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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장엽 탈북 때 북 대사관 직원 영웅칭호 받은 이유가


입력 2014.09.01 10:42 수정 2014.09.01 10:46        김소정 기자

김정일, 황 망명 못믿고 주중 한국영사관 보위부 요원 포위

중국과 일전불사 의지 불태우다 북 대사관 안전참사 확인해줘

지난 1997년 4월 20일 북한 노동당의 황장엽 전 국제담당 비서가 측근인 조선여광무역연합총회사 김덕홍 전 총사장과 함께 서울공항을 통해 입국해 만세삼창을 하고 있는 모습.ⓒ연합뉴스
17년 전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의 망명 사건은 그가 북한의 주체사상을 집대성한 인물이자 김일성과 김정일의 최측근 인사였던 만큼 세계적으로 주목받았다.

당 국제비서와 최고인민회의 의장까지 지낸 그는 1997년 일본에서 주체사상 강연을 끝낸 뒤 북한으로 돌아가기 위해 들른 베이징에서 돌연 한국총영사관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당시 74세의 나이였으며, 지금까지 북한 최고 권력자의 망명으로 기록된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당초 황장엽 씨의 망명을 전혀 의심하지 못했던 북한 당국은 그가 납치된 것이라고 주장했고, 이에 대해 중국 정부가 상당히 곤란해 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중국 정부는 황 씨를 곧바로 한국으로 보내지 않고 제3국을 통하도록 해 황 씨의 한국 입국까지 2개월여가 걸렸다.

이번에 북한 내부에 정통한 한 소식통은 황장엽 씨의 망명 절차가 종결되기까지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중국과 전쟁까지 불사할 각오로 오기를 부렸던 내막을 ‘데일리안’에 공개했다.

이 소식통은 “처음 황장엽 씨가 한국영사관으로 들어갔다는 보고를 받은 김정일은 보위부와 정찰총국 요원 1500여명을 급파했다”며 “처음에는 황 씨가 납치된 것으로 파악하고, 북한 측 요원들이 한국영사관을 포위한 채로 대치했다”고 전했다.

소식통은 이어 “북한 요원들이 한국영사관을 둘러싸자 중국 정부도 무장경찰 만여명을 보내서 북한 측 요원들을 포위했다. 중국 정부의 조치에 따라 뒤늦게 황장엽 씨의 망명 사실을 파악하게 된 김정일이 마지막까지 상당히 고심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졸지에 베이징 한복판에서 한국영사관을 중심으로 북한과 중국의 병력이 동원돼 대치를 벌이는 사상 초유의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당시 중국 정부가 북한에 황장엽 씨의 망명 사실을 확인해주며 포위를 풀라고 종용했으나 김정일은 시간을 끌면서 전쟁도 불사하겠다고 버텼다”고 소식통은 말했다.

이런 초긴장 상태까지 만들면서 김정일이 고심을 거듭했던 이유는 황 씨의 망명을 주장하는 한국 정부의 말도, 이를 확인해준 중국 정부의 말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정일이 결국 황 씨를 포기할 수 있었던 것은 중국 주재 북한 안전참사가 황 씨의 망명을 최종 확인해주면서 가능했다고 한다. 소식통은 “황장엽 씨의 망명을 믿지 못하던 김정일이 종이에 ‘망명인가, 아닌가’를 천번 이상 썼다는 말이 있다. 이런 와중에 안전참사가 ‘망명이 맞다’고 확인해주자 그제서야 김정일은 ‘황장엽의 몸값 올려주지 말라’고 했고, 비로소 한국영사관의 포위가 풀렸다”고 전했다.

그리고 황 씨의 망명 사실을 직접 확인해줬던 중국 주재 안전참사는 ‘영웅칭호’를 받았다고 한다. 소식통은 “안전참사에게 영웅칭호를 하사하면서 내세운 명분은 자칫 중국과 전쟁을 치를 뻔한 사상초유의 사태를 막았다는 것이지만, 황 씨의 망명 사실이 퍼지면서 북한 내부가 요동칠 것이 분명한 만큼 영웅칭호 하사로 사건을 서둘러 종결시킨 측면이 크다”고 설명했다.

김정일로서는 자신을 비롯해 북한 주민에게 주체사상을 가르치던 황 씨의 망명 사실을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황 씨가 집대성한 주체사상은 북한의 국가사상으로서 황 씨는 말년에 이를 해외에까지 전파하는 외교 업무를 맡았다. 게다가 황 씨는 주체사상을 김일성주의로 발전시키는 데에도 기여했다. 김정일이 백두산 정기를 받고 태어났다는 출생설을 만들어 김정일의 후계체제 정당화에도 기여한 바 있으며,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 등의 호칭도 만든 것으로 알려졌다.

황장엽 씨의 망명 이유를 놓고 김정일 정권이 군부로 권력이동을 시키면서 입지가 약화된 데다 그 즈음 북한 노동신문에 실린 기회주의자에 대한 비판 기사가 자신을 겨냥하고 있다고 판단한 데 따른 것이라는 평가도 있다.

하지만 김일성 사망 이후 베이징에 무역회사 설립을 도왔던 황 씨가 이 과정에서 한국의 사업가, 목사 등과 빈번하게 접촉하면서 독재사회에 대한 회의를 느끼게 됐고, 그가 수기에서 썼듯이 북한 체제에 의분을 느껴 외부에 실상을 알리고 변혁을 도모하고싶은 동요가 일었기 때문일 수 있다.

황장엽 씨의 망명 이유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듯이 그의 생전의 행적에 대해서도 탈북사회에서는 “그가 북한 체제에서 살 때에는 주체사상을 만들어 체제 존속에 일조한 측면이 크지만 남한으로 온 이후 북한을 지도자 개인의 이기주의를 위해 조직적인 폭력을 가하고, 거짓 선동과 국민에 대한 강압으로 유지되는 독재국가로 규정하고, 자유민주주의에 의한 통일을 주장했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전문가 일각에서는 “황장엽 씨의 주체사상은 결코 발전적인 철학도 아니고, 결과적으로 한민족에게 큰 피해를 안긴 죄업이 있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 씨의 망명은 역사적으로 두 번 다시 올 기회가 아니었는데도 당시 정권이 황장엽 씨를 활용해 북한 간부사회에 영향을 끼치지 못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었다”고 말했다.

김소정 기자 (bright@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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