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양측이 당국회담 수석대표 '격(格)'을 놓고 절충점을 찾지 못함에 따라 12일 열릴 예정이던 회담이 무산됐다. ⓒ 연합뉴스
남북 당국회담을 하루 앞둔 11일 북한이 결국 3년여만의 남북 회담을 무산시켰다.
북한은 애초 장관급회담에 합의해놓고 정작 실무접촉에선 우리쪽 류길재 통일부장관에 걸맞는 수석대표 요청을 거부해왔다.
급기야 11일 남과 북이 판문점에서 만나 회담 대표단 명단을 주고받을 때 수석대표로 강지영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서기국 국장을 내세웠다. 그러면서도 우리쪽 수석대표가 김남식 통일부 차관이라는 것을 구실 삼아 일방적으로 회담 무산을 통보해왔다.
이번 남북 회담을 준비하면서 이례적으로 긍정적인 태도를 보이던 북한이 돌연 회담을 무산시킨 것에 대해 전문가들은 대체로 충분히 예견할 수 있었던 것이라는 반응이다.
이 가운데 북한은 이번 남북 당국회담을 대화를 위한 대화로 치부하다가 추진 과정에서 적잖이 자존심을 상하게되자 박근혜정부의 원칙론에 불만이 터져나왔다는 분석이 제기됐다.
정부가 이전과 달리 '무조건 회담 테이블에 앉고 보자'는 태도도 아니었던데다가 지금까지 북한이 '내각책임참사'라는 타이틀만 붙여서 격이 다른 인물을 내세운 것도 용납하지 않은 까닭이다.
유동열 치안정책연구소 선임연구관은 "회담 준비 과정부터 우리쪽이 칼자루를 잡고 있었기 때문에 북한은 그동안 자존심이 많이 상한 상태였고, 체면이 많이 깎였다고 느꼈을 것"이라면서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수석대표를 차관으로 격을 낮췄기 때문에 북한이 돌연 강경 기조로 돌아선 것"이라고 말했다.
유 선임연구관은 "다급해진 북한이 남한쪽 요구를 수용하면서 회담을 해보려고 했지만 마지막 순간 수석대표 격을 놓고 결국 본색을 드러냈다. 회담을 앞두고 기선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속셈"이라고 지적했다.
정부의 가이드 라인에 따라 당국회담 준비가 착착 진행되자 북한은 회담의 주도권마저 빼앗길 것으로 판단해 우리측 수석대표의 격에 대해 문제 제기를 했다는 지적이다.
앞서 북한은 당국회담을 먼저 제안할 때부터 한발자국 물러서는 제스쳐를 취했다. 지난 6일 조평통 특별담화문을 통해 회담 장소와 시일에 대한 결정을 정부에 맡긴 것이다.
이후 정부의 '서울 장관급회담' 제안 → 북한의 '개성 실무접촉' 제안 → 정부의 '판문점 평화의 집 실무접촉 역제안'→ 북한의 수용으로 당국회담을 위한 준비 작업이 진행됐다.
이와 함께 북한이 처음부터 회담을 성사시킬 의도가 없었다는 지적도 나온다. 미중 정상회담에서 '북핵은 용납하지 않는다'는 메시지가 나왔기 때문에 북한으로선 애써 '평화무드'를 조성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조영기 고려대학교 북한학과 교수는 "중국이 대화에 나서라는 압박을 해서 마지못해 회담에 나온 모양새였다"면서 "장관급회담에 합의했다가 당국회담으로 명칭을 바꾼 것부터가 그랬고, 게다가 회담 대표단 명단을 끝까지 통보하지 않은 것도 의심스러웠다"고 했다.
조 교수는 "중국의 돌변한 태도에 다급해진 북한은 중국이 대화에 나가라고 하니까 어쩔 수 없이 나온 것이다. 마침 미중 정상회담이 열리니까 남북간 대화 재개로 돌파구를 마련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것"이라면서 "하지만 미중회담에서 한반도 비핵화 합의 등이 전격 발표되자 대화에 나설 의지가 꺾였을 지도 모른다"고 판단했다.
이날 당국회담 무산 직후 김형석 통일부 대변인은 긴급 브리핑을 통해“정부는 김남식 통일부 차관을 수석대표로 한 5명을 대표단으로 내세웠고, 북측은 강지영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서기국 국장을 상급대표로 한 5명의 대표단 명단을 보냈다”고 밝히면서 그간 과정을 설명했다.
회담이 무산되는 마지막 순간 북한은 우리 측이 회담 수석대표로 김 차관을 선정한 것에 대해 "회담에 대한 우롱, 엄중한 도발로 간주한다. 회담 무산에 대한 책임은 남한 정부에 있다"고 반발한 것으로 전해졌다.
김 대변인은 “북한은 EU 국가 등과 회담을 할 때엔 격이 맞지 않다는 이유로 회담 자체를 거부한 사례가 없는 것으로 안다”면서 “우리 측 수석대표의 격을 문제 삼아 예정된 회담을 거부하는 것은 전혀 사리에 맞지 않는다”고 유감을 표했다.
이어 김 대변인은 “정부는 이에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하며 북한은 지금이라도 당국회담에 나오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정부 당국자는 “북측이 남북회담 수석대표로 강지영 조평통 서기국 국장을 내세웠지만 조평통은 외곽 조직으로 그 조직의 위상과 역할을 고려했을 때 통일부의 상대로 보기 어렵다”면서 “조평통에도 위원장, 부위원장이라는 직책이 있는데 그보다 낮은 국장급을 대표로 내세우면 우리 쪽에 장관을 요구한 것은 이치에 안 맞다”고 밝혔다.
이 당국자는 또 “지난 실무접촉에서 이번 당국회담의 수석대표의 급에 대해 합의된 바는 없다”면서 “정부는 이번 회담이 ‘당국회담’으로 바뀌면서 북한 대표에 맞는 수석대표를 내보낼 것이라고 분명히 밝힌 바 있다”고 말했다.
당국자는 “박근혜정부는 결코 대화를 위한 대화를 하지 않을 것이며 실질적인 대화를 위해 노력할 것”이라면서 “격에 맞춰서 회담을 진행하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존중의 표시”라고 덧붙였다.
남북 회담이 무산되자 청와대는 불편한 입장을 드러냈다. 청와대 관계자는 "북한이 과거처럼 상대에게 존중대신 굴종이나 굴욕을 강요하는 식의 행태는 발전적인 남북 관계를 위해서 바람직하지 않다"면서 "특히 새 정부 들어서 첫 남북간 대화를 앞두고 서로 존중하면서 진지함과 진정성을 갖고 임해야 하는데, 국제적인 기준에도 맞지 않는 사람을 대표로 내는 것은 맞지 않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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