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사남' 장항준 감독, 피의 계유정난 대신 영월 청령포를 택한 이유 [D:인터뷰]

류지윤 기자 (yoozi44@dailian.co.kr)

입력 2026.02.22 12:43  수정 2026.02.22 12:43

500만 돌파

장항준 감독 “실패한 정의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장항준 감독이 신작 '왕과 사는 남자'로 자신의 필모그래피를 다시 쓰고 있다. 22일 영화진흥위원회 통합전산망에 따르면 이 영화는 누적 관객 수 526만 명을 돌파하며 장항준 감독 커리어 사상 최고의 흥행작이 됐다.


개봉 3주 차 주말에도 일일 관객 수 58만 명을 기록하며 꺾이지 않는 기세를 이어가고 있는 장항준 감독은, 이번 신작을 통해 '기억의 밤'(2017)과 '리바운드'(2023) 등 전작의 아쉬움을 완전히 털어냈다.


‘왕과 사는 남자’는 조선의 제6대 왕 단종이 폐위된 후 유배된 강원도 영월에서 촌장 엄흥도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과 함께 보낸 인생의 마지막 시기를 그린 작품이다. 역사가 단 한 줄로 기록한 인물 엄흥도 행적에 영화적 상상력을 더해, 거창한 권력 투쟁이 아닌 낮은 곳에서 피어난 인간애와 충절을 담아냈다.


ⓒ쇼박스


이러한 폭발적인 흥행의 배경에는 탄탄한 서사와 배우들의 열연이 자리한다. '믿고 보는 배우' 유해진은 세속적인 촌장에서 단종의 마지막 길을 지키는 의인으로 변모하는 엄흥도 역을 맡아 극의 중심을 잡았고, 박지훈은 유약한 소년 왕의 이미지를 벗고 영특하고 기개 있는 단종을 완벽히 소화하며 입소문의 주역이 됐다. 역사적 비극을 신파가 아닌 담백하고 묵직한 울림으로 풀어낸 연출력 역시 전 세대 관객을 극장으로 불러 모으는 결정적 요인으로 꼽힌다.


무엇보다 기존 사극과의 확실한 ‘차별화’가 대중의 선택을 이끌어냈다. 이미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가 계유정난이라는 드라마틱한 역사적 사건을 선점했다. 수양대군 야심과 한명회 지략이 충돌하는 권력 투쟁은 그 자체로 완벽한 소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항준 감독은 유배지 영월에 남겨진 단종의 최후와 그 뒷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세조와 한명회 이야기는 이미 드라마틱한 명작들이 많잖아요. 똑같은 걸 재생산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저는 기록이 거의 없는 '단종의 최후'와 그 뒷모습에 집중했습니다. 우리는 흔히 성공한 불의에 박수 치고 '돈 많으면 장땡'이라고 하지만, 과연 그게 인간적인 삶일까요? 실현되지 못한 정의라고 해서 그냥 잊혀도 되는 걸까요? 실패한 의(義)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진정한 추모란 무엇인지 '엄흥도'라는 낮은 자의 시선으로 묻고 싶었어요."


이러한 기획 의도는 자연스럽게 '엄흥도'라는 인물로 집약된다. 영화는 화려한 권력 중심지가 아닌 변두리 영월에서 이름 없이 사라질 뻔한 가치를 수습한 한 남자의 행적을 쫓는다. 거창한 명분보다 인간적인 도리가 우선시되는 순간을 포착함으로써, 관객들에게 '누구를 위해, 무엇을 지킬 것인가'라는 보편적인 울림을 전한다.


"역사 속 엄흥도는 삼족을 멸한다는 엄포에도 불구하고 버려진 단종의 시신을 거둔 분이에요. 조선의 가치를 목숨 걸고 지킨 진짜 주인공이죠.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대원들이 '우리가 구하려는 라이언이 제발 그럴 가치가 있는 사람이길' 바라잖아요? 저도 관객들이 단종을 보며 '우리가 지킬 가치가 있는 소년'이라고 느끼길 바랐어요. 단종이 나약해서 밀려난 게 아니라, 정치적 보호막이 없는 상태에서 정통성을 지키려다 꺾인 영특한 군주였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쇼박스

장항준 감독은 시나리오 수정 단계부터 이미 주인공 엄흥도 역에 유해진을 내정해 두고 작업을 진행했다. 대사 한 마디마다 유해진의 호흡을 녹여냈고, 실제 현장에서 유해진은 감독의 예상을 뛰어넘는 감정의 진폭을 보여주며 극을 이끌었다.


"시나리오 고치면서 아예 유해진이라는 배우를 머릿속에 박아두고 썼어요. 쓰다 보니 대사마다 유해진 씨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죠. 엄흥도는 유해진 씨 실제 성격이랑은 좀 거리가 있어요. 근데 촬영장에서 보니까 정말 소화하는 능력이 놀랍더라고요. 이런 에너지를 끝까지 책임지고 버텨낼 배우는 대한민국에 정말 몇 없을 거예요."


단종은 소년과 성인 그 모호한 경계에 서 있는 복합적인 인물이다. 장항준 감독은 박지훈이 가진 동안의 외모 뒤에 숨겨진 묵직한 침착함을 발견했다. 20대 배우에게서 보기 힘든 진중함이 곧 단종의 기개와 연결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당시 단종이 참 애매한 나이였어요. 어른도 아니고 아이도 아닌데, 박지훈 씨가 그런 역할을 하기에 굉장히 적합했어요. 무엇보다 이 나이대 20대 남자 배우들 가운데 이렇게 침착한 경우가 드물어요. 생각이 들뜨거나 감정이 쉽게 표출되지 않거든요. 오늘 기분이 어떤지 잘 모르겠을 정도로 늘 진중한 상태예요. 그런 점이 인상적이었죠. 쉽게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점이 인간적으로도 큰 장점이라고 생각했고, 유해진 씨 역시 그런 부분을 가장 마음에 들어 했을 거예요."


