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선 회장, 미국 백악관서 대미 투자 발표
올해부터 4년간 210억 달러(약 31조원) 투자
철강, 부품, 물류, 조립까지… 美 공급망 재편
자동차 무관세? 상호관세는?… 투자 효과 관심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관세 협박'에 정면 돌파를 택했다. 미국에서 철강, 부품 생산부터 자동차 조립, 미래 사업까지 전방위적인 분야에 무려 31조원 규모의 투자를 결정하면서다. 글로벌 판매 3위로 올라서기까지 중요한 순간에 결정적인 투자를 이어왔던 정 회장의 뚝심이 이번에도 잘 드러났다는 평가다.
이에 따라 현대차그룹이 대규모 투자로 트럼프 대통령의 '엄호'를 받게 될 지에 관심이 쏠린다. 오는 4월 2일 예정된 상호관세가 발표되지 않은 데다, 트럼프 대통령이 현대차에 쥐어줄 베네핏이 분명하지 않은 만큼 상황을 지켜볼 필요가 있다는 평가다. 또 미국 내 생산 확대로 한국에서의 대미 수출량 하락이 불가피한 만큼, 국내 노조의 반발과 부품 업계의 생존위기는 숙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은 24일(현지시간) 미국 백악관에서 "향후 4년 동안 210억 달러(약 31조원)의 (대미) 신규 투자를 발표한다"고 밝혔다. 1986년 미국에 진출한 이래 가장 큰 규모의 투자다.
정 회장은 "철강과 부품에서 자동차에 이르기까지 미국 내 공급망을 강화하는 게 핵심"이라며 "루이지애나에 새로운 시설을 설립하고 미국 내 1300개 일자리를 창출해 더 안정적이고 자립적인 자동차 공급망 토대가 될 현대제철 투자에 대한 기대가 크다"고 설명했다.
이어 "미국 에너지 산업을 지원하고 에너지 안보를 강화하기 위해 30억 달러 상당의 미국 액화천연가스(LNG)를 구매할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부문별 투자 금액은 ▲자동차 86억 달러 ▲부품·물류·철강 61억 달러 ▲미래산업·에너지 63억 달러다. 현대차그룹은 오는 26일 준공을 앞둔 조지아 메타플랜트 공장(HMGMA)에 20만대 증설을 통해 생산능력을 총 50만대로 확대하며, 이를 통해 미국 전역에서 120만대 생산 체제를 갖추게 된다.
또 미국 루이지애나 주에 270만톤 규모의 전기로 제철소를 건설한다. 저탄소 자동차 강판 특화 제철소로, 고품질의 자동차강판 공급 현지화를 통해 관세 등 불확실한 대외 리스크에 대응력을 높이기 위해서다. 배터리팩 등 전기차 핵심부품의 현지 조달도 추진한다.
미래산업 부문에서는 자율주행, 로봇, AI, AAM 등 미래 신기술과 관련된 미국 기업과 협력을 확대하고, 현대차그룹 미국 현지 법인인 보스턴다이나믹스, 슈퍼널, 모셔널의 사업화에 속도를 내겠다는 계획이다.
현대차그룹이 미국 시장에 사상 최대 규모의 투자를 결정한 건 도널드 트럼프 집행부 출범 직후 찾아온 '관세 위기'를 돌파하기 위함으로 해석된다. 앞서 트럼프 대통령은 전세계 각국에 상호관세를 매기고, 자동차 분야에 있어서도 25%의 관세를 부과하겠다며 '미국에 투자하라'는 메시지를 강력하게 내건 바 있다.
이날 정 회장의 발표에 트럼프 대통령은 "진정 위대한 기업인 현대와 함께하게 돼 큰 영광"이라며 "미국에서 만드는 현대차는 관세를 내지 않아도 된다"고 화답했다.
