習, 올가을 毛와 같은 '영수' 반열 오른다
현직 넘겨주더라도 막후서 절대권력 행사
'영수' 칭호 부여 움직임, 5년 전부터 시작
‘10년 집권 룰' 깨고 ‘종신 집권’ 길 열어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올 가을 마오쩌둥(毛澤東)과 같은 반열에 오른다. 당중앙 총서기·당중앙 군사위원회 주석 등의 현직에서 물러나더라도 막후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영원한 황제’가 되는 기반을 다질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시진핑 주석은 오는 10월쯤으로 예정된 20기 공산당 전국대표대회(당대회)에서 당총서기직 3연임을 공식 확정짓는 한편 현재 보유중인 ‘당중앙의 핵심’, ‘인민해방군 통수권자’에 이어 ‘인민의 영수(領袖)’라는 칭호를 부여받을 것이라고 홍콩의 유력 일간지인 명보(明報)가 지난 12일 보도했다. 명보는 베이징 소식통들을 인용해 “하나의 국가, 하나의 정당, 한 명의 영수가 지극히 중요하다”라는 구호가 이를 뒷받침할 선전문구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러면서 ‘영수’를 위한 표준 초상화가 준비하고 있는데 초상화 밑에는 ‘신시대 인민영수 시진핑 주석’이라는 문구가 들어갈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중국 공산당사(黨史)에서 ‘영수’ 칭호를 받은 역대 최고 지도자는 마오쩌둥과 마오 사후 국가주석직을 이어받은 화궈펑(華國鋒) 두 명뿐이다. 마오쩌둥과 화궈펑은 ‘위대한 영수와 지도자’, ‘영명한 영수’로 호칭했다. 마오쩌둥과 달리 화궈펑이 영수로 불린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화궈펑은 통치기간이 짧은 과도기적 지도자였던 만큼 영수 칭호를 실질적으로 누린 것은 마오쩌둥이 유일하다. 시 주석은 2013년 12월 마오쩌둥 탄생 120주년 기념행사에서 마오쩌둥을 ‘대영수’로 칭한 바 있다.
하지만 영수라는 칭호는 ‘개혁·개방의 설계사’인 덩샤오핑(鄧小平)시대에 진입하며 사라지고 대신 ‘핵심’이라는 호칭이 등장했다. 덩샤오핑은 1989년 6·4 톈안먼(天安門) 민주화운동을 유혈진압한 뒤 정치국 상무위원도 아닌 정치국위원이었던 장쩌민(江澤民) 당시 상하이시 당서기를 자신의 후계자로 발탁했다. 그는 이 과정에서 장쩌민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마오쩌둥과 자신, 장쩌민을 각각 공산당 1~3세대 지도부 ‘핵심’이라고 불렀다. 덩샤오핑은 장쩌민이 당·정·군권을 장악한 뒤로도 한동안 원로그룹의 1인자로서 ‘상왕’ 역할을 맡았다. 시 주석은 2016년 18기 당중앙위원회 6차 전체회의(6중전회) 때 ‘핵심’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덩샤오핑은 당과 국가의 최고위직인 당총서기와 국가주석을 한 차례도 맡은 적이 없다. 당중앙 군사위원회 주석·고문위원회 주임 등을 맡으며 최고 권력자 역할을 했다. 그는 그러나 당중앙 군사위주석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1992년 평당원 신분으로 남순강화(南巡講話·개혁·개방 전초기지인 중국 남부 해안지역 도시를 돌며 한 발언)를 통해 당내 보수파에 휘둘리던 장쩌민으로부터 개혁·개방 지속방침을 이끌어내는 등 수렴청정(垂簾聽政)했다. 정치평론가인 천다오인(陳道銀) 전 상하이정법대 교수는 “핵심은 당내 칭호이고 영수는 국가 차원의 칭호”라며 “현재 당과 국가가 일체화된 상황에서 시 주석이 영수 칭호를 받으면 당과 국가 위에 올라서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이어 “핵심과 영수는 ‘무관의 제왕’과 같다”며 “당총서기 같은 직책을 맡지 않아도 핵심과 영수로서 살아있는 한 영향력은 가장 크며 덩샤오핑처럼 최종 결정권자임을 보여준다”고 분석했다.
시 주석에 대한 ‘영수’ 칭호 부여의 움직임은 6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16년 당기관지인 인민일보(人民日報)가 발행한 잡지 인민논단(人民論壇·10월18일호)에서 “중국이 전략적 변화와 위험이 존재하는 시기에 다시 대국이 되기 위해 영수가 필요하다”며 “시 주석은 당 간부와 인민들 사이에서 광범위하게 대국 영수로 인정받고 있다”고 표현해 ‘영수’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한데 이어 2017년 2월에는 리훙중(李鴻忠) 톈진(天津)시 당서기가 공식회의 석상에서 시 주석을 “영수”라고 호칭했다.
