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뷔 15년 만에 첫 코미디 뮤지컬 도전
3월 22일까지 LG아트센터 서울
제멋대로 뻗친 초록색 머리카락에 퀴퀴한 곰팡내가 풍길 듯한 흑백 줄무늬 슈트. 퀭한 눈매는 제법 불량해 보이고, 입은 열면 거친 쉣소리와 함께 통제 불능의 저속한 농담이 쏟아진다. 무대 위를 겅중겅중 뛰어다니며 쉴 새 없이 관객에게 말을 걸고, 우스꽝스럽게 엉덩이를 흔들어대며 극의 흐름을 제멋대로 끊어버리기도 한다. 그럼에도 도무지 미워할 수가 없다. 김준수가 연기하는 기괴하도고 익살스러운 유령 비틀쥬스다.
ⓒCJ ENM
김준수는 LG아트센터 서울에서 공연 중인 뮤지컬 ‘비틀쥬스’에서 주인공 비틀쥬스를 연기하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뮤지컬 데뷔 15년 만에 김준수가 ‘비틀쥬스’로 파격적인 변신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의 지난 이력을 복기해 보면 이는 가장 ‘김준수다운’ 선택이자 확장이라고도 볼 수 있다.
2010년 ‘모차르트!’로 뮤지컬에 데뷔한 이래 김준수의 대표작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줄곧 ‘판타지’와 ‘비현실성’이었다. 그는 ‘엘리자벳’의 토드(죽음), ‘드라큘라’의 드라큘라 백작, ‘데스노트’의 엘(L), ‘도리안 그레이’의 도리안 등을 거치며 현실 세계의 평범한 인간보다는 초월적이거나 관념적인 존재를 연기할 때 독보적인 위치를 점해왔다.
특유의 허스키하고 금속성 짙은 음색은 현실적인 대사보다는 드라마틱한 넘버나 판타지적 설정을 납득시키는 데 효과적이었다. 관객들은 김준수가 연기하는 비현실적 캐릭터들이 뿜어내는 기이한 에너지와 비극적 서사에 익숙해져 있다. 즉 무대 위에서 가장 현실과 동떨어진 존재를 연기함으로써 자신의 리얼리티를 구축해 온 배우다.
이러한 행보에 변화의 조짐이 보인 것은 직전작인 뮤지컬 ‘알라딘’부터다. 한국 초연 ‘알라딘’의 타이틀롤을 맡아 그간의 무거움과 비극성을 덜어내고, 재치 있고 날렵한 ‘디즈니 히어로’로서의 가능성을 입증했다. 하지만 ‘알라딘’이 김준수가 가진 밝은 에너지와 쇼맨십을 예열하는 단계였다면, ‘비틀쥬스’는 그 에너지를 기괴하고 폭발적인 방식으로 비틀어 터뜨리는 ‘본 게임’과도 같다. 알라딘이 보여준 꿈과 희망의 판타지를 ‘비틀쥬스’의 냉소와 풍자로 180도 뒤집은 것이다.
이번 ‘비틀쥬스’가 흥미로운 지점은 바로 이 ‘비현실설’이라는 공통분모를 유지하되, 그간 그의 연기를 지배했던 ‘비극성’을 소거하고 ‘멋짐’에 대한 강박을 완전히 내려놓았다는 데 있다. 비틀쥬스는 외로움에 몸부림치는 존재라는 점에서 ‘드라큘라’나 ‘엘리자벳’ 등 전작들과 궤를 같이하지만, 그 외로움을 해소하는 방식은 처절한 절규가 아닌 왁자지껄한 소동과 유머를 기반으로 한다.
김준수는 이 지점에서 아이돌 출신으로서 체득한 정확한 박자 감각과 신체 사용 능력을 코미디로 치환한다. 관객을 향해 거침없이 독설을 날리고 제4의 벽을 넘나드는 모습에서는 과거 엘(L)으로써 보여줬던 기괴한 천재성이 코믹하기 변주된 듯한 인상마저 든다.
실제로 김준수의 ‘개그 욕심’ ‘코미디 욕심’은 팬들에겐 낯설지 않다. 여러 차례 팬미팅, 콘서트를 통해 이 욕망을 분출해왔기 때문이다. 이번 ‘비틀쥬스’는 그런 면에서 완전히 새로운 무언가를 ‘창조’해냈다기보다, 자신이 가진 무기들을 재배열해 ‘웃음’이라는 결과물을 만들어낸 것과도 같다. 쇳소리 섞인 목소리는 악동 유령의 그로테스크함을 살리는 요소로, 무대를 쉼 없이 뛰어다니는 에너지는 산만한 캐릭터의 성격을 대변하는 장치로 작용한 셈이다. 단 한 가지, 이번 작품을 통해 김준수가 증명한 것은 ‘무거움’을 내려놓고도 그가 무대를 충분히 장악할 수 있을 만큼의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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