현대차는 자동차 관세 면제?… 베네핏 쥐어줄까
현대차의 대미 투자는 '미국 내 공급망 재편'이 핵심이다. 그간 철강이나 엔진 등 주요 부품을 수출해 미국 공장에서 조립했던 방식을 지우고 '완전 미국 생산' 체제로 재편하겠다는 의미다. 비단 완성차 뿐 아니라 부품 하나하나까지 미국으로 들여가는 데 관세를 부담해야한다면, 차라리 자동차 생산에 필요한 모든 과정을 미국에서 해내는 편이 낫다는 판단이 깔린 것으로 보인다.
이는 트럼프 대통령이 선포한 관세 전쟁의 의도와 완전히 맞아 떨어진다. 트럼프 대통령은 오는 4월 2일 각국에 상호관세를 부과하고, 자동차에 대해서는 25%의 관세를 추가로 부과하겠다고 예고한 상태다. 바탕에는 '관세를 내기 싫으면 미국에 생산을 늘려라'라는 분명한 메시지가 깔렸다.
트럼프 대통령은 취재진과의 문답에서 "현대차의 대미 투자 발표로 인해 다른 자동차 제조업체들이 대미 투자를 하게 되는 청사진인가"라는 질의에 "물론이다"라며 "현대는 대단한 기업이다. 우리는 다른 훌륭한 회사들도 들어오고, 여기(미국)에 머물면서 크게 확장할 회사도 있다"고 말했다.
가장 주목되는 것은 트럼프 대통령이 현대차에 쥐어줄 베네핏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관세 전쟁을 선포한 이후 백악관에서 대규모 투자를 발표한 자동차 제조업체는 현대차그룹이 처음이다. 트럼프 대통령으로서도 첫 대규모 투자 발표 업체이자 향후 추가적인 글로벌 제조 업체들의 투자를 끌어내야하는 만큼 보상 카드를 꺼내들 가능성이 있다는 평가다.
국내 자동차 업계 관계자는 "현대차로선 당장 미국에서 모든걸 생산하지 않으면 자동차를 덜 팔거나, 관세를 내고 부품이나 자동차를 미국으로 들여와서 팔거나, 그렇게 해서 판매 가격을 높이거나 해야하는 상황이었다"며 "트럼프 대통령이 자동차나 상호관세를 발표하기 이전에 생산망 재편과 관련한 계획을 발표해 조금이라도 참작해주는 그림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업계에서 기대하는 건 크게 '현대차의 자동차 관세 면제' 또는 '상호관세율 감경'이다. 미국에서의 생산 라인 확대 또는 추가 공장 건설이 진행될 동안 수입 물량에 대해 관세를 면제해주거나, 25% 수준으로 내걸었던 수입 자동차에 대한 무관세 조치 등이 꼽힌다.
익명을 요구한 자동차 업계 전문가는 "각국에 부여하는 상호관세는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현대차에 공급망 재편의 시간을 벌어 줄 수는 있지 않겠나"라며 "관세 발표에 앞서 대규모 투자를 발표한 기업에 글로벌 제조사들과 같은 방침을 적용하지는 않을 것으로 예상한다"고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정 회장의 대미 투자 발표에서 상호 관세 부과 때 '일부 국가나 부문이 면제(break)될 수 있는지, 아니면 완전히 상호적이냐'는 질문을 받고 "나는 많은 국가(a lot of)에 면제를 줄 수도 있다"며 "상호적이지만 우리는 그것(상대국의 관세)보다 더 친절(nice)할 수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미국 내 생산이 높아지는 만큼 한국의 대미 수출량 하락과 국내 노조 반발 등의 문제도 피해갈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또 대미 수출에 의존해온 국내 부품 업계의 생존위기가 가속화될 수 있다는 우려도 이어질 전망이다.
이항구 한국자동차연구원 연구위원은 "트럼프의 관세로 수출이 줄어든다고 해서 현대차, 기아가 죽지는 않는다. 하지만 부품업체들은 돌파구를 찾지 못한다면 줄도산할 우려가 충분한 상황"이라며 "부품업체들의 양극화가 점점 심해지고 있다. 규모가 큰 업체는 투자를 하지만, 작은 업체는 투자금 마저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