영화의 긴장감을 완성하는 또 다른 축은 유지태가 연기한 한명회다. 장항준 감독은 그동안 사극에서 소모되었던 간신 한명회의 이미지를 과감히 탈피했다.


"한명회라는 인물에게 어느 정도의 전형성은 필요하겠지만, 유지태 씨랑은 결이 좀 다른 캐릭터를 만들어보자고 했죠.훗날 부관참시를 당하고 간신으로 낙인찍히면서 외모도 볼품없게 기록됐지만, 사실 당대 기록을 보면 정반대예요. 기골이 장대하고 풍채도 좋은 데다 무예까지 출중한 명문가 도련님이었죠. 전 차라리 그게 더 반가웠어요. 그렇게 위압감 있는 실권자의 모습이 제가 이번 영화에서 보여주고 싶었던 한명회의 실체에 더 가까웠으니까요."


유해진과 박지훈이라는 두 배우가 빚어낸 호흡은 이 영화의 정서적 온도를 결정짓는 핵심이다. 장항준 감독은 엄흥도와 이홍기(단종)라는 두 인물의 관계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켜켜이 쌓여가는 과정에 공을 들였다.


"엄흥도와 단종의 관계는 상전에서 친구로, 다시 아버지와 아들 같은 관계로 깊어집니다. 쌀밥을 나눠 먹는 장면은 신분의 벽을 허물고 마음을 연 수평적 우정을 의미하죠. 세속적이었던 엄흥도가 목숨을 거는 용기를 내고, 어린 단종이 왕의 위엄을 찾아가는 '성장'이야말로 우리 영화의 중심입니다.


영화의 시각적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장치들도 단순한 볼거리를 넘어 서사의 상징성을 담아내는 데 집중했다. 제작 여건상 기술적인 아쉬움이 남는 대목도 있지만, 감독은 그보다 이야기의 본질과 배우들의 연기가 관객에게 닿는 것이 더 중요했다고 강조했다.


"뗏목은 단종이 고립된 섬에 갇혀 있다는 걸 보여주는 장치예요. 살아서 건너고 싶었던 강을 결국 죽어서야 건너게 되는 비극을 담았죠. 호랑이는 '왕의 자질'을 상징합니다. 산골 마을 사람들이 단종에게서 진짜 왕의 위엄을 발견하는 계기가 바로 호랑이 사건이거든요. CG에 대한 아쉬운 소리도 들리지만, 물리적인 시간 한계 속에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연기나 시나리오가 별로라는 소리보다 차라리 CG 얘기 듣는 게 감독 입장에선 마음 편해요. (웃음)"


금성대군은 비극적인 상황 속에서도 단종을 끝까지 수호하려 했던 인물이자, 극 중 인물들 사이에서 가장 강력한 권위와 기개를 상징한다. 장항준 감독은 이 역할을 소화할 배우로 고결하면서도 강인한 이미지를 동시에 갖춘 이준혁을 낙점했다


"금성대군은 이 작품에서 유일하게 실질적인 힘을 가진 어른이자 고결한 왕족이에요. '힘 없는 정의는 무기력하고, 정의 없는 힘은 폭력'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정의는 힘이 있을 때 비로소 성취될 수 있거든요. 그래서 금성대군은 기개가 넘치는 '진짜 하얀 양반'이었으면 했고, 이준혁 씨가 그 이미지에 딱이었죠. 캐스팅 직후에 준혁 씨가 출연한 작품들이 줄줄이 터지는 걸 보면서 '아, 내가 인복은 있구나' 싶더라고요.(웃음)"




ⓒ쇼박스


감독으로서의 기술적인 완숙함보다 대중과의 정서적 교감을 우선시하는 태도는 그를 지탱하는 가장 큰 힘이다. 장 감독은 자신의 연출적 지향점은 완벽한 거장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영화라는 매개를 통해 관객과 진솔하게 대화하는 것에 있음을 명확히 했다. 2026년 한국 영화계의 활기가 지속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과 함께, 그가 오랜 시간 현장을 지킬 수 있었던 인간적인 비결도 엿볼 수 있었다.


"연출적으로 투박한 부분이 있을 수 있어요. 하지만 저는 거장이 되기보다 관객과 소통하는 감독이 되고 싶습니다. 2026년 한국 영화 시장이 다시 살아나고 있는데, 저희 영화가 그 바통을 이어받아 흥행에 일조했으면 좋겠어요. 제가 오래 장수하는 비결요? 앞뒤 안 가리고 솔직한 거, 잘 나간다고 거만하지 않고 못 나간다고 기죽지 않는 성격 덕분 아닐까요?(웃음) 그 에너지를 이번 영화에 다 쏟아부었습니다."

0

0

기사 공유

댓글 쓰기

'인터뷰'를 네이버에서 지금 바로 구독해보세요!
류지윤 기자 (yoozi44@dailian.co.kr)
기사 모아 보기 >
관련기사

댓글

0 / 150
  • 최신순
  • 찬성순
  • 반대순
0 개의 댓글 전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