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불복 부추기는 국립극단의 싸구려 풍자극
<굿소사이어티 에세이>어이없는 반(反)박정희, 친노의 무대 '개구리'를 보고
영화와 TV 드라마는 때가 너무 많이 묻어버린 장르다. 속화(俗化)되어도 너무 많이 속화됐고, 회복의 기미조차 없으니 안타깝다. 대부분의 경우 허망한 이미지 놀이에 그치니 인간과 삶에 대한 성찰로 이어지는 일은 거의 없다. 연극 무대는 다르다. 무용과 함께 가장 오래된 무대예술, 대량 복제가 불가능하며 무대 위 배우들의 땀방울을 직접 볼 수 있는 것이 연극 장르인데, 제대로 된 무대를 만나는 짜릿한 관극(觀劇)체험은 실로 멋진 것이며 여운 또한 오래 간다.
그런 행운을 필자는 초여름에 할 수 있었다.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에 새 해석을 입힌 한태숙 연출의 명품 연극 ‘레이디 맥베스’를 서울 동숭동에서 보았다. 이 무대는 이미 정평이 있다. 1998년 선보인 이듬해 서울연극제 작품상, 연출상, 연기상을 휩쓴 데 이어 예술의전당 개관 20주년 기념 ‘최고의 연극’으로 선정된 바 있다. 이토록 모던하면서도 한국적이고, 동시에 이토록 새로운 무대는 자주 있는 일이 아니다. 이미 관람한 분들이 적지 않겠지만, 이 연극은 본래의 정극(正劇)을 실험극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원작 ‘맥베스’의 뼈대만 남긴 채 완전히 해체 내지 재구성을 시켰다.
<“이런 게 좋은 연극” 초여름에 본 명품 ‘레이디 맥베스’
즉 왕을 살해하고 왕위를 빼앗은 맥베스 왕이 아니라 남편을 부추겨 범행을 저지르게 한 뒤 죄의식에 빠지는 맥베스 부인이 주인공이다. 무엇보다 이 무대는 배우가 황홀하다. 초연 무대 이후 전율 넘치는 연기를 보여준 마녀 급의 여배우 서주희, 맥베스 왕으로 등장하는 배우 정동환의 조합은 우리를 행복하게 해준다. 필자는 이 무대를 3년 전 처음 보았지만, 재공연을 또 보고 싶었다. 그래서 친구 6명과 함께 보았는데, 막이 내린 뒤 로비를 빠져 나오는 그들의 얼굴도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게 행복한 관극(觀劇)체험의 효과 때문임을 필자는 잘 안다. 운이 좋게도 우리 친구들은 출연배우들과 뒤풀이 자리도 함께 할 수 있었다. 위대한 무대를 만든 우리시대 예술인들과 막걸리 잔을 함께 기울였다는 것도 아무나 누리는 호사가 아닌데, 그런 무대가 어디 또 없나 하다가 찾은 것이 고대 그리스 희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의 작품 ‘개구리’(박근형 각색•연출, 서울 서계동 백성희장민호 극장)이었다.
이번엔 친구 세 명과 함께 갔는데, “그래도 국립극단인데, 믿을만하겠지!” 싶은 믿음이 있었다. 상업연극과 또 다른 품격 내지 안정감을 기대한 것인데, 사실 ‘레이디 맥베스’와 비슷한 측면도 있었다. 연출가 박근형(50)은 원작의 골격만 가져다 쓴 채 그걸 2013년 대한민국 오늘의 이야기로 바꾸었다고 한다. 정치풍자극으로 만든 것까지는 좋은데, 과연 잘 만들었을까? 그게 궁금했다. 원작은 주신(酒神) 디오니소스가 국력이 바닥난 아테네의 재건을 위해 지옥으로 가서 오래 전 죽은 위대한 현자(賢者) 시인들의 조언을 구한다는 내용이다.
그걸 어떻게 우리 이야기로 만들었을까? 우리가 무대를 찾은 것은 마지막 날 공연이었는데, 무대는 젊은 분위기였다. 관객들도 20~30대 층이었지만, 연출을 경쾌하게 잡았다. 좀 가볍다는 느낌부터 들었다. 그것까지는 좋은데, 점점 분위기가 묘하게 흘러갔다. 이게 무슨 일인가? 반(反) 박정희, 친(親) 노무현의 연극이라는 게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정말 믿기 어렵게도 친노, 친민주당 연극 한 편이 국립극단 무대에 버젓이 오른 꼴인데, 처음에 설마 싶었다. 하지만 사실이었다.
