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 전쟁에 '나프타' 수급 비상…석유화학 구조조정 시계 빨라지나

정진주 기자 (correctpearl@dailian.co.kr)

입력 2026.03.16 14:53  수정 2026.03.16 15:23

납사 t당 875달러 급등…호르무즈 봉쇄 우려에 원료 수급 비상

여천NCC FM 선언·NCC 가동률 60% 하락…석유화학 감산 확산

정부 비축유 2246만배럴 방출 추진…여수 석화단지 산업위기지역 검토

"나프타 쇼크, 준비 안 된 구조조정 촉발 가능성"

롯데케미칼 여수공장 전경. ⓒ롯데케미칼

중동 전쟁 여파로 납사(나프타) 수급에 비상이 걸리면서 국내 석유화학 업계가 감산에 들어갔다. 중국발 공급 과잉으로 이미 업황이 악화된 상황에서 원료 가격 급등과 공급 불안까지 겹치며 산업 전반의 부담이 커지고 있다. 업계에서는 이번 사태가 기존에 추진되던 석유화학 산업 구조조정 논의를 한층 압박하는 변수로 작용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16일 업계에 따르면 중동 전쟁 여파로 국제 유가가 급등하고 호르무즈 해협을 통한 원유와 납사 운송 차질 우려가 커지면서 아시아 석유화학 업계의 원료 수급 불안이 확대되고 있다. 납사는 원유 정제 과정에서 생산되는 탄화수소 혼합물로 에틸렌과 프로필렌 등 기초유분 생산에 사용되는 핵심 원료다.


시장조사업체 S&P 글로벌 에너지에 따르면 납사 가격은 최근 한 달 사이 약 50% 상승해 t당 875달러 수준까지 오른 것으로 나타났다. 이란의 보복 공격 이후 호르무즈 해협을 통한 선박 통행이 사실상 제한되면서 공급 확보 자체가 어려워질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원료 수급 불안이 커지면서 국내 석유화학 업체들도 가동률을 낮추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국내 최대 단일 에틸렌 생산 시설인 여천NCC는 최근 불가항력(Force Majeure)을 선언하고 최소 가동 수준으로 생산량을 줄였다. 롯데케미칼과 LG화학 역시 일부 고객사에 계약상 공급 의무를 정상적으로 이행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통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에서는 현재 국내 NCC 가동률이 기존 80~90% 수준에서 약 60% 안팎까지 낮아진 것으로 보고 있다.


업계에서는 최근 국제 유가 급등과 운송비 상승이 겹치며 원유 도입 비용 부담이 크게 커졌다는 설명이 나온다. 납사 등 석유화학 원료는 원유 정제 과정에서 생산되는 만큼 정유사의 원유 처리량이 줄어들 경우 관련 제품 공급도 연쇄적으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다.


이번 사태는 이미 침체 국면에 들어간 석유화학 업계에 추가적인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중국의 대규모 설비 증설로 글로벌 공급 과잉이 이어지는 가운데 전방 산업 수요까지 둔화하면서 국내 석유화학 기업들의 수익성은 최근 몇 년간 크게 악화된 상태다. 여기에 납사 가격 상승까지 겹치면서 에틸렌 스프레드가 더 축소될 가능성도 제기된다.


정부도 에너지 수급 안정과 산업 충격 완화를 위한 대응에 나섰다. 당정은 국제에너지기구(IEA)와 합의된 비축 원유 2천246만배럴을 향후 3개월 동안 단계적으로 방출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이번 주 중 에너지 산업 위기관리 단계를 기존 '관심'에서 '주의'로 격상하고 비축유 방출 계획을 구체적으로 발표할 예정이다.


현재 국내 원유 비축량은 약 208일분 수준이며 액화천연가스(LNG)는 9일분이다. 정부는 LNG의 경우 오는 12월 말까지 사용 가능한 물량을 확보한 상태라고 설명했다. 또 한국석유공사가 해외에서 생산하는 원유를 국내로 들여오는 방안도 추진 중이며 오는 6월까지 약 335만배럴을 추가 도입하는 계획을 검토하고 있다.


석유화학 원료 수급 불안이 장기화할 경우 산업 정책 대응도 확대될 가능성이 있다. 정부와 정치권에서는 알루미늄, 황, 납사 등 핵심 원자재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는 석유화학 업계를 지원하기 위해 여수 석유화학산업단지를 '산업위기 특별대응 지역'으로 지정하는 방안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전문가들은 이번 사태가 단순한 원가 상승을 넘어 산업 전반의 강제적 재편을 부르는 임계점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특히 에너지 안보의 취약성이 드러난 상황에서 정부의 단기적 가격 통제보다 근본적인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또한 한국의 에너지 안보 현주소는 주변국과 비교했을 때 더욱 취약한 것으로 드러났다. 일본은 장기적인 투자를 통해 해외 유전을 상당수 확보하고 비축 물량도 넉넉히 관리하고 있는 반면 한국은 하루 300만배럴에 달하는 막대한 물량을 전량 수입에 의존하고 있어 대안이 부족한 실정이다. 정부가 수입선 다변화를 제시하고 있으나 유일한 대안인 러시아산 도입마저 외교적 문제로 묶여 있어 사실상 실효성이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특히 석유화학의 핵심 원료인 나프타 재고가 2주일분 수준에 불과하다는 점은 산업 전체의 가동 중단 가능성을 높이는 치명적인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이덕환 서강대 화학과 명예교수는 현재의 위기 상황을 대안이 없는 심각한 상태로 규정했다. 이 교수는 "원래 석유화학 업황이 작년 초부터 굉장히 안 좋은 상황이었는데 이번 나프타 공급 충격은 그야말로 엎친 데 덮친 격"이라며 "지금까지는 느긋하게 준비된 구조조정이었다면 이제는 준비 안 된 구조조정에 휩쓸리게 될 가능성이 높으며 이 경우 사회적 피해는 훨씬 심각해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다만 준비되지 않은 구조조정이 동시에 진행될 경우 산업과 지역 경제에 미치는 충격이 더 커질 수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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