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의 호르무즈 해협 통제 장기화 우려가 커지면서 걸프 산유국들이 해협을 우회할 수 있는 신규 송유관 건설과 기존 노선 확장 방안을 다시 검토하고 있다. 막대한 비용과 정치적·기술적 난관에도 불구하고, 원유와 가스 수출의 병목을 줄이기 위한 현실적 대안으로 송유관 인프라 재편 논의가 급부상하는 분위기다.
ⓒ블룸버그
2일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UAE) 등 걸프 국가들이 호르무즈 해협을 거치지 않고 에너지를 수출할 수 있는 경로 확보에 나섰다고 보도했다. 관계자들과 업계 인사들은 해협 봉쇄 위험이 상시화할 경우, 새로운 송유관 건설이 걸프 국가들의 구조적 취약성을 줄일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방안이 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이번 사태로 재조명된 대표적 사례는 사우디의 동서 송유관이다. 1980년대 이란·이라크 전쟁 당시 호르무즈 해협 봉쇄 우려 속에 건설된 이 송유관은 총연장 1200km 규모로, 하루 700만배럴의 원유를 홍해 연안 얀부항으로 실어 나르고 있다. 호르무즈 해협을 완전히 우회할 수 있는 사우디의 핵심 수출 통로로 평가된다. 아민 나세르 아람코 최고경영자(CEO)도 최근 이 노선을 “현재 가장 중요하게 활용 중인 수출 경로”라고 평가했다.
사우디는 하루 1020만배럴 수준의 생산량 가운데 더 많은 물량을 해상 대신 송유관으로 돌리는 방안을 들여다보고 있다. 보도에 따르면 동서 송유관의 수송 능력을 추가로 확장할지, 아니면 새로운 우회 노선을 만들지를 놓고 검토가 진행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UAE 역시 기존 푸자이라 연결 노선을 활용해 호르무즈 의존도를 낮출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다만 신규 송유관 건설이 현실화하기까지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 FT에 따르면 사우디 동서 송유관과 유사한 규모의 노선을 지금 다시 건설하려면 최소 50억달러가 들 것으로 추산된다. 이라크를 거쳐 요르단, 시리아, 튀르키예 등으로 연결되는 다국가 노선은 150억~200억달러 수준으로 불어날 수 있다. 여기에 이라크 내 미폭발탄과 이슬람국가(IS) 등 무장세력 위협, 사막과 산악지형 통과 문제까지 겹쳐 사업 난도는 상당히 높다.
정치적 부담도 적지 않다. 송유관 운영권을 누가 쥘지, 유량 통제는 어떻게 할지 등 국가 간 이해관계 조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단기적으로는 완전히 새로운 국제 송유관을 짓기보다, 사우디 동서 송유관과 아부다비-푸자이라 노선의 처리 능력을 확대하는 방안이 보다 현실적인 대안으로 거론된다. 사우디가 네옴 프로젝트와 연계해 홍해 연안에 추가 수출 터미널을 개발하는 방안도 가능성 있는 선택지로 언급된다.
전문가들은 이번 위기를 계기로 걸프 국가들의 인식이 달라졌다고 보고 있다. 대서양위원회의 마이순 카파피 선임고문은 FT에 “모두가 같은 지도를 보고 같은 결론에 도달하고 있다”며 “논의가 가설 단계에서 실제 실행 단계로 넘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호르무즈 해협의 장기적 불안정성이 현실화한 만큼, 기존 상태로는 돌아가기 어려울 것이라는 진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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