국립극단 무대에 오른 친노, 친민주당 연극 ‘개구리’
하도 말도 안 되는 연극이라서 일부 신문에서 이미 지적했던 이 연극의 스토리는 이렇다. ‘개구리’의 주인공은 천주교 신부와 동자승이다. 신부는 “악다구니 개판 세상”이 지긋지긋한 나머지 “나약하고 실수 많았지만 자기 잘못에 대해 정직했던 ‘그 분’의 지혜를 얻고자 저승으로 떠난다. 그 분이 누구지? 신부와 동자승은 3보1배를 하며 저승길로 가는데, 우여곡절 끝에 저승에서 만난 ‘그분’은 전직 대통령 노무현을 말했다. 노무현이란 이름은 등장하지 않지만, 명백하게 노무현이라는 게 암시된다. 달리 말해 노무현이 환생해 대한민국을 다시 다스려달라고 간청하는 모양새가 이 연극이다.
실제로 목숨을 걸고 저승에 도착한 신부와 동자승은 ‘그분’에게 이승으로 함께 내려갈 것을 간청한다. 폼 나고 멋지게 설정된 ‘그 분’은 이런 간청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고 고뇌를 거듭한다. 이런 장면 뒤에 대통령 박정희가 등장한다. 박정희는 연극에서 ‘풍운’이란 남자로 나오는데, 그는 자청해서 속세로 내려가고 싶다고 안달을 하는 권력 욕심 많은 남자로 설정돼 멋쟁이 노무현과 극적으로 대비된다. 선글라스를 낀 분장을 한 그는 더 없이 경박하다.
이후 무대는 ‘그분’과 ‘풍운’의 정치논쟁 구도로 흘러간다. 한국 현대사를 둘러싼 좌우 이념 대결이 국립극단 무대에서 전개되는 구도다. 이렇게 해도 되는 것인가? 못할 것도 없겠지만, 균형감각이 있어야 하고, 국립극단답게 연극적 틀 안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놀랍게도 연극 무대를 약간 아는 필자의 눈에는 실로 가관이었다. 아니 연극을 알고 모르고를 떠나 수준 이하의 정치연극이다. 특히 눈 뜨고 볼 수 없는 무대가 마지막 30여분을 차지한다. 이런 식이다.
박정희는 콧수염을 기른 배우가 연기하는데, 위압적이며 거친가 하면 툭하면 욕설을 해댄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그는 “우리 딸애 작년에 기말시험 본 거 있잖아요. 그걸 가지고 컨닝했다, 점수 조작했다 아주 염병을 떨어요. 그걸 가지고 무슨 시험을 다시 보자, 퇴학시키자. 아유 이 ○○놈들 부모 없이 혼자 산다고 아주 ○을 짜고 있어요. ○○ 옛날 같으면 그냥 탱크로 확!”이라고 홧김에 내뱉는다. 대사 하나하나가 그렇게 경박할 수 없고, 저질스러울 수가 없다. 내용도 지난 해 12월 대선의 불공정성을 암시하며, 정치판의 대선 불복 시비를 반복하는 모양새다.
“이것들이 앞에선 쩔쩔매는 척하면서도 뒤돌면 수첩공주니 어쩌니….”하는 대사도 등장한다. 엄연히 현직대통령을 능멸하는 내용이다. 이건 연극이 아닌데, 객석에서는 당연히 친 노무현 분위기가 형성된다. 연출자의 노골적인 장난 탓이다. “분열과 원한을 심어 놓고, 이분법으로 재단했다” 등 노무현에 대한 비판도 간혹 있지만, 대부분은 박정희에 대한 공격으로 채워진다. 1960~70년대의 공포정치, 세뇌, 특혜와 부의 대물림 등을 노무현 진영 쪽에서 마구 꼬집는다.
‘그 분’은 박정희의 이른바 친일 행적을 이렇게 공격한다. “당신은 피로 시작돼서 피로 끝난 인생이야. 그새 잊었는가, 왜놈들의 앞잡이가 되고파 손수 혈서를 쓰던 일을? 만주 벌판에서의 그 치욕적인 활동을?” 연극무대에서 재연되는 과거사 논쟁일까? 정식 무대가 아니고, 야당 당원들을 위한 여흥의 자리에서 그 따위 대사가 나왔더라도 수준 이하라는 소리를 들었을 텐데, 이건 해도 해도 너무했다. 필자의 눈에는 ‘개구리’ 무대는 연극이 아니었다. 연극 이전의 차원에 머물고 있었다.