같은 해 7월30일에는 네이멍구(內蒙古) 훈련기지에서 열린 인민해방군 건군 90주년 열병식에서 판창룽(範長龍) 군사위 부주석이 전군에 ‘영수의 당부와 총사령관의 호령을 굳게 기억하자’고 요구했고, 그해 10월 ‘시자쥔’(習家軍·시진핑사단)의 핵심인사인 차이치(蔡奇) 베이징시 당서기가 시 주석을 ”영명한 영수“라고 불렀다. 특히 지난해 11월 19기 6중전회에서 시 주석의 3연임 명분을 담은 역사결의(당의 100년 분투의 중대 성취와 역사경험에 관한 중국공산당 중앙의 결의)가 채택된 뒤 ‘인민 영수’라는 표현이 당내에서 점차 확산했다. 시 주석이 세 번째 역사결의를 채택한 것은 마오쩌둥·덩샤오핑의 반열에 올랐다는 의미다. 당시 6중전회 공보에는 “시진핑의 당중앙 핵심, 전당(全黨)의 핵심적 지위와 시진핑 사상의 지도적 지위를 확립한다”는 ‘양개확립’(兩個確立) 내용이 담겼고 이는 ‘인민 영수’ 칭호를 얻는 기반이 됐다고 명보는 설명했다.
올 들어 20기 당대회를 앞두고 지방 지도자들은 지역별 당대회 정치보고에서 더 높은 자리에 오르기 위해 앞 다퉈 ‘영수의 풍모’ 등과 같은 표현으로 시 주석을 찬양하며 ‘우상화’에 열을 올리고 있다. 지역별 당대회에서 산시(山西)성과 허난(河南)성, 광시(廣西)장족자치구, 구이저우(貴州)성 등 4곳은 업무보고서 제목에 시 주석의 이름은 명기하지 않은 채 ‘영수의 당부를 명심하라’는 표현을 넣기도 했다. 이와 관련해 천강(陳剛) 싱가포르국립대 동아시아연구소 소장조리(보)는 “20기 당대회를 앞두고 시 주석의 권력이 당에서 한층 더 강화되고 있는 만큼 이들 지방 지도자의 정치생애는 시 주석의 권력 강화를 지지하느냐와 연계돼 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인민일보도 지난 5월 ‘총서기의 족적을 따라서’라는 시리즈를 시작하면서 시 주석을 “인민에서 나와 인민에 뿌리내린 영수, 멀리 내다보는 용감한 영수”라고 추켜세웠다. 중국 공산당 선전부문의 한 관계자는 “18기 6중전회 당시 시 주석이 ‘핵심’ 칭호를 얻기 전 지방 관료들이 (칭호 사용에) 비교적 신중했던 것과 달리 20기 당대회 후 ‘영수’의 존칭은 유행처럼 번질 것”이라며 “이는 당중앙이 개인숭배를 고양하는 게 아닌, 국내외 정세 변화 속에서 당·정·민이 모두 공감대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선전 부문에서는 현재 ‘인민영수가 인민을 사랑하고 인민은 인민영수를 사랑한다’, ‘당의 핵심, 인민영수, 군대 총사령관’ 등 구호를 이미 점진적으로 전파하고 있다면서도 시 주석이 올가을 당대회에서 업무보고를 할 때 ‘인민 영수’라는 표현이 바로 등장하진 않을 수 있다고 명보는 전망했다. 그러나 중국 공산당 선전부문에 정통한 한 소식통은 시 주석의 업무보고 내용을 학습하는 단계에서 당국은 ‘인민 영수’ 칭호를 강조하면서 자연스럽게 사용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당총서기직 임기 10년을 채운 시 주석은 올가을 당대회에서 당총서기직 3연임이 사실상 확정된 것이나 다름없다. 베이징 정가의 한 소식통은 명보에 “모든 당·정부문 권력기구가 시 주석의 장기 집권을 위한 밑바탕을 깔아 놓은 상태”라고 말했다. 군 출신의 한 인사는 “무력조직(군과 무장경찰을 통칭) 내부에는 시 주석이 중국을 이끄는 동안 대만문제를 해결(통일)하기를 희망하는 고도의 공동인식이 존재한다”며 “양안(兩岸·중국과 대만) 통일을 실현하면 인민영수 칭호가 명실상부해질 것”이라고 전했다.
일각에서는 중국공산당은 이번 20기 당대회에서 당장(黨章·당헌)을 개정해 ‘시진핑 동지를 영수로 하는 당중앙’이라는 구절을 넣을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그가 18기 6중전회에서 당중앙의 ‘핵심’ 칭호를 얻은 데 이어 인민영수 칭호까지 확보하면 공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죽을 때까지 막후에서 최고 권력자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는 얘기다. ‘위대한 영수’ 마오쩌둥 반열에 오르는 것이다. 시 주석이 ‘인민 영수’ 칭호로 ‘무관의 제왕’ 자리까지 오를 경우 전임자인 후진타오(胡錦濤)와 장쩌민 시대에 정착한 ‘10년 집권’이라는 룰을 깨지고 ‘종신 집권’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글/김규환 전 서울신문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