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16개 지역·50여개 대학…들불처럼 번지는 ‘백지 시위’
아무 것도 적지 않은 백지가 중국당국 검열에 대한 저항 상징
신장 우루무치 봉쇄아파트 화재로 10명 사망 사고가 도화선
중국에서 신장위구르자치구 우루무치 화재 참사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당국의 검열과 코로나19 통제 조치에 항의하는 ‘백지 시위’가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대학생과 시민들은 백지를 들고 다니며 “유전자증폭(PCR) 검사 대신 자유를 달라”는 구호를 외쳤다. 시진핑 국가주석 집권 3기를 시작한 지 한 달여 만에 최대 위기를 맞은 중국 공산당과 정부가 어떤 대응책을 내놓을지가 주목된다.
영국 BBC와 미국 CNN 등에 따르면 중국 전역에서 지난 26~28일 코로나19 봉쇄에 항의하는 시위가 사흘째 계속됐다. 상하이에 이어 수도 베이징 도심에서도 수백명의 시민들이 모여 집단 시위를 벌였고 홍콩과 대만 등 각지에서도 연대 시위가 펼쳐졌다.
BBC에 따르면 중국에서는 흰 백지 한장이 항의운동 전체를 상징하는 ‘아이템’으로 등장했다. 지난 27일 저녁 상하이에서는 신장 우루무치 화재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한 밤샘 농성에 모인 시민 수백명이 아무 것도 쓰이지 않은 종이를 들고 있었다고 AFP통신이 전했다. 상하이에서 시위에 참가한 한 여성은 "종이에는 분명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지만, 우리는 백지 종이가 무슨 내용인지 알고 있다"고 말했다.
수도 베이징에서도 이날 저녁 차오양구 량마허 주변에 촛불과 백지를 든 시민들이 모여들었다. 수백명의 시민들은 백지를 손에 들고 “봉쇄 대신 자유를 원한다”는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현장에 있던 CNN 기자는 시위대 규모가 점점 불어나자 시민들이 베이징 삼환도로(제3순환도로)를 행진하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베이징 도심에서 이런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는 것은 이례적이다. 량마허는 시내 중심부의 톈안먼 광장에서 6~7㎞ 떨어진 도심 하천으로 주변에 각국 대사관과 호텔, 상업시설 등이 밀집해 있다.
쓰촨성 청두에서도 우루무치 화재 희생자들을 애도하기 위해 모인 시민들이 ‘독재에 반대한다’ ‘우리는 황제를 원하지 않는다’는 구호를 외쳤고 광둥성 광저우에서도 비슷한 시위가 벌어졌다.CNN은 지난 주말에만 적어도 중국 내 16개 지역에서 시위를 확인했다고 전했다. 시 주석이 다녔던 명문 칭화대와 베이징대 등 50여개 대학에서도 학내 시위가 벌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대규모 반정부 시위는 24일 중국 북서부 신장위구르자치구 성도 우루무치시의 고층아파트에서 발생한 화재로 10명이 사망한 사고가 도화선이 됐다. 제로코로나 정책으로 봉쇄된 아파트에서 불이나 인명피해가 커졌고 화재진압도 늦어졌다는 이야기가 중국 주요 소셜미디어(SNS)상에 확산하면서 시민들의 분노가 들끓었다. 시민들은 화재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결집했고, 방역정책에 반대하는 전국적 시위로 빠르게 번졌다.
아무 것도 적히지 않은 백지는 중국 당국의 검열에 대한 저항의 상징이다. 공개 비판에 대해 엄격한 통제가 이뤄지는 중국에서 침묵할 수밖에 없는 시민들이 항의의 의미로 백지를 드는 것이다. '백지 시위'는 2020년 홍콩 국가보안법(홍콩보안법) 통과를 반대하는 시위에서도 등장한 바 있다. 법이 통과된 후 집회와 시위가 금지되고 시위대에 대한 폭력적 진압이 이뤄지자 홍콩 시민들은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에 항의하는 의미로 백지를 들었다.
특히 이를 지지하는 연대 시위가 세계 각국에서 벌어지고 있다. 베이징이나 상하이에서 시위 소식이 없던 28일 홍콩중문대에서 50여명의 학생들이 제로코로나 반대 시위를 하는 본토 사람들을 위한 지지의 표시로 촛불을 들었다.
학생들은 보복을 피하기 위해 얼굴을 가린 채 "PCR 검사 없이 자유!", "독재에 반대하고, 노예가 되지 말라!"고 외쳤다. 공산당의 만연한 검열에 대한 반항의 상징인 백지 한 장을 든 상하이 출신 제임스 차이는 이날 홍콩 시위에 참석해 "오랫동안 목소리를 높이고 싶었지만 그럴 기회를 얻지 못했다"며 "본토 사람들이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면, 나도 그럴 수 없다"고 말했다.
대만에서도 텐안문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투옥됐다가 이곳으로 망명한 저우펑수어 등이 27일 수도 타이베이에서 농성을 벌였다. 본토와 홍콩, 대만 출신 200여명이 자유의 광장에 모여 시를 낭송하는 등으로 중국 시위대를 지원했다. 저우펑수어는 “우리는 자유를 원한다. 그것은 기본적 인권이다. 자유가 없으면 존엄도 없다”고 말했다.
영국 런던의 중국 대사관 앞에 이날 100여명이 모여 우르무치 화재 희생자를 추모하고 상하이 시위대에 대한 중국 당국의 구금조치를 비난했다. 얼굴을 가리는 마스크를 쓴 중국이탈그룹의 대표자는 “중국인들이 탄압받고 있다. 누군가는 맞서 싸워야 한다. 항거해야 한다. 권위주의 정부에 맞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미국 예일대와 스탠포드대 등 미 전국의 대학 캠퍼스에서도 우르무치 화재 희생자를 추모하는 시위가 열릴 예정이다. 스탠포드대 시위를 준비하는 한 학생은 시위가 우르무치 희생자는 물론 “코로나 봉쇄정책으로 희생된 모든 중국인”을 기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 도쿄의 번화화 신주쿠 철도역 광장에서 27일 우르무치 화재 희생자를 추모하는 시위가 열렸다. 중국 본토 출신 등 90여명이 참가한 시위에서 한 학생은 우르무치 피해만이 아니라 “중국 체제의 본질에 항의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캐나다 수도 토론토의 중국 영사관 앞에서도 26일 중국어 사용 시위대들이 중국 공산당 해체를 요구하는 구호를 외치는 시위를 벌였다.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독일 대통령은 독일 공영방송 도이치벨레와의 인터뷰에서 중국 당국이 시위자들의 자유를 "존중"하기 바란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오늘날에도 (중국 정부의 코로나 규제)조치가 훨씬 엄격하고 장기적인 영향을 미치는 중국 국민들에게 얼마나 큰 부담이 될지 궁금할뿐"이라며 "나는 사람들이 거리에서 그들의 불만을 말하고 싶어하는 이유를 이해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