실로 아찔한 이 나라 무대예술의 추락
이런 따위의 무대를 정치풍자라고 포장한 채 국립극단이 무대에 올리는 건 실로 아찔한 이 나라 무대예술의 추락을 말해준다. 놀라운 것은 연출가 박근형이라는 자의 반응이다. 그는 “현재 권력을 가진 쪽을 신랄히 풍자하는 게 예술이 아닌가?”라고 말했다고 신문들이 보도했다. 무대가 너무 너절히 몸 둘 바 모르겠다고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이 감히 그 따위 발언을 하는 것이다. 더 가관은 따로 있다. 국립극단 예술감독이라는 손진책의 이 싸구려 무대 옹호은 목불인견 수준이다.
그는 “은유와 풍자보다 지나치게 직설화법이 많은 게 다소 유감이지만, 이런 연극을 현재 상황에서 국립극단이 만들 수 있다는 건 그만큼 한국 사회가 건강하다는 방증”이라고 말했다. 동숭동 뒷골목에서 올려질 법한 싸구려 정치극을 올려놓고 이런 변명과 옹호를 하다니. 국민의 세금으로 연극무대를 꾸미는 그들은 막상 무대도 모르고 정치감각도 없는 엉터리 광대일 뿐임을 보여주는데, 국립극단을 지휘 감독하는 문화체육관광부는 대체 무엇을 하는 관청인지가 궁금하다.
영혼 없는 공무원으로 채워진 그들이 박근혜정부와의 국정철학 공유하고 있는지도 궁금하고, 최소한의 직업윤리에 충실한지를 따지고 싶다. 안타깝게도 싸구려 정치연극 ‘개구리’는 국내 일간지에서 약간의 논란이 일었지만, 의미 있는 지적과 반성이 생겼다는 말을 들어본 바 없다. 필자와 연극을 함께 본 한 여성은 이렇게 말했다. “놀랬어요. 문화계에 이른바 좌빨들이 좀 있다고 들었지만, 이 정도인지는 몰랐거든요.” 필자의 얼굴이 화끈댔다.
그녀의 말처럼 TV프로그램, 영화 등에 숨겨진 '좌파 코드'가 너무 자주 발견된다. CJ E&M(방송, 영화 등 엔터테인먼트를 담당하는 CJ의 계열사)의 일부 문화 콘텐츠 중에는 ‘좌파 코드’가 내장된 것이 적지 않다는 지적으로 오래 전부터 있어왔다. 또 지난 해 개봉해 1231만 명의 관객을 동원한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의 경우, 영화 속에 기층민중에 기반을 둔 정치, 반(反)외세 자주화 같은 ‘노무현 코드’의 메시지를 다수 내장하고 있었다. 오죽하면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서실장이었던 문재인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이 영화를 보고 눈물을 흘렸을까?
그 밖에도 그 동안 CJ가 제작 혹은 개봉해 성공을 거두었던 영화들 중에는 한국 현대사나 한국 사회의 부정적인 측면들을 부각시키는 영화들이 적지 않았다. '도가니'(2011년), '화려한 휴가'(2007년), '말죽거리 잔혹사'(2004년), '공동경비구역 JSA'(2000년) 등이 그것이다. 대기업 문화 콘텐츠에 이어 이번에 국립극단의 이름으로 좌파 코드 연극이 만들어진 것인데, 이 사태를 과연 어찌해야 할까?
좌파연하지 않으면 명함을 못 내미는 사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상업적으로 돈이 안 되고, 무대의 완성도도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분위기는 과연 언제까지 계속되어야 할까? 상업연극이 그럴 수도 있다고 하지만, 국립의 간판 아래 저토록 저열한 정치연극 무대를 꾸미고, 그걸 연극행위라고 믿는 저 수두룩한 얼간이들을 과연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그 연극에 참여한 젊은 배우들은 무얼 생각할까? 겉멋만 잔뜩 든 문화계 좀비 좌파들이 추는 깨춤을 과연 어떻게 제압해야 할까?
아는 이미 다 알지만, 과거 정치 교육 문화예술 등에 머물렀던 좌파의 활동은 이제 종교, 군(軍), 사법부까지 그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실로 두려운 일이다. 어떤 이의 표현대로 이들은 '음지'에 머물지 않고 양지로 나와 우리의 기본 질서에 편입할 것을 정면으로 요구하고 있는 수준이다. 국립극단 ‘개구리’는 필자에게 그게 엄연한 현실임을 보여줬다. 그래서 그 연극은 악몽 아닌 악몽을 안겨줬다. 싸구려 정치연극 ‘개구리’는 그들의 겁나는 실체를 새삼 보여준 셈이다.
글/조우석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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