심 집단지성체제로는 급격한 산업패러다임 변화 대응 힘들어
반도체·배터리·미래차 등 미래 성장산업들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고 있는 가운데 기술 주도권을 잡기 위한 패권 경쟁이 한층 치열해지는 양상이다. 4차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기업들의 글로벌 경쟁력을 넘어서 국가 경쟁력 확보 문제로까지 확대되는 모습이다. 기업들의 공격적인 투자와 합종연횡 움직임 속에서 각국 정부들도 이를 지원하기 위한 정책 방안 마련에 적극 나서면서 기술과 시장의 대변혁의 파고가 일어날 전망이다. 변화의 혁신의 시대에 신성장산업 주도권 확보라는 만만치 않은 과제에 놓인 국내 기업과 우리 정부의 현실을 살펴본다. [편집자 주]
정체된 기업은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사람이 신진대사를 멈추면 삶을 멈추듯 기업 역시 투자-성장-수익창출-재투자의 선순환이 끊임없이 이뤄지지 않으면 도태를 면할 수 없다.
우리 기업들은 창업자를 비롯한 기업 총수들의 강력한 리더십을 바탕으로 한 공격적 투자에 힘입어 짧은 산업 역사에도 불구 고속 성장을 구가해 세계 굴지의 기업으로 자리 잡았다.
총수 중심의 오너경영체제가 3~4세대까지 이어지며 여러 부작용들도 지적되지만, 여전히 강력한 리더십을 통한 빠른 의사결정 체제를 갖춘 기업이 경쟁에서 우위를 보이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특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과 종식 과정에서 오는 혼란, 그리고 기술·소비 트렌드 변화에 따른 급격한 산업 패러다임 변화는 기업들에게 더 빠르고 강력한 신진대사를 강요한다.
이미 세계 반도체 시장을 지배하고 있는 삼성전자가 ‘초격차’를 외치며 스스로에게 더욱 가혹한 채찍질을 가해온 것이나, 현대차그룹이 현재의 먹거리인 자동차에 안주하지 않고 도심항공모빌리티(UAM)이나 로보틱스에 대규모 투자를 진행해온 것도 총수의 강력한 리더십이 바탕이 됐다.
이재용 부회장 체제의 삼성은 지난 2018년 8월 180조원 규모의 투자계획을 발표한 데 이어 이듬해 4월에는 오는 2030년까지 시스템반도체 분야 1위를 목표로 총 133조원을 투자하는 내용의 ‘시스템반도체 비전 2030’을 제시했다.
정의선 회장이 이끄는 현대자동차그룹 산하 현대차와 기아는 지난해 말과 올해 초 중장기 전략을 발표하고 오는 2025년까지 전기차, UAM(도심 항공 모빌리티), 자율주행, 연료전지 등에 오는 각각 60조1000억원과 29조원을 투자하겠다고 발표했다.
이같은 대규모 투자는 기업의 지속가능성 확보 뿐 아니라 국가 경제에도 큰 활력을 불어넣어준다. 삼성은 180조원 투자 발표 당시 130조원을 국내에 투자하고, 4만명을 채용하겠다는 계획을 밝혔으며, 현재도 상당 부분 이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현대차그룹의 미래산업 투자는 단순 조립공정에 대규모 인력을 투입하는 완성차 산업의 사양화에 대비해 산업 생태계와 고용시장을 안정시켜줄 수 있는 중요한 발걸음으로 평가받고 있다.
4년째 효과를 입증하지 못하고 있는 ‘소득주도 성장’이라는 허무맹랑한 구호와는 달리 글로벌 리더십을 가진 기업들의 대규모 투자는 현실적이고 효과적이다. 직접투자와 직접고용 효과 외에 수많은 협력업체들과 지역 경제주체들에게 이어지는 낙수효과로 우리 경제가 침체를 벗어나 성장의 길로 진입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문제는 우리 사회와 정치권에 만연한 반기업 정서로 인해 총수 리더십 효과가 간과되고 있다는 점이다. 총수 리더십에 반대하는 이들은 우리 기업들에게 소유와 경영을 분리한 전문경영인 체제 전환을 서둘 것을 강요하고 있다.
물론, 글로벌 산업 환경이 투자 결정 과정에서 집단지성체제에 기대를 걸고 주주들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하는 과정을 거쳐도 될 만한 시간을 준다면 좋은 일이겠지만, 산업 패러다임 변화 속도는 그처럼 여유롭지 않다.
현대차그룹이 중장기 사업전략을 결정하는 데 있어 다수의 경영진과 주주, 노동조합의 치열한 토론 과정을 거쳤다면 UAM이나 로보틱스와 같은 본업(本業)에서 벗어난 사업 진출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1990년대 반도체 강국이던 일본은 집단지성체제에 의존한 투자결정 방식을 고수하며 시간을 끌다 공격적으로 투자에 나선 삼성전자에 밀려나 결국 반도체 시장에서 도태됐다. 한때 전세계 휴대폰 최강자였던 노키아가 스마트폰 시장에 적기 대응하지 못해 시장에서 사라진 것도 비슷한 케이스다.
시스템반도체 분야에서 후발 주자인 삼성은 현재 치열한 패권 경쟁 속에 내던져져 있다. 인텔과 TSMC 등이 미국에서 공격적인 투자에 나선 상황에서 발빠른 대응을 결정할 컨트롤타워의 존재가 절실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재용 부회장의 부재는 삼성에게 치명적인 핸디캡이 될 수 있다.
재계 한 관계자는 “시장에서 리더십을 확보하려면 빠른 의사결정을 바탕으로 한 공격적 투자가 필요하지만 공격적 투자에는 리스크가 따르게 마련”이라며 “전문경영인을 중심으로 하는 시스템적 투자결정 방식에서는 리스크를 책임 질 사람이 없으니 위험 부담을 최소화하려는 성향이 강해 그만큼 소극적이고 늦어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이 관계자는 “산업 역사가 길고 시장 규모가 큰 미국과 유럽이라면 모르겠지만, 우리나라 기업이 글로벌 무대의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결과는 내가 책임 질 테니 믿고 따라오라’며 결단을 내릴 수 있는 강력한 리더십을 갖춘 총수의 존재가 절실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