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 기술·트렌드 제시 대신 상용화 가시권 제품·기술 전시
경기 둔화에 대응, 양산모델 마케팅에 CES 활용
IT와 모빌리티의 융합이 빠르게 이뤄지면서 세계 최대 가전·IT전시회 CES에 자동차 업체들은 빠질 수 없는 단골손님이 됐다. 지난 5~8일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CES 2023’ 역시 여러 자동차 업체들이 참가해 다양한 제품과 기술들을 전시했다.
다만 올해는 예년과 분위기가 다르다. 그동안은 자동차 업체들이 CES에서 획기적일지언정 당장 손에 잡히지 않는 먼 미래의 모빌리티 기술과 트렌드를 제시했다면, 올해는 출시가 임박한 차종이나 상용화가 가시권에 있는 기술들을 내놓는 경향이 뚜렷했다.
지난 2017년 이후 6년 만에 CES에 참가한 세계 최대 자동차 업체 폭스바겐은 이런 경향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이번 CES 2023에서 폭스바겐의 주력 전시품은 순수 전기 세단 ID.7의 위장막 모델이었다.
ID.7은 폭스바겐의 전기차 전용 플랫폼 MEB를 적용한 ID.패밀리의 차기 모델이자 폭스바겐의 첫 순수 전기 세단이다. 폭스바겐 자체적으로는 의미가 클지 몰라도 업계의 미래 트렌드를 제시하는 제품은 아니다.
한 번 충전에 700km(WLTP 기준)를 달린다는 ID.7은 뛰어난 기술을 기반으로 만들어졌음은 분명해 보이지만, 하늘을 날지도 않고 주행 중 운전자가 좌석을 뒤로 돌려 다른 일을 할 수도 없다. 사람이 직접 운전해 땅으로 굴러다니는 ‘현실적인 자동차’다.
폭스바겐은 2026년까지 MEB 플랫폼 기반의 순수 전기차 10종을 출시할 예정이며, ID.7은 그 중 여섯 번째 모델일 뿐이다.
더구나 이번에 공개된 ID.7은 콘셉트카 단계가 아닌 양산차에 위장막을 덧씌운 모델이다. 출시가 임박했다는 얘기다. 이미 폭스바겐의 독일 엠덴 공장에서 생산해 유럽, 중국, 북미 시장에 출시하겠다는 계획까지 공개됐다.
그동안 자동차 업체가 신차를 공개하는 무대는 주로 모터쇼였다. 비록 여러 국제모터쇼들이 CES에 밀려 미래 트렌드 제시 측면에서는 유명무실화됐지만, 제품 홍보의 장으로는 적합했다.
이번 CES 2023을 폭스바겐은 그런 모터쇼처럼 활용했다. 먼 미래의 기술이 아닌, 조만간 소비자들에게 판매해 돈을 벌어다 줄 현실의 제품을 메인 전시물로 내세운 것이다.
메르세데스-벤츠는 이번 CES 2023에서 양산차, 혹은 양산이 임박한 신차를 공개하진 않았지만 역시 ‘손에 잡히는’ 수준의 기술을 주력으로 내세웠다. 자율주행 3단계를 실현해 줄 ADAS(첨단 운전자 지원 시스템) 기술과 초급속 전기차 충전 기술, 그리고 차세대 인포테인먼트 시스템이 그것이다.
벤츠가 내세우는 수치들은 ‘현존하는 최고의 기술’임을 보여주지만, 세대를 뛰어넘거나 산업 패러다임을 뒤바꿀 만한 획기적인 새로움은 없다. 가까운 미래에 벤츠에서 생산해 판매하는 전기차의 경쟁력을 높여줄 기술들인 것이다.
벤츠의 주력 전시제품은 콘셉트카 ‘비전 EQXX’였다. 1회 충전에 1200km를 달리는 ‘꿈의 전기차’라지만 매우 큰 화제를 모으지는 못했다. 이미 지난해 CES 2022에 맞춰 온라인으로 공개된 모델이기 때문이다.
