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이 이병철 정주영보다 많은 곳은?

데스크 (desk@dailian.co.kr)

입력 2014.05.01 09:56  수정 2014.05.01 09:57

<굿소사이어티 칼럼>서울시청 도서관에 희망의 책을 신청하자

'세계 책의 날'을 하루 앞둔 지난 4월 22일 서울 중구 태평로 서울도서관에서 어린이들이 독서를 하고 있다.ⓒ연합뉴스

얼마 전 인터넷 뉴스를 보고 문자 그대로 눈을 의심했다. 서울시와 생명보험사회공헌재단은 자살시도로 응급실을 찾은 시민 중 취약계층에 대해 1회에 한해 최대 50만원의 의료비를 지원한다고 밝혔다. 의도 자체를 모를 바는 아니다. 한국인의 자살률은 세계적 수준이다. OECD 1위는 너무 하지 않느냐며 아우성들이니 당국은 뭐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살 시도자에게 50만원을 준다니 이건 좀 아니지 않은가?

인터넷에선 “살다가 힘들면 서울로 이사 가서 ‘자살 찬스’ 한 번 써야겠다”는 섬뜩한 농담이 떠다닌다. 어느덧 대한민국에서 자살(自殺)은 인간이 택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옵션 중 하나로 당당하게 인정을 받고 있는 꼴이다. “살다가 힘들면 자살할 수도 있지.”“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랬을까.”뭐 이런 식이다.

전국 초·중·고 도서관의 343만여 권을 분석하니…

전통적으로 우파는 자살에 비판적이다. 미국의 현대 보수주의(Conservatism)가 기독교 철학에 기반하고 있어 그런 측면도 크다. 하지만 종교가 없는 우파들도 개인(個人)의 힘을 강조하면서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있자’고 말한다. 살다 보면 미래에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현재가 힘들더라도 기회를 준비하자는 거다. 우파가 지지하는 시장경제는 ‘역전승’에 열린 체제다.

문제는 인생의 모든 문제에 대해 무조건 세상 탓, 사회 탓을 하는 사람들이다. 모든 좌파가 항상 그렇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언제나 남 탓을 하는 데 익숙한 사람들이 좌파에 유독 많은 건 사실이다. 그런 그들이 자살에 관대한 건 필연인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또 고(故) 노무현 대통령 얘길 하면 악플이 쏟아지겠지만, 어쩔 수 없다. 그는 자기 앞에 놓여있는 수많은 문제를 그대로 남겨두고 피안의 저편으로 도망쳐 버린 사람인데, 막상 그는 추종자들에게 거의 신(神)으로 모셔지고 있는 건 주지의 사실이 아닌가?

2009년 5월 23일 이후 그들은 더 이상 자살을 비판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는 즉시 신을 부인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노무현이 처음일까? 그렇지는 않다. 자살과 동시에 신화가 된 사람으로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도 있다. 노무현에 비한다면야 상대적으로 의미 있고 고매한 죽음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의 분신(焚身)으로 인해 백 번 두드려도 열리지 않던 노동 문제에 대한 담론의 장은 늦게나마 열렸다.

그렇다고는 해도 전태일의 죽음을 100% 긍정할 수만 있는 걸까. 할 수만 있다면 자살이라도 해서 자신의 의사를 관철해야만 하는 걸까. 복잡한 문제다. 확실한 건 어른들에게도 복잡한 이 문제를 아이들에게 전달할 때는 더욱 세심해야 한다는 점이다. 어른의 기억이 ‘물 묻은 발자국’이라면 아이들의 기억은 ‘마르지 않은 아스팔트 위의 발자국’처럼 오래 남는다.

학교 현장의 현실은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다. 전태일을 긍정적으로 조명한 책들을 집중적으로 뿌려대며 그의 삶을 일방적으로 미화하고 있다는 정황이 포착되고 있다. 21C미래교육연합의 조형곤 대표는 최근 전국 256개 초‧중‧고등학교 도서관에 꽂힌 343만 여권의 책들을 도서명과 저자 출판사를 중심으로 분석했다.

결과는 충격적이다. 전태일과 관련된 책은 백범 김구를 제외하면 이승만, 김대중, 박정희, 정주영, 이병철 등 현대사를 상징하는 그 어떤 인물보다 많이 보급돼 있다. 전태일이 중요한 인물일지언정 이승만보다 중요한가? 박정희와 김대중과 노무현보다 중요한가?

전태일에 관한 책이 특히 많은 곳은 중학교 도서관으로 집계됐다. 소싯적 그의 전설을 공부하며 투쟁심을 키웠던 전교조 교사들이 많은 학교일수록 이런 책의 비중이 높았다. 중학교만이 아니다. 출판사 천재교육이 발간한 ‘고교한국사’ 교과서 341페이지에는 “전태일의 죽음이 한국 사회에 미친 영향을 조사하여 발표해 보자”는 활동과제가 제시돼 있기도 하다. 중학교 때 전태일에 대한 책을 읽고 고등학교에 그의 영향력에 대해 토론한 학생이 과연 한국의 현대사를 균형 있게 바라볼 수 있을까? 지금, 학교 도서관은 자살을 찬미하고 있다.

자살과 함께 신화가 된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찬양

학교 도서관의 도서목록이 문제의 전부는 아니다. 지난 달 원고에서도 소개한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문화체육관광부의 수상한 교양도서 목록’ 기사는 정부가 팔을 걷고 나서서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책들을 추천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직후 궁금증이 생겼다. 학교 도서관이 저 모양이고 정부의 교양도서목록이 저 지경인데, 공공도서관은 과연 정상일까? 한국의 공공도서관 시스템은 세계적인 수준이라고들 하지만, 그럴까?

