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협 '배임죄 문제점과 개선방안' 세미나
경제 전문가들 "배임죄 규정 모호" 한목소리
경영판단원칙 신설·배임죄 전면적 폐지 등 촉구
(왼쪽부터) 류혁선 KAIST 경영공학부 교수, 홍영기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부원장, 안태준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신현윤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강원 세종대 경영학부 교수, 장진환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이 10일 FKI타워 컨퍼런스센터에서 열린 '배임죄 문제점과 개선방안' 세미나에서 토론하고 있다. ⓒ데일리안 고수정 기자
더불어민주당이 노란봉투법(노동조합법 제 2·3조 개정안), 상법 개정안 등 재계가 반대해온 법안들은 속전속결로 추진하면서도 재계가 제시한 배임죄 폐지 작업에는 부지하세월이다. 경제 전문가들은 배임죄 규정이 모호해서, 형법상 죄형법정주의가 요구하는 '명확성의 원칙'과 예측가능성을 저해할 수 있다고 지적하면서 경영판단원칙의 신설, 배임죄의 전면적 폐지 등을 촉구했다.
한국경제인협회는 10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FKI 컨퍼런스센터에서 '배임죄 문제점과 개선방안' 세미나를 열었다. 김창범 한경협 상근부회장은 개회사에서 "지금은 인공지능(AI), 배터리, 바이오, 미래 모빌리티 등 미래 먹거리 선점을 위해 대규모 투자가 필요한 시점이나, 배임죄로 인해 기업인들이 모험적 결단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기업의 경영 불확실성을 해소하고, 혁신의 원천인 기업가정신을 높이기 위해 배임죄 제도의 합리적인 개선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배임죄 개선을 중심으로 한 이른바 '경제형벌 합리화' 논의는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해 7월 "우리나라에서는 기업 경영 활동을 하다가 잘못하면 감옥에 갈 수 있다는 인식 때문에 투자를 망설이는 경우가 있다"고 언급한 이후 본격화됐다. 그동안 배임죄는 경영 판단의 결과, 회사에 재산상 손해가 발생했다는 이유만으로도 형사 책임을 물을 수 있어 기업 활동 전반을 위축시키는 수단으로 작용해 왔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하지만 민주당은 배임죄 개선 등에 대해선 속도를 내고 있지 않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경제8단체는 최근 "배임죄 개선이 늦어지면서 기업들이 경영 의사결정을 유보하거나 기피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 있다"며 "기업이 적극적 투자와 혁신 활동을 추진할 수 있도록 3차 상법 개정에 앞서 경영판단 원칙 명문화 등 배임죄 개선을 서둘러야 한다"고 촉구한 바 있다.
안태준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10일 FKI타워 컨퍼런스센터에서 열린 '배임죄 문제점과 개선방안' 세미나에 참석해 주제발표를 하고 있다. ⓒ데일리안 고수정 기자
이런 문제의식은 이날 세미나에서 학계의 문제 제기로도 이어졌다. 주제 발표에 나선 안태준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신의칙상의 의무 위반'이 곧 범죄가 될 여지가 있는 구조가 되어, 배임죄의 성립 범위를 예측하기 어렵게 확대시켰다"며 "경영자들이 자신의 행위가 형법상 금지된 행위인지 사전에 알기 어려운 것도 이러한 이유에 기인한다"고 지적했다.
안 교수는 법익에 대한 위험 상태를 야기하는 것만으로 구성요건이 충족되는 범죄인 '위험법' 법리를 오남용할 수 있는 문제도 지적했다. 그는 "현실적인 손해가 없더라도 '손해 발생의 위험'만으로 처벌할 수 있기 때문에, 실패할 수 있는 경영판단까지도 범죄로 몰아갈 소지가 생겼다"며 "결국 민간 영역의 계약 위반 등도 쉽게 처벌이 가능한 '민사의 형사화'를 초래하여, 기업인들의 적극적인 경영 의지를 약화시킬 우려가 있다"고 설명했다.
