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정태세문단세'로 외우는 조선의 임금들 이름 중에서는 낯선 이름들이 몇 개 존재한다. 이들의 공통점은 재위 기간이 짧고 임금으로서의 업적이나 적거나 없다는 점인데, 특히 인종이 그러했다.
조선의 12번째 임금이자 최초로 반정을 통해 즉위한 인종은, 조광조를 숙청하면서 역사에 이름을 남긴 아버지 중종과는 달리 존재감이 극히 드물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재위 기간이 정말 짧았다. 서기 1544년 12월 14일에 즉위해서 다음 해 8월 17일에 세상을 떠났다. 해를 넘기기는 했지만 왕위에 있었던 기간이 불과 8달에 불과했다. 거기다 인종에게는 치명적인 장애물이 여럿 있었다. 원래 인종의 어머니는 장경왕후 윤씨였는데 안타깝게도 아들을 낳고 얼마 후에 산욕열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중종은 아내인 장경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새로운 중전을 맞이하려고 한다. 가장 유력한 후보는 후궁 중에서 중종의 총애를 받고 있던 경빈 박씨였다. 문제는 경빈 박씨는 중종과의 사이에서 이미 복성군이라는 아들을 낳은 상태였고, 인종보다 나이가 많았다. 따라서 경빈 박씨가 중전이 된다면 인종은 아마 왕세자의 자리에서 쫓겨났을 것이다. 하지만 신하들이 경빈 박씨의 신분이 미천하다는 이유로 반대했고, 파평 윤씨 집안의 여인을 새로 왕비로 맞아들인다. 그녀가 바로 인종의 계모이자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였다. 오래 전에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여인천하’의 주요 등장인물 중 한 명으로 경빈 박씨와 치열하게 다툼을 벌였다. 중종의 후계자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싸움이었는데 경빈 박씨는 자신의 아들 복성군을 내세웠고, 문정왕후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배다른 자식인 인종을 지지했다. 작서의 변과 가작인두의 변을 거치면서 경빈 박씨와 복성군이 사사되면서 인종은 한숨 돌리는 듯 했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변수가 생겼다.
창경궁 명정전 ⓒ직접 촬영
중종 29년인 서기 1534년 7월, 문정왕후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아들이 태어난 것이다. 그 순간부터 문정왕후에게 인종은 보호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아들을 위해서 어떻게든 넘어뜨려야 할 장애물이 되었다. 어릴 때 어머니를 잃고 의지하던 문정왕후의 돌연한 태도 변화는 인종에게 크나큰 상심으로 다가온 모양이다. 실록을 비롯한 정식 사서가 아닌 야사에는 인종을 미워하는 문정왕후의 모습이 아주 잘 담겨 있다. 거기에 아주 이상한 사건도 하나 발생했다. 중종 38년 서기 1543년 1월 7일에 벌어진 일이다.
밤. 삼경(三更). 동궁에 불이 났다.
삼경은 밤 11시에서 새벽 1시를 뜻한다. 오늘날 놀러 가서 보는 궁궐은 건물들이 드문드문 있지만 예전에는 처마가 서로 닿을 정도로 빽빽하게 붙어 있었다. 거기에 한옥의 주요 재료인 나무와 종이는 불에 아주 잘 탔다. 따라서 궁궐에서 화재가 일어나는 것이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후의 전개 과정은 정상적이지 않았다. 일단 불이 났으니 급히 불을 끄라는 임금의 지시에 신하들은 건춘문을 통해 전문 소방대라고 할 수 있는 금화사를 불러들였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경복궁의 동궁전이라고 할 수 있는 자선당이 모두 불에 타버리는 일이 벌어졌는데 군사들과 내관들은 물론 신하들까지 우왕좌왕하기만 했다 이때의 상황을 실록에 기록한 사관은 갑작스러운 화재에 다들 어쩔 줄 몰라서 울기만 했다고 힐난했다. 영의정이 승정원 승지에게 세자의 행방을 묻자 아마 임금과 함께 있지 않겠느냐는 식의 대답을 하기도 했다. 다행스럽게도 세자는 아내인 세자빈과 함께 무사히 탈출해서 아버지 중종과 함께 있었다.
야사에는 문정왕후가 불을 지르고, 그걸 안 세자가 새어머니의 뜻을 알아차리고 스스로 불에 타죽기 위해서 그대로 있다가 아버지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 불효자가 되지 않기 위해 탈출했다는 내용이 있다. 화재가 난 원인은 알 수 없고, 그것이 문정왕후의 소행이라고 볼 근거도 부족하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은 문정왕후의 소행이라고 봤기 때문에 그런 식의 야사가 나온 것이다. 무엇보다 화재가 나고 혼란에 빠진 와중에 궁궐에 들어오지 말아야할 사람들이 상당히 많이 드나들었다. 암살이나 납치가 벌어지기 좋은 상황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더 의심할 만한 사건임이 분명하다. 다행스럽게도 살아남은 인종은 1544년 11월, 5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며칠 후에 창경궁 명정전에서 다음 왕위에 올랐다. 인자하고 학문을 좋아하는 성격의 소유자답게 유학에 바탕을 둔 선한 정치를 펼치려 노력했다. 기묘사화 때 죽은 조광조를 신원하고 현량과를 부활시키는 등 중종 때 좌절된 성리학에 입각한 왕도 정치를 실현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런 노력이 꽃을 피우기도 전에 덜컥 병에 걸렸고. 30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
정명섭 작가
0
0
기사 공유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