그런 굴지의 지식 정보의 인프라가 세상에 대한 온갖 불만과 삐딱함을 전파하는 도구로만 사용되고 있다면 이건 심각한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서울도서관이다. 원래 서울시 청사로 쓰이던 건물은 2012년 10월부터 서울도서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4년간의 리모델링을 거친 만큼 시설은 훌륭하다. 1층과 2층을 있는 17단 벽면서가는 말할 것도 없고 모유수유실에 책 소독기에 장애인을 위한 점자책과 촉각도서까지 1300여종 마련돼 있다.

문제는 서울도서관의 핵심을 이루는 책들이 어떤 구성으로 되어 있느냐다. 개관한 지 얼마 안 된 만큼 서울도서관의 장서는 27만 권으로 아직 그리 많지 않다. 서울도서관은 앞으로 70만 권까지 장서를 늘릴 계획을 밝힌 바 있다. 그렇다면 관건은 나머지 50만 권이 ‘어떤 책들’로 채워지느냐다.

일단은 27만 권의 현황을 조사해 봤다. 그래서 서울도서관에 27만3288권(3월 10일 기준)의 도서목록을 요청했고, 조형곤 대표가 한 것과 비슷한 작업을 해 봤다. 제목에 주요 인물들의 이름이 포함된 책들을 검색해 본 결과 제목에 ‘김대중’이 들어가는 책이 124권으로 가장 많았다. 2위는 노무현으로 103권이며 다음부터 이명박 96권, 이순신 90권, 박정희 85권, 안철수 82권, 김정일 46권, 박근혜 45권, 이승만 40권, 안중근 31권, 히틀러 31권, 김영삼 27권, 정주영 26권, 마오쩌둥 26권, 체 게바라 25권, 이건희 25권, 시진핑 23권, 이병철 20권, 백범 김구 22권, 박원순 21권, 김일성 17권, 김정은 17권, 전태일 12권 등의 순서였다. 학교 도서관에서 전태일을 얼마나 비정상적으로 띄우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비중은 작지만 ‘종북 도서’도 대출되고 있었다. 도서출판 615가 발간한 '내리사랑'이라는 책을 보자. 자칭 농민시인이라는 정설교가 집필한 이 책은 박현채의 '민족경제론'에서 한 발도 떼지 못한 농본주의(農本主義)에 경도돼 있다. 거기까지야 양해를 해준다고 해도 다음의 표현들은 충분히 흥미롭고, 충분히 경악할 만 하다.

“김정일 위원장의 서거를 애도합니다.” (53쪽)
“국가보안법에서는 아직도 북은 국가가 아니고 반국가단체라고 하니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다.” (55쪽)
“야권단합 밑거름 된 민중의 벗 이정희 대표” (79쪽)

이외 서울도서관에는 같은 출판사에서 출간된 책이 몇 권 더 있다. 비슷비슷한 내용이다.

지금, 당신이 당장 해야 할 일 하나

당장 이런 책을 서울도서관에서 빼라고 말하고 싶지만 쉽지는 않아 보인다. 대한민국은 자유국가라서 이런 책이 발간되고 유통되는 걸 막을 길이 없기 때문이다. 도서출판 615의 책들은 교보문고에서도 팔고, 예스24에서도 판다. 시민들이 원한다면 서울도서관이라고 비치를 거부할 수는 없다. 어쨌든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과 나는 세금으로 집행된 종북 도서들의 구입비를 댄 꼴이 돼 버렸다.

서울도서관은 ‘2014년 장서구성계획’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사상과 종교, 정치적 입장, 개인적 이해관계 등을 배제한 중립적인 입장에서 자료를 선정한다.” 불필요한 논쟁을 피하겠다는 의도가 보인다. 말은 좋지만 출판시장과 한국사회 담론의 지형 자체가 지금처럼 편향이 심할 경우 도서관의 ‘탈 가치’ 원칙은 앞으로 지식과 정보의 편향성을 그대로 반영하는 통로로 악용될 수도 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은 당장 할 수 있는 일부터 하자는 제안을 해본다. 서점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서울도서관 장서 중에 대한민국의 역사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의 책은 많지 않다. 이 비중을 높이기 위해서는 결국 이용자들이 나서는 수밖에 없다. 서울도서관에 좋은 책들을 신청하는 걸 사회 운동의 하나로 만들어보면 어떨까?

서울시민이거나 서울시 소재 직장인이면 누구나 서울도서관의 회원이 되어서 도서를 대출하고 희망도서를 신청할 수 있다. 우선은 홈페이지에 가입하는 작업이 필요하다(lib.seoul.go.kr). 그 뒤 신분증을 가지고 도서관 2층에 내방해 회원증을 만들면 3권의 책을 14일간 빌릴 수 있다.

더 중요한 건 ‘희망도서 신청’이다. 홈페이지 상단 메뉴에서 ‘나의 공간 – 희망도서’를 클릭한 뒤 책에 대한 정보를 입력하면 월 3권, 1년에 15권을 신청할 수 있다(http://lib.seoul.go.kr/www/html/ko/hopeBook.jsp).

출판시장의 좌편향이 극심한 현재 상황에서는 서울도서관 또한 좌편향으로 가는 것이 오히려 정상일 수도 있다. 시민들의 관심이 절실한 이유다. 그 관심이 결국 도서관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다. 지금, 서울도서관에 이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희망의 책’들을 신청하자. 오염될 대로 오염된 뒤에 뒤늦은 한탄을 할 시간이 우리에겐 없다.

글/이원우 미래한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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