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한마디가 마음의 결을 흔들어 놓을 때가 있다. 아이의 천진한 물음은 굳게 닫힌 감각의 문을 열고, 세월 속에 묻어두었던 사랑의 본질을 일깨운다. 어느 날, 손자의 엉뚱한 질문 하나가 나를 되돌아보게 했다. 그 말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보이지 않던 마음의 그림자를 비추는 한 줄기 빛이었다.
작가가 지은 ‘손녀’라는 제목의 시 ⓒ
“대구에 있는 딸로부터 전화가 왔다/ 금요일에 올라온다고// 딸 보는 것도 반갑지만/ ‘할부지’하면 달려오는 손녀가 더 기다려진다// 오랜만에 만난 손녀/이야기하는 것이 청산유수다.” 이것은 내가 쓴 ‘손녀’라는 시의 첫머리다. 손자가 태어나기 전 세 살배기 손녀의 해맑은 웃음을 담은 기록이다. 벽에 걸어 놓은 시를 유심히 바라보던 손자가 물었다. “할아버지 손녀의 반대는 뭐예요?” “손자란다” “그런데 왜 손자는 없어요?”라고 되묻는 것이 아닌가. 여덟 살 난 손자의 말끝은 장난스러웠지만, 그 속에는 서운함이 배어 있었다. 누나의 이야기는 시 속에 남아 있는데, 자기의 흔적은 글 어딘가에도 보이지 않는다는 섭섭함이었다. 순간 말을 잃고 가슴이 먹먹해졌다. 아무것도 모르는 줄 알았는데 벌써 이런 감정을 에둘러 표현하다니. 단순한 철없는 투정이 아니라 자신도 사랑받고 싶다는 은유적 호소임을 깨달았다. 그의 눈빛은 마치 작고 맑은 거울 같았다. 그 안에는 내 무심함이 비쳤고, 그 거울을 통해 오래된 나의 그림자를 마주했다.
사랑스런 손자의 모습 ⓒ
여름방학을 맞아 딸네 가족이 해외에서 돌아왔다. 오랜만의 만남에 손녀는 잽싸게 달려와 할머니 품에 안긴다. 손자도 뒤따라 달려왔지만, 이미 누나에게 자리를 빼앗기자 마지 못해 내 품에 안겼다. 손자의 눈에는 언제나 자신이 뒤로 밀린 듯한 아쉬움이 남았으리라. 손녀는 어려서부터 총명했다. 글자를 모르던 시절에도 책 제목만 말해주면 책장을 뒤져 가져왔고, 자동차 앞 유리가 깨져 금이 가는 모습을 보고 시를 쓸 정도로 감수성이 깊었다. 청소년문학상 대상을 받는 일까지 있으니 가족의 관심이 손녀에게로 더 기울어진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어린 손자의 마음에 이런 분위기는 고스란히 전해졌으리라. 사람의 사랑은 빛처럼 흐른다. 한쪽을 더 비추면 다른 쪽은 그만큼 그림자가 진다. 나는 그림자 속의 손자를 너무 늦게 보았다.
할머니와의 행복해하는 손녀 ⓒ
손자의 질문은 나를 되돌아보게 했다. 자식을 키울 때도 그랬다. 공평하게 사랑했다고 믿었지만, 아이들의 눈에는 달리 비친 모양이다. 훗날 딸이 “엄마 아빠는 내가 공부를 잘하고 말썽도 부리지 않았는데 오빠를 더 챙겼죠”라고 말했을 때는 적잖이 당혹했다. 딸이고, 약한 동생이라 더 챙겼는데. 에머슨의 말처럼 “공정한 마음은 가장 큰 사랑”이라 했지만, 사랑의 무게는 주는 사람이 아니라, 받는 이가 헤아리는 법이다. 손자에게 나도 모르게 무심했을지 모른다. 손녀의 영특함이 돋보여 자연스레 더 관심이 쏠렸을 뿐인데, 손자의 마음속에서는 ‘나는 덜 사랑받는다’라는 서운함이 느껴지지 않았을까. 작은 마음의 떨림도 놓치지 않고, 손주들의 눈빛 하나, 목소리의 온기까지 살펴야 함을 새삼 깨닫는다. 사랑은 저울이 아니다. 그러나 아이의 마음에는 언제나 저울이 있다. 그 미세한 기울기를 이제야 읽는다.
