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친아가 어머니한테 잔소리하는 이유는?
'번듯한 학벌'이 없어도 '엄친아'가 된다?
소수의 승자도 약자 멸시?...정말 황폐할까
많은 젊은이들에게 원성을 샀던 단어가 ‘엄친아’다. ‘엄마 친구 아들’의 줄임말로, 무엇이든 다 잘 한다는 환상의 존재를 가리킨다. 보통 어머니가 자녀에게 잔소리를 할 때 지인의 자녀하고 비교하는 경우가 많아서 생긴 신조어다.
그런 잔소리 속에서 지인의 자녀는 항상 완벽한데 그 완벽의 내용은 공부와 성품이다. 자녀들이 공부를 못하거나 부모 말을 안 들을 때 엄친아 잔소리가 나오기 때문이다. 확장되면 진학, 결혼, 취업 등도 엄친아 스펙의 일부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엄친아의 뜻이 변질 수준으로 이상하게 확장되기 시작했다. 변질 수준이라고 한 건 애초의 의미와는 정반대의 뜻을 담게 됐기 때문이다.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사람을 엄친아라고 부르는 이들이 나타났다. 해외 유학파도 엄친아라고 많이 불렸는데, 해외 교포까지 영어 잘 하는 해외 학교 출신자라는 이유로 엄친아라고 불렸다.
그러더니 외모까지 엄친아 조건에 추가됐다. 결국 뛰어난 외모에 좋은 집안이라는 배경 속에서 번듯한 학벌을 갖춘 이들을 엄친아라고 하게 됐는데, 심지어 ‘번듯한 학벌’이 없어도 집안 좋고 외모가 뛰어나면 엄친아라고 하기도 했다.
이게 이상한 건 애초에 엄친아가 어머니가 자식한테 잔소리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너는 왜 내 지인의 자식만큼 못하는 거냐’라고 하는 것인데 거기에 부유한 집안이 들어간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부유한 집안 여부는 자녀 책임이 아닌 부모 책임이다. 부모가 자식에게 ‘너는 왜 내 지인 자식처럼 부유한 집 2세가 못 된 거냐’라고 잔소리할 수는 없다.
해외 유학파도 엄친아라고 하기가 어색한 게, 유학에는 보통 부모의 재력이 중요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가난한 집안의 아이가 해외에서의 학력과 경력을 쌓는다는 건 쉽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서민 부모가 자기 자녀에게 ‘왜 해외파가 아니냐’고 잔소리하기도 어렵다. 왜 해외 교포가 아니냐고 하기는 더 어렵다. 외모도 그렇다. 자식의 외모는 부모가 물려준 것이다. 그러니 외모 가지고 부모가 자식 탓을 할 수는 없다.
이렇게 집안의 부유함, 해외파, 뛰어난 외모 등은 부모가 자녀에게 뭐라고 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고, 굳이 말하자면 거꾸로 자녀가 부모에게 항변할 수 있는 사안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엄친아의 원래의 뜻과는 정반대로 변질됐다는 것이다.
대략 2010년 즈음부터 나타난 현상으로 보인다. 2009년에 한 매체에서 낸 기사를 보면 ‘얼굴 되고 집안 되고 머리까지 좋은’ 연예인을 엄친아 엄친딸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외모와 실력, 가문 등이 두루 뛰어난 사람을 일컫는 말’이라는 설명도 나왔다. 그리고 ‘학벌 좋고 부유한 집안 출신인 사람들이 대거 연예계에 뛰어드는 통에 연예계의 '엄친딸' '엄친아'들이 늘고 있다.’며 해외파인 중견 그룹 회장의 2세, 또 다른 해외파이며 궁전 같은 미국 저택에서 살았다는 IT업체 대표의 2세 등을 엄친아라고 소개했다. 아버지가 고위 공직자 출신이고 어머니와 외삼촌도 유명인이라는 여성 연예인이 엄친딸이라고 소개되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엄친아, 엄친딸은 여전히 원래의 의미로 쓰이기도 하면서 때로는 그 반대의 의미까지 담는 괴상한 단어가 돼버렸다. 이 말이 이렇게 이상하게 확장된 건 요즘 세태와 관련이 있다. 엄친아가 ‘누구나 선망하는 완벽한 사람’을 상징하는 말이 됐는데, 요즘 사람들이 생각하는 완벽의 중요한 조건이 집안과 외모 등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이것들이 엄친아의 조건으로 들어간 것이다.
엄친아의 뜻이 반대로 확장될 정도로 요즘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이 외모, 집안, 학력 등을 중시한다는 뜻이다. 그런 게 뛰어난 사람들을 선망하고 그들에게 찬사를 보내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그 반대로 이런 부분에서 떨어지는 사람들을 향한 멸시가 크다는 뜻이기도 하다.
좋은 외모, 좋은 집안, 좋은 학력 등에 대한 선망이야 언제나 있어왔던 것이지만 과거엔 요즘처럼 심하진 않았다. 요즘엔 부유하고 뛰어난 사람을 선망하면서 그 반대엔 조롱을 보내는 경우가 많다. 젊은 누리꾼들이 대놓고 지방대를 비하하는 말을 만들어 쓰면서 차별에 나서기도 하고 외모 공격도 다반사다. 최근엔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주인공들 외모가 뛰어난데 디즈니 영화 주인공들은 못 생겼다면서 디즈니를 조롱한다. 중소기업을 비하하는 신조어까지 만들어 중소기업과 그 직원을 조롱하기도 한다.
어렸을 때부터 경쟁에서 이겨 승자가 되라는 경쟁교육만을 받고 자라, 사회를 우열 서열로 보는 수직적 가치관이 내면화됐기 때문이다. 승자, 강자를 향한 선망이 극에 달했다.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승자가 아니라는 점이다. 승자독식 구조에서 승자는 어차피 소수다. 대부분의 경우에 약자에 대한 차별, 조롱은 결국 나 자신에 대한 멸시일 수밖에 없다. 대부분은 좋은 외모, 좋은 학력을 가지지 못했고 부자도 아니니까. 그렇기 때문에 약자를 멸시할수록 나 자신의 자존감이 하락하게 된다. 그럴수록 박탈감과 불안감에 빠져 남을 공격하지만 그런 방식으론 자존감을 고양시킬 수 없을 것이다.
조건 없이 타인을 존중해야 나 자신도 조건 없이 존중할 수 있다. 우열, 승패로 사람의 급을 나누고 멸시하는 건 자해적 행위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에겐 당연히 스스로에 대한 공격이고, 소수의 승자도 약자를 멸시하는 사고방식으론 정서적으로 황폐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을 그 자체로 존중해야, 내가 나에게도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모두가 존중 받는 사회에선 고외모 고재산 고학력 등에 극한 선망도 줄어들 것이다.
글/ 하재근 문화평론가
0
0
기사 공유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