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제조업....전혀 다른 한 해
전략산업 ‘질주’ 전통산업 ‘체력전’
요즘 산업 현장을 들여다보면 같은 경기 환경 속에서도 산업별 체감 온도는 분명히 다르다. ⓒ데일리안 AI 삽화 이미지
산업 현장을 보다 보면 같은 ‘제조업’이라는 이름 아래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질 때가 있다. 지난해 그 간극은 유난히 선명했다. 어떤 산업은 주문서가 쌓이며 몸값을 다시 매겼고 어떤 산업은 생존 전략을 고민하며 한 해를 정리해야 했다.
조선과 전력은 ‘잘 나간다’는 표현이 직관적으로 와닿는 산업이 됐다. 글로벌 공급망 재편 속에서 조선은 단순한 수주 산업을 넘어 전략 산업으로 자리매김했다. 군함 유지·보수·정비(MRO)까지 역할이 확장되며 ‘한국 조선이 아니면 안 된다’는 말이 업계 안팎에서 공공연하게 나온다. 전력 역시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확산과 에너지 전환이라는 거대한 흐름과 함께 핵심 인프라로 재조명받고 있다. 전력망과 변압기, 송·배전 설비는 경기 변동과 무관하게 반드시 투자해야 할 영역이 됐다.
방산도 확실히 잘 나가는 쪽에 속한다. 유럽과 중동, 아시아를 중심으로 안보 불확실성이 상수가 되면서 무기 도입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됐다. 완제품 수출에 그치지 않고 현지 생산과 공동 개발, 유지·보수 계약으로 이어지는 구조가 자리 잡으며 장기적인 수익 모델도 만들어지고 있다.
반면 철강과 석유화학, 배터리는 한결같이 버텨야 하는 산업으로 묶인다. 철강은 공급 과잉과 수요 둔화, 탈탄소 전환이라는 압박 속에 놓여 있다. 부동산과 토목 중심의 수요가 약해진 상황에서 가격 경쟁력만으로 버티기엔 한계가 뚜렷하다. 석유화학 역시 글로벌 증설 여파와 중국발 저가 공세 속에서 침체의 골이 깊어지고 있다. 배터리는 성장 산업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전기차 캐즘(일시적 수요 정체)과 투자 부담이 겹치며 체력전에 들어간 모습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 격차가 단순한 업황 사이클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잘 나가는 산업과 버텨야 하는 산업을 가르는 기준에는 국가 전략과 구조 변화가 겹쳐 있다. 조선·전력·방산은 안보와 에너지, 기술 패권이라는 국가적 과제와 맞물리며 수요의 방향이 비교적 또렷하다. 반대로 철강과 석유화학, 배터리는 글로벌 경쟁 구도 속에서 스스로 체질을 바꾸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려운 국면에 놓였다.
이 때문에 산업계의 고민도 달라진다. 잘 나가는 산업은 어떻게 속도를 유지하고 기회를 넓힐지 고민하고, 버텨야 하는 산업은 무엇을 줄이고 무엇을 남길지를 고민한다. 철강사가 고부가 강재와 특수강으로 방향을 틀고 석유화학이 범용 제품 대신 스페셜티로 눈을 돌리며, 배터리 업체들이 단순 증설보다 기술과 수익성에 방점을 찍는 이유다.
산업은 늘 한 방향으로만 움직이지 않는다. 호황과 불황은 반복되고 오늘의 주력 산업이 내일의 부담이 되기도 한다. 다만 분명해진 것은 있다. 지금의 국면에서 ‘잘 나간다’는 것은 단순히 매출이 늘었다는 뜻이 아니고, ‘버틴다’는 것은 손 놓고 시간을 보내겠다는 의미도 아니다. 각 산업이 처한 자리에서 얼마나 빠르게 구조를 읽고 방향을 잡느냐가 다음 사이클을 가를 것이다. 회복을 기대하기보다 역할을 다시 정의해야 하는 시점에 와 있다.
작년 산업 현장을 돌아보며 자주 들은 말이 있다. “이제는 예전 방식으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잘 나가는 산업이든, 버텨야 하는 산업이든 그 말만큼은 예외가 없어 보인다. 산업을 본다는 것은 이 갈림길이 어디에서 만들어지고 있는지를 짚는 일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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