아버지와 딸과의 대화 장면 ⓒ
‘나는 누나보다 할아버지를 더 좋아했는데, 왜 누나에 대한 시만 있을까.’ 손자는 서운함을 원망으로 표현하지 않았다. 대신 “손녀의 반대는 뭐예요?”라는 천연스러운 질문 속에 자신의 서운함을 살며시 숨겨 두었다. 자신을 향한 사랑을 확인받고 싶으면서도 할아버지를 곤란하게 만들지 않으려는 너그러움이 담긴 것이다. 그날 밤, 오랫동안 손자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마침 문학단체의 시화전 원고 청탁을 차일피일 미루던 터였는데, 손자의 말 한마디가 내 안에 불씨를 지폈다. ‘그래, 이번엔 너를 위해 시를 써야겠다.’ 그렇게 며칠을 곱씹으며 태어난 시의 제목은 ‘꼬마 태양’이다. 시는 언제나 누군가를 향한 마음의 등불이다. 그날의 불씨는 내 안에서 오래도록 꺼지지 않았다.
작가가 지은 ‘꼬마 태양’이라는 손자에 대한 시 ⓒ
“할아버지, 손녀의 반대는 뭐예요/ 말끝은 웃음인데/ 누나에 대한 시샘과/ 자기의 관심 표명이 담겼구나// 그래, 너도 있지/ 툭 하면 뛰어와/ 내 무릎은 네 전용 의자지/ 너는 나의 꼬마 태양// 엉뚱한 말투 속엔/ 세상을 향한 궁금함이 반짝거린다// 걱정 마라/ 내 속엔 언제나/ 너도 함께 자라고 있단다.” 짧은 시지만, 손자의 마음에 박힌 작은 그림자를 걷어주고 싶었다. 손녀에게만 빛이 쏠린 것이 아니라, 손자 역시 내 세계를 환히 밝히는 또 하나의 태양임을 전하고 싶었다. 한 줄의 시는 때로 천 마디의 사과보다 따뜻하다. 시로써 손자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그 미소 속에서 오히려 내가 위로받았다.
무의도 하나개해수욕장에서 조개 잡는 가족 ⓒ
아이는 어른들의 시선에 예민하다. 눈빛 하나, 손길 한번에도 자신이 소중히 여겨지는지, 사랑받고 있는지 알아챈다. 손녀와 손자 사이에 작은 경쟁은 단순한 투정이 아니라 사랑을 확인받으려는 간절한 몸짓이다. 사랑은 마음속에만 담아 두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말과 손길로 전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손자의 물음에 이제야 제대로 답을 할 수 있다. “그래, 너는 나의 꼬마 태양이란다” 말은 사랑의 그릇이다. 진심을 담는 순간, 세상의 모든 관계가 따뜻해진다.
누나를 다정스럽게 안고 있는 동생 모습 ⓒ
손자의 물음은 나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었다. 내가 믿었던 사랑의 균형이 아이의 눈에는 전혀 다른 무늬로 비칠 수 있음을 알았다. 손녀가 내 삶의 가지마다 피어난 꽃이라면, 손자는 하루를 환히 밝히는 태양이다. 하나는 향기로, 또 다른 것은 빛으로. 둘이 함께 내 세상을 채운다. 오늘도 두 손주가 내 무릎에 앉기를 기다린다. 그 작고 따뜻한 무게 속에 세상의 어떤 시보다 더 깊은 사랑이 자라나고 있음을 안다. 삶의 끝자락에서도 나는 여전히 배우고 있다. 사랑은 주는 일이 아니라, 깨닫는 일임을. 손주들의 웃음 속에 내 남은 세월의 햇살이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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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남대 작가 ndcho5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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