안 교수는 주요국 사례를 비교해봐도 한국의 배임죄 규정과는 차이를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세계 주요국들은 배임죄와 같은 규정이 없거나 그에 상응하는 조항이 있더라도 기업 경영상의 판단을 형사범죄로 처벌하는 데 있어 매우 신중한 경향을 보인다고 볼 수 있다"며 "이는 한국의 과도한 '기업 경영의 형사화' 관행과 극명히 대조된다고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실제 독일은 미수범을 처벌하지 않으며, 업무상 배임죄나 특별배임죄 가중 규정이 없다. 일본은 고의 외에 '자기 또는 제3자의 이익을 꾀하거나, 본인에게 손해를 가할 목적'이라는 엄격한 주관적 요건을 요구한다. 미국과 영국은 배임죄 규정 자체가 없고, 유사 조항이 있더라도 적용 범위가 제한적이다.
안 교수는 배임죄가 기업경영에 미치는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세 가지 입법 대안을 제시했다. 첫 번째 안은 경영판단원칙의 신설이다. 이익 충돌 없이 충분한 정보를 바탕으로 내린 합리적 결정은 배임죄의 '임무 위배'가 아닌 것으로 간주하는 조항을 신설하자는 것이다. 두 번째 안은 배임죄의 전면적 폐지다. 배임죄를 폐지하고 처벌이 꼭 필요한 유형만 독자적인 구성요건으로 구체화해 입법하는 것이다. 세 번째 안은 구성요건을 정교화하는 방법이다. 일본처럼 '명백한 목적'을 추가하거나, '타인의 사무' 범위를 제한하는 등 문언을 정교하게 개정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토론에 참여한 강원 세종대 경영학과 교수는 경영판단 영역에서는 형사 개입을 최소화하고, 무죄추정 원칙을 명확히 하는 개편을 요구했다. 강 교수는 "경영인이 과도한 소명 책임을 부담하게 되면 무죄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방어에 경영 역량을 소진하게 되고 이는 기업 경쟁력의 약화로 직결된다"고 꼬집었다.
강 교수는 "상법 개정을 통해 이사의 충실의무가 법인에서 주주로까지 확대되고, 중대재해처벌법과 노동관계 입법을 통해 배임 책임의 적용 범위가 넓어진 상황에서는 경영인이 정상적인 경영 활동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는 사법적 기준 제시가 더욱 중요해졌다"며 "민간 경영인에 대해서는 배임죄의 적용을 합리적으로 제한해야 한다. 배임죄는 본질적으로 이윤 창출을 임무로 하는 자보다 공정성과 신뢰를 유지할 책무를 지닌 자에게 더욱 엄격히 적용되어야 할 법"이라고 강조했다.
김창범 한국경제인협회 부회장이 10일 FKI타워 컨퍼런스센터에서 열린 '배임죄 문제점과 개선방안' 세미나에 참석해 인사말을 하고 있다. ⓒ한경협
류혁선 KAIST 경영공학부 교수도 배임죄 규정의 모호성이 형사책임의 확대를 불러왔다고 설명했다. 법원이 배임죄의 '임무 위배'를 소위 '기대 신뢰를 깼다'는 '신의칙 위반'으로까지 해석을 확장시켰다는 것이다. 또한 배임죄 성립 여부를 판단할 때, 행위 당시의 규범적 판단보다는 사후적 결과 평가가 상대적으로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고도 지적했다.
류 교수는 "독일·일본의 배임죄는 '형법의 보충성 원칙' 즉, 형벌권이 민사적 통제 장치를 보완하는 최후의 수단으로 기능한다"면서 "우리나라의 배임죄도 형사책임과 민사책임의 경계를 보다 명확히 재설정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경영판단원칙을 충실히 적용해 형사책임이 사후적으로 확장되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배임죄를 둘러싼 논의는 결국 실패한 경영 판단과 형사처벌의 대상이 되는 범죄 행위를 어디에서 구별할 것인지, 그리고 형벌이 어떤 경우에 개입해야 하는지에 대한 기준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귀결된다"며 "이러한 기준이 제도적으로 명확히 정립되지 않는 한, 배임죄를 둘러싼 논쟁은 규제 완화와 규제 강화라는 이분법 속에서 반복될 수밖에 없다"고 꼬집었다.
아울러 장진환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경영판단원칙의 엄격한 적용과 주관적 고의의 개별적 심사를 통해, 단순한 경영 실패가 형사책임으로 전이되는 문제를 방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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