1년 전 공개 당시 벤츠는 2023년 중에 비전 EQXX 양산차를 선보일 수 있을 것이라고 언급했었다. 벤츠에게도 CES 2023은 미래가 아닌 현실의 전시회였다.
BMW가 CES 2030의 주력 아이템으로 내세운 ‘BMW i 비전 디(Dee)’에는 비교적 많은 신기술들이 적용됐지만, 역시 먼 미래의 것은 아니다.
대표적으로 투영 범위를 차량 앞유리 전체로 확대하는 ‘어드밴스드 BMW 헤드업 디스플레이’는 전방 시야를 방해하지 않도록 증강현실 등과의 접목만 제대로 이뤄진다면 지금의 기술로도 가능하다. BMW는 당장 2년 뒤인 2025년부터 이 기술을 양산차에 적용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글로벌 자동차 그룹 스텔란티스도 산하 브랜드인 푸조, 피아트, 램(RAM)의 콘셉트카들로 CES 2023 전시 부스를 채웠다. 여느 모터쇼나 다를 게 없는 풍경이었다.
일본 소니와 혼다가 합작한 전기차 프로젝트 기업 소니혼다모빌리티는 글로벌 전자기업과 완성차 기업의 결합이라는 점에서 눈길을 끌었지만, 이들이 CES 2023에서 내놓은 콘셉트카 ‘아필라’는 아직까지 어떤 성능을 내고 어떤 편의성을 갖췄는지 제대로 공개되지 않았다.
현재로서는 혼다가 만든 차에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을 끼워 넣은 정도를 자동차 산업 패러다임을 뒤바꿀 수준의 혁신으로 보긴 어렵다.
이 차도 조만간 시장에 나와 소니와 혼다에게 돈을 벌어다 줄 제품이다. 소니혼다모빌리티는 2025년 상반기부터 아필라 예약 판매를 받을 예정이다. 2026년 봄에는 북미 시장에 이 모델을 정식 출시한다.
국내 자동차 업계를 대표하는 현대자동차그룹은 아예 올해 CES에 참가하지 않았다. 그동안 CES에서 도심항공모빌리티(UAM)와 로보틱스 등 미래 기술들을 선보였으나 올해는 그 정도로 무게감 있는 혁신 아이템을 내놓기 힘든 현실을 감안한 것으로 보인다.
이미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PBV(목적기반모빌리티)를 포함한 전기차와 UAM, 로보틱스로 미래 사업 포트폴리오를 짜겠다고 밝힌 상태라 큰 틀에서는 ‘나올 게 다 나왔다’는 평도 있다.
그렇다고 다른 자동차 업체들처럼 일반 모터쇼 수준의 제품을 전시하는 것은 그동안 현대차그룹이 보여준 화제성을 감안하면 성에 차지 않는 일이기도 하다.
업계에서는 CES를 대하는 자동차 업체들의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태도가 최근 본격화된 경기 둔화, 그리고 앞으로 더욱 어려워질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을 반영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대외 불확실성이 커진 상황에서 장기적인 미래의 비전을 제시하기보다는 현재, 혹은 가까운 미래에 시장에 내놓을 제품과 기술을 널리 알려 ‘돈을 벌어다 줄 수 있는’ 기회로 활용하려 한다는 것이다.
양재완 한국자동차연구원 선임원구원은 “CES 2023에서는 세계적인 경기 둔화 가능성이 제기됨에 따라 대다수 기업은 실질적으로 수익 창출이 가능한 사업 분야에 집중하고 CES의 마케팅 효과를 레버리징(외부의 영향력을 활용)하려는 모습을 보였다”고 평가했다.
그는 이어 “주최 측은 CES가 완성차 기업의 양산 모델 발표회로 변질되는 것을 우려하고 있으나 많은 기업들이 사실상 양산형에 가까운 콘셉트카를 공개하며 마케팅 효과를 극대